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뒤켠의 과학기술인: 과학적 합리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단상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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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남 |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

naivestp-stpreaders20141223과학, 기술, 그리고 정책과 관련된 복잡한 이슈들을 가볍지만 진지하게 핥아보는 프로젝트. 박대인과 정한별로 이루어진 비즈니스 유닛이자 온라인 인격체이다. 나이는 한국 나이로 네 살. 흔히 과학기술정책이라 생각하는 R&D부터 (과학) 교육, (연구자의) 일자리 문제, 육아 및 경력단절, 과학기술계의 다양한 소수자 이야기, 여성 과학기술인, 더 나아가 과학자들의 일상생활─출퇴근과 커피 섭취량과 대인관계 및 취미생활─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인(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이슈들을 이야기한다.


과학기술인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다. 1억 원짜리 퀴즈 쇼의 마지막 OX 퀴즈 질문을 보는 것 같은 이 명제는 몇몇 현실 속 사례들에 덧씌워져 일반화된 사실인 양 언급되고는 한다.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해 결국 세상을 파괴하는 무기, 로봇, 혹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미친 과학자라든지 랩, 방, 식당을 무한 순환하는 while(1) 루프에 빠진 공돌이 공순이 이미지는 소설, 드라마, 게임 등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물론 요즘에 어디 가서 이렇게 말 하고 다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비난받기 딱 좋지만, 분명 마음 한구석에서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공계인들은 어떤 사회문제에 주로 관심이 있고 어떤 입장을 어떻게 취하는가. 이 글에서는 우리의 얄팍한 경험에 근거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일단, 이 의문을 가지는 당신은 지극히 정상이라 말하고 싶다. 과학기술인이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만 같은 무형의 도덕적 압력을 느끼면서도 무엇을 근거로 삼아야 할지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은 당신만이 아니다. 과학자와 공학자가 이해하는 사회를 엿보려면 무엇을, 어디에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없다. 작년(2016) 말, 사단법인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가 발표한 과학기술인 시국 선언이 어느 정도의 화제를 모은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사건인데, 이는 이공계인이라는 정체성이 직접 사회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일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한국에서 시국 선언은 주로 교수, 학생, 학부모 등 세대 기반의 사회적 계층에 따라 발표되어왔거나 예술계, 음악계, 의학계, 법조계 등 전문집단의 차원에서 작성되어왔다. 이에 비해 과학기술계의 입장에서 발표한 시국선언이 얼마나 있었는가 돌이켜보면 딱히 기억나는 사례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개개인의 목소리는 언제나 있었다. 칼럼을 쓰고, 서명을 하고, 시위를 하는 개별 연구자들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성실히 존재해왔다. 과정남(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이라는 DIY 팟캐스트 유닛의 입장에서 만나는 개별 과학자, 공학자들은 주로 박사의 끝 무렵이거나 박사 후 과정, 혹은 신진 연구자의 입장에서 한국 사회를 체화하고 있었고, 이들의 문제의식이란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이 가질 법한 것들이었다. 젊은 연구자들이 말하는 연구비(특히 인건비) 문제, 연구실 내의 문화와 관련된 문제들, 여성 연구자들의 현실과 경력 문제, 박사급 연구자들의 일자리 문제는 한국 사회의 노동 문제, 청년 문제,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 안전망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연구실 밖, 작은 DIY 방송에 나와 자신의 인생사와 연구사를 풀어내는 젊은 연구자들은 누구보다 한국 사회에 관심이 많았고, 큰 틀의 사회문제에 각자가 처한 현실을 대입해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시민이자 과학기술인이었다.

개별 과학기술인의 목소리가 과학과 공학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학회에서 발표되는 것도 아니고, 논문의 형태를 취하지도 않으며, 세부 전공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jargon)로 분석되어있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과학적 업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 음악으로, 글 쓰는 사람이 글로,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법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는 하는데, 과학기술인이 세부 전공 영역의 업적을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한 생각을 전하는 방법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과학과 공학 지식체계 고유의 속성 탓으로 돌리기에는 과학기술을 둘러싼 국가 정책과 제도들이—특히, 인건비를 포함한 연구 예산의 상당 부분을 국가로부터 충당한다는 현실—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개인의 목소리는 많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를 과학기술인의 목소리라고 인식(혹은 인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과학기술인을 연구실이라는 공간에 종속된 정체성으로 생각해왔다면, 목소리를 듣는 입장의 누군가에게 있어 ‘연구실 뒤켠의 연구자’는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문학에서나 허용되는, 그 자체로 형용 모순적인 존재였던 것은 아닐까.

연구소와 연구실, 랩코트와 논문이 과학기술인의 전부가 아니라면 이들은 연구실 밖에서도 오롯이 과학기술인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한국 사회에서도 다양한 단체들이 연구실 밖에서 과학기술인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KAST)부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KOFST, 과총),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등 다양한 층위의 단체들이 긴 시간에 걸쳐 활동해왔다. 게다가, 이미 있는 단체들의 입장과 활동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새로 만들어진 단체도 있다. 앞서 잠시 언급한 ESC는 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의 약자로써 change(변화)라는 개념에 방점을 찍고 있는 사단법인이며 필자들도 창립 준비과정부터 함께하고 있다.

ESC라는 사단법인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참여자이자 관찰자인 우리는 세 가지 특징을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과학과 공학이 동시에 언급될 때 보통 Science and Engineering이라고 표현하는 데에 비해 ESC에서는 공학을 앞부분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약자를 기억하기 좋게 만들기 위한 기능적 목적도 있었지만 기존의 단체들이 대부분 별다른 이유 없이 과학을 먼저 언급하는 데에 대한 간접적 문제제기를 하는 부분이 있다. 사실 활동하는 회원들 중 다수는 순수 과학, 이론 연구에 더 집중하고 있는 자기모순적인 면모가 있지만 응용 연구에 집중하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려는 의지의 발로라고 봐 줄 수도 있겠다.

둘째는 이 조직이 꽤나 느슨하고 적당한 공감대에 기초해 기획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들의 팟캐스트 활동(과정남)도 그저 어느 날 밥 먹고 커피 마시다가 문득 꺼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ESC도 사회문제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친한 과학자, 공학자, 그리고 그 주변인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나온 제안으로부터 출발한 셈이다. 단순 이익집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고, 친목모임과 같은 분위기 탓에 조직 자체가 굉장히 수평적이고 느슨하며, 단체의 외연을 다양성의 확보라는 측면으로 넓히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다시금 주목해 볼 만하다. 과학기술인의 조직을 표방함으로써 과학기술자들끼리의 모임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있는 주변인들,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고자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직 내 구성원들은 대부분 학술적 배경이 다르며 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하고 이공계 연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과학교사들도 활동하고 있으며, 현업 과학 공학에서 손을 뗀지 한참인 필자들도 ESC에 소속되어있음을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

연구실 밖에서 과학기술인들이 모여 공감대를 이룬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같은 학과의 바로 옆 연구실에서도 어떤 연구를 하는지 알기 힘들고, 대화를 할 기회가 있어도 알아 듣기 힘들다는 점에는 대다수의 과학기술계 연구자들이 동의하리라 믿는다. 그렇기에 ESC라는 조직의 구성과 성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일견 과학 공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단체가 친목모임의 성격에서 출발했음을 감안하더라도 신기한 지점들이 있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단체들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사람을 모집하는 것과는 반대로 ESC는 일단 단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을 모으고 이들이 합의하는 무언가 좋은 일을 찾기 위해 헤매는, 상당히 특이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존재 의의를 얻는 조직의 입장에서는 마이너스이겠으나 다원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조직의 입장에서는 플러스일 수도 있겠다. 가령, ESC의 상시 의제 중 하나는 조직 내 구성원의 다양성을 증대 측면에서 여성들(현재는 남자들이 훨씬 많다)과 젊은이(주로 4~50대가 많다)의 유입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셋째는 ESC 회원들이 자주 ‘과학적 합리성’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합리성과 합리성이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일단 이들은 무언가를 주장하려면 근거—주로 과학기술적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것—와 데이터—주로 수치화되고 수학적으로 분석 가능한 것—를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는 데에 쉽게 합의한다. 이견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과학 지식과 그 지식 생산 과정이 내포하는 과학적 합리성이 이 사회의 민주적 가치 구현에 도움이 된다는 강한 믿음은 이들을 연구실 밖에서도 과학기술인으로 있게끔 하는 큰 힘이 되었다. 개별 연구자가 전공한 분야는 너무나 다양하고, 심지어 방법론적으로 충돌하는 경우도 있지만 과학적 합리성에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에 기반한 타자와의 다름에 대한 인정이 포함되어 있다. 다양한 접근과 사유를 허용함으로써 과학과 공학이 발전해왔다는 경험과 믿음이 사회 문제에 대한 입장에 반영되는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세세한 부분에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을지언정 단체 차원에서 시국선언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큰 논쟁 없이 입장이 결정되고, 이것이 과학적으로 합리적이며 동시에 민주적 가치를 증진하는 방향이라는 합의를 이루어낸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필자들의 단편적 경험과 감상이지만 많은 과학기술인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단체들이 유사한 경험과 고민을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구체적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떤 목소리를 낼지에 대한 합의는 다를 수 있으나 연구실 밖에서 과학기술인으로 서 있기 위한 고민이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다양한 노력을 통해 오래된 대상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과학기술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대상화시킨 주역인 과학기술이 그들의 탈피를 도울 수 있다는 믿음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ESC에 속한 과학기술자들은 어떻게 보면 훌륭한 민주시민이 되는 길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에 더해 과학과 공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언어와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과학기술자들의 (민주적) 책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마치 좋은 과학기술인이 되는 것, 다시 말하면 과학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여 실험/이론의 교차검증을 거친 이야기들을 주장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훌륭한 민주시민이 되는 길—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와 현실 데이터의 교차검증을 거친 정치행동—이라고 믿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과거 소수의 천재들과 상위 계급의 지적 전유물에 가까웠던 과학기술이 스스로의 발전에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과학자와 공학자라는, 원칙적으로는 시민이라면 모두 접근 가능한 새로운 직업을 발생시켰듯이,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과학기술 또한 돌고 돌아 스스로의 생산자를 재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거창한 일반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지엽적일지언정 지금까지 우리의 관찰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고, 당신의 경험과 생각에 한 꼭지로써 덧붙여지기를 바란다. 여기서 “이공계인들은 사회문제를 이렇게 바라본다”고 거칠게 정의한들 또 다른 대상화가 이루어질 뿐이다. 대상화를 대상화로 타파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논의는 이공계인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OX퀴즈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들의 영역에서 조금 더 집중하고 싶은 현실의 문제가 있고 약간 더 의사소통이 원활한 집단이 있을 뿐이다. ESC에 속한 과학기술인들은 실제 사회현상과 거리가 있어 뵈는 자신의 전문 연구분야와 과학의 대중화라는 단어를 쓸 때나 노벨상 시즌에만 언급되는 과학에 대한 한국적 맥락의 담론에서 지쳐서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생긴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더구나 필자가 직접 참여하고 있는 ESC라는 단체에 대해 현 시점에서 평가를 하는 것이 그다지 적합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ESC라는 단체가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여러모로 지금까지 있어왔던 한국 과학기술인들의 사회 소통 방식과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연구실 밖으로 나온 과학기술자들이, 연구실 내에서나 통용될 법한 다소 생경한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단어를 모토로 삼으며 민주주의에 기여하고 과학기술인들의 처지에,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에, 한국의 과학문화에, 더 나아가서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고 한다. 연구실 문 뒤켠에서, 랩 벤치 뒤켠에서, 자기 자신의 자리를 조용히 지키던 과학자, 공학자들이 이제는 세상에 나와 하나의 시민뿐 아니라 자신을 정의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정체성인 과학기술인으로 발화하려 하고 있다. 바야흐로 우리는 경제개발의 도구로만 여겨져 왔던 한국의 과학, 공학, 그리고 과학기술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의 내리는 그 전환점에 서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두고볼일이다.


ESC  |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

caaaca86ceeca2006084202d198cbe2eESC는 공학자, 과학자를 비롯해 관련 언론인, 출판인, 예술인, 과학사, 과학철학 및 과학기술학자 등 광의적 의미의 과학기술인들이 모여 설립한 사단법인이다. 기존의 과학기술자 단체들이 과학기술계 현장의 의견을 시민사회와 정부에 얼마나 제대로 표출 및 전달하고 있으며 그 밖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모여 출범했다. 정관의 표현을 빌리면 “과학적 사고와 합리성이 한국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 및 문화 활동을 전개하고,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한국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1) 과학기술정책, 2) 청년과학기술인, 3) 과학문화, 4) 크라우드 펀딩, 5) 해외 과학 기술인 위원회를 통해 각 주제에 맞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사회 현안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내는 창구이자 과학기술계의 구조적 문제와 한계를 파악하고 개선하기 위한 연대의 장을 지향한다.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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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J. 보울러, 이완 리스 모러스. (2008). 현대과학의 풍경 1, 2. 궁리.

우리가 아는 과학은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과학이 지식적으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와 더불어 어떤 사회 문제와 맞닥뜨려왔으며 과학을 하는 방법, 과학의 사회적 지위와 국가와의 관계, 과학자의 정체성이 어떤 변화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책. 한국 과학(정책)의 발전사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 생각하며 읽어보면 흥미롭다.

ㅎㄹㄹㄹ

문만용. (2010). 한국의 현대적 연구체제의 형성: KIST의 설립과 변천, 1960-1980. 선인.

연구중심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로 대표되는 한국 연구체제의 뿌리는 어디일까. 현대 한국의 공공 및 민간 과학연구 체제뿐만 아니라 인문사회 연구체제의 구축에도 큰 영향을 준 KIST의 설립 배경과 구조, 그리고 변화 과정을 추적한다. 우리 사회가 가진 과학자와 공학자, 혹은 넓은 의미의 연구자 집단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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