라이프 오브 유알피

조정훈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석사과정)
cosmos4910@kaist.ac.kr


글은 필자가 2016 6월부터 2017 2월까지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따뜻한 기술에 기반한 사회적기업가정신이라는 주제로 학부생연구참여 프로그램 (Undergraduate Research Participation 프로그램, 이하 URP 프로그램) 수행하면서 후일담이다.


눈 앞이 캄캄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곰곰히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몇 시간째 모니터를 쳐다봐서인지 흐리멍텅해진 머리로는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애초의 계획대로였다면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신명나는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을텐데.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의 논문을 찾아 구글의 바다를 헤매이고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 탱자탱자 노니는 학부생활의 마지막을 보내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했던 나의수업 하나 듣는 학부 마지막 학기가 소리 없이 파괴되는 중이었다. 그렇다, 때는2016년 가을. 과거의 나와 마주앉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냐고 멱살잡이로 다그치고 싶어지는 나는 10번째 학기를 맞이하는 연차초과 말년 학부생이자, URP 프로그램 참가자였다.

졸업을 앞둔 학부생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2016년 봄, ‘삶의 질과 기술정책이라는 수업을 수강하던 나는 수업 내용을 URP 연구로 발전시켜보지 않겠냐는 교수님의 제안을 덜컥 수락하였다. 물론 당시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던 학부생으로서, ‘과학 기술과 그와 관련된 정책으로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수업 내용에 흥미가 돋았던 것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어차피 여유로울 것이 분명한 마지막 학기였기에URP 하나 정도야’, 하는 가벼운 생각도 또한 들었다. 꽃 피는 5, 그렇게 나는 URP 신청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공대생으로서는 하기 힘든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 경험을 미리 쌓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한껏 부풀었다. 교수님과의 면담에서 정해진 연구 주제는 수업에서 다루었던이원(Eone)’딜라이트(Delight)’라는 소셜벤처 케이스를 바탕으로 그 성공요인을 도출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URP, 그리고 연구라는 것이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조금씩 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느낀 것은 당장 여름방학부터였다. 연구의 모든 과정이 새로웠던 내게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논문을 검색하는 방법, 자료를 찾는 방법, 보고서를 작성하는 방법에서부터 IRB 신청이나 출장신청과 같은 일까지. 당연하지만 분명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예상대로 였다면 밀도 있는 연구 시간을 보냈어야 했던 여름방학은 별다른 내용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교수님과 면담 시간에 URP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모든 것이 돌연 분명해진 것처럼 보이다가는, 면담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면 다시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열심히 하고는 싶었지만 어떻게 열심히 해야할지 모르는 나날이 이어졌다. 연구 과정도, 그 목적도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되는대로 우선 소셜벤처와 관련된 선행연구를 조사하던 나는 망망대해와 같은 연구의 바다에 표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득한 수평선 저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한 채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던 나는 마치 URP라는 작은 배 안에 갇힌 것 같았다. 문득 언젠가 보았던 영화라이프 오브 파이이야기가 떠올랐다. 영화처럼 작은 배 안에는 제대로 놀지 못해 말라 죽어가는 나와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벵갈 호랑이같은 연구 주제만이 남겨져 있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내게 URP연구 그 자체이자 동시에 소셜벤처였다. 멍하게 빛나는 구글 스칼라 검색창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연구가 끝났을 때 살아있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어쨌거나 리차드 파커, 아니 URP연구는 앙상한 뼈만 남긴 채 나를 뭍에 닿게 할 것이라고.

이제 와 깨닫게 된 것이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연구주제 그 자체였다. 소셜벤처와 나는 많은 부분에서 비슷했는데, 아직 그 개념이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창업 생태계 내에 그 입지는 더더욱 자리잡히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기술 기반 스타트업이 성공하기 힘든 그 이상으로 성공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그렇듯 소셜벤처 창업자들 또한 부족한 경험과 탄탄하지 못한 자본에 고통받고 있었다. 정부 차원에서는 소셜벤처를 정책적으로 구분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국내외에서 모두 선행연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한 마디로 걸음마 단계였다. 연구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는 내가 걸음마 단계의 주제와 함께 씨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선행연구조차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덤벼든 인터뷰 과정에서는어려운 주제를 연구하시네요라는 말이 언제나 따라붙었다. 가뜩이나 관련 분야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는 학부생 나부랭이인 내가 도무지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논문을 쓰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URP연구와 소셜벤처는 내게 애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URP연구는 마무리되어야만 한다. 내게 중도 포기와 같은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좁은 배 안에서 영화 주인공 파이는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살아남았다. 도망칠 수도, 길들일 수도 없다면 남은 선택은 같이 살아가는 방법뿐이다. 단지 최대한 잡아 먹히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지 내 마음 속에는 URP연구를 통해 탁월한 결과를 만들어내겠다는 기대와 희망보다는 결과가 무엇이 되었건 일단 무사히 연구를 끝마치고 논문을 마무리 짓겠다는 희망사항이 자리를 잡았다. 좋은 결과를 내는 것보다 어떻게든 연구를 무사히 끝마치는 것이 당면한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연구주제를 끌어안고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경험의 연속을 대학원 입학 전에 어느 정도나마 미리 체험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 또한 싹트기 시작했다. 내일 끔찍하게 못하는 것보다는 어제 끔찍하게 못했던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URP연구를 시작할 때의 목표는 그게 무엇이든경험해보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실패할 수 없는 연구의 과정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무언가를 술회하기에 나의라이프 오브 유알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URP 워크샵 등의 관련된 공식 일정들이 남아있으며, 무엇보다 아직 내지 못한 연구주제의 결론이 가장 문제였다. 하지만 어쨌거나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나와 연구주제를 실은 배가 뭍에 닿으면 마치 파이를 뒤에 남기고 홀연히 떠난 리차드 파커처럼 URP 나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경험이라는 최초의 목표만은 확실히 이루었다는 혼자만의 만족감은 언제까지고 남겨지게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나의 URP 라이프는 이미 충분히 완벽하다.


추천 구경거리

나의 뱅갈호랑이, 소셜 벤처 아이템 <Eone: Bradley Timepiece>
출처: Eone 공식 인스타그램

Cj4dvLMXAAEPqpS만질 수 있는 손목시계브래들리 타임피스는 2012년에 시작한 스타트업이원(Eone)’이 만들어낸 시각장애인을 위한 손목시계다. 이원 김형수 대표는 제품 개발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이 기능뿐만 아니라 미적 요소에도 큰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기능성과 디자인을 겸비한 손목시계를 제작하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서있는 고정관념의 장벽을 허물고 사회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모두(everyone)를 위한 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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