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벨은 울리나

김동진 (KAIST 기계공학과)

djkim1994@kaist.ac.kr


 

들어가며 – 장애와 기술의 불편한 만남

2013년 7월 로스앤젤레스 도심의 고급 호텔 앞에 눈에 띄게 조용한 시위대가 모였다.[1] 경찰은 말이 없는 시위대를 별다른 행동 없이 통제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수어 통역사를 대동하여 그들과 소통했다. 참가자 대부분이 농아인 이 시위대는 ‘농아와 난청을 위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협회[2]’가 주최하는 ‘청취와 발화 언어 심포지엄’에 항의하고자 개최지 호텔 앞에 모였는데, 사실 행사의 후원자 대다수는 청력 장애를 치료하고자 개발된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하는 기업이었다.

‘기술은 장애를 넘어선다’는 명제에 당신은 동의하는가? 고전적인 과학기술상에서 장애는 극복 대상이자 정복 가능한 자연의 일종이었다. 물론 이러한 시선은 고전적이라기엔 여전히 지배적이며, 현대적인 외양까지 갖췄는데, 자신의 장애를 스스로 개발한 의족으로 극복했다는 MIT 미디어랩 공학자의 서사가 대표적일 것이다.[3] 하지만, L.A.의 시위대처럼 적지 않은 장애인이 그것에 반대한다. 특히, 미국의 농아 공동체는 청각기술이 태동하던 19세기 말부터 관련 기술과 강하게 대립했는데, 기술-복지의 표준적인 관계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런 사실은 상당히 어색하게 들릴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전화의 상용화로 유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청각 기술의 여명기를 주도하며 현대 전자공학의 판을 짰고, 농아 교육에 헌신하며[4] 농아 공동체에 큰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19세기 청각 기술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어머니는 농아였다.[5] 벨의 집안은 삼대째[6] 농아 교육을 연구했는데, 벨의 아버지 알렉산더 멜빌 벨은 음향학과 음성학을 융합해 독창적인 농아 교육을 시도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 벨은 어느 날 어린 벨에게 인형 발성 오토마톤(자동기계) 조립 설명서를 쥐여줬다고 한다. 시행착오 끝에 만든 인형이 우스꽝스럽지만 명료하게 ‘마마’를 외치는 걸 보았을 때,[7] 아들 벨은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벨은 아버지의 유산을 기술로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치게 된다.

벨 집안에게 19세기는 기회의 시간이었다. 당대 독일과 영국에서 음향과 청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8] 헤르만 폰 헬름홀츠가 종합하는 동시대 음향학 이론은 청각이 다른 감각에 구별되는 독자적인 감각이며, 그 본질은 외부 음원이 아니라, 진동에 반응하는 생리현상이란 것을 확인했다.[9] 과학적 측정법이 청각 연구에 이식되며 소리 역시 측정 가능한 물리량으로 바뀌었고, 청력 기관에 대한 생리학적 연구 역시 해부와 관련된 제도 개선에 힘입어[10] 활발해졌다. 그동안 소리는 음과 언어로만 인식됐지만, 이젠 순수한 진동과 자극으로 환원되고 있었다. 요컨대 관념의 세계에 속해있던 청력이 살로몬의 집[11]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소리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가는 순간, 벨 집안의 농아 교육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알렉산더 멜빌 벨은 가시적 발화법[12]이라는 기호체계를 개발했다. 여기서 문자는 구강 구조에 근거하여 발화를 시각적으로 모방했다. 있는 그대로 따라 읽으면, 있는 그대로 발음할 수 있는 시각 기호인 것이다. 아버지 벨은 어딘가 훈민정음과 지향점이 비슷한[13] 이 체계를 통해 농아가 무리 없이 읽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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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가시적 발화법[14]

가시적 발화법은 인식의 과도기를 보여준다. 개념적인 음이 기능과 측정의 음향으로 바뀌면서, 소리를 붙잡으려는 시도 역시 변화했다. 이전 세기의 청각 기술은 발성 기관을 본뜨거나 원음을 그대로 보존하려고 시도했다. 아버지 벨의 체계는 그런 의미에서 과거와 동시대 사이에 양발을 걸친듯이 보인다. 자연을 그대로 본뜨고 코드화하려는 현대적인 욕망이 느껴지지만, 기본적으론 19세기엔 과학 장난감 정도의 취급을 받게 된 발성 오토마톤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발화법은 후천적인 농아에게는 제한적인 효과를 거두었지만, 농아로 태어나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1874년 개발한 귀 포노토그래프(음향 기록장치)는 소리에 대한 과도기적 이해를 뛰어넘는 시도였다. 시체의 귀를 잘라 붙여 고막과 기록용 유리판을 연결한 이 물건에서는, 고막에 이어진 작은 바늘이 유리판에 소리의 흔적을 남겼다. 이 물건은 소리를 ‘자연 그대로’ 기록하려는 벨의 욕망을, 어쩌면 당대 과학의 것일지도 모르는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연의 고막은, 자연을 닮은 문자를 그려내고, 체계의 완결성을 자연스레 불어넣을 것이었다. 듣지 못하는 농아는 유리판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보게 된다. 발성에 맞추어 변하는 흔적을 보면서 농아는 완벽하게 교육받고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벨은 확신했다.[15]

 

[그림 2] 귀 포노토그래프 [16]

기술과 동화

하지만, 무엇에 대한 완벽이고, 누구를 위한 완벽인가? 귀 포노토그래프는 대신 듣는 기계[17]다. 농아를 대신해서 듣는 이 기계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농아에게 소리를 시각으로 경험시켜, 청취가 필수적인 발음 교육을 완성하도록 태어났다. 즉, 벨의 기계는 몇 가지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인간이라면 꼭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벨은 여기에 동의했고, 당대인에게 자연스러웠을 이 생각에서 우리는 훗날 오디즘(audism)[18]이라 명명된 청력 우월주의를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이 기계는 인간이라면 꼭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은밀하게 드러낸다. 더욱 광범위한 사람이 동의했을 이런 생각에는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오는 배타적인 인간성이 숨어있다.

당대의 청력인에게 말할 수 없는 농아는 인간보다 동물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으로 동화되어야 했다. 벨은 농아의 친구를 자처했으며, 그들을 위해 평생 자신의 몸과 마음, 자본을 바쳤다. 게다가 벨은 훗날 아버지처럼 농아와 결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농아는 열등한 존재였고, 말하기 교육으로 인간의 조건을 주입하여 주류 인간 문화에 편입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벨이 젊은 시절 가르친 헬렌 켈러는 훗날 그에 대해 ‘비인간적 침묵’을 뚫기 위해 헌신한 사람[19]이라 회고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벨은 우생학과 긴밀하게 교류했고, 농아 사이의 결혼을 막아 ‘농아 생산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20]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율배반으로 보이는 두 모습은 사실 하나다. 벨은 농아인이라는 또 다른 ‘인종’이 생기는 걸 반대했던 것이다.

청각 기술 역시 벨의 뜻을 충실하게 따랐다. 태동하는 당대의 기술은 농아인 공동체에 대해 일관된 동화의 태도를 드러내곤 했다.[21] 실제로 기술을 이용해 농아를 동화하고자 했던 당대의 농아 교육자들은 농아인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농아의 고유한 문화적 숨결을 제거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난해하고 효과 없는 발성 교육 대신 실용적인 수어 교육으로 농아 어린이 사이의 소통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22]에 대해서 원시주의를 퍼트린다며 반대했고, 조직적으로 거부하기도 했다.[23] 실제로 이전까지 농아 교육의 주류였던 수어는, 청각 기술과 – 왜곡된 진화론이 – 널리 퍼지는 1860년대 이후 인기를 잃는다. 이런 경향은 1880년 밀라노에서 열린 제2회 국제 농아 교육 회의에서 종합되어 발성 교육이 수어보다 명백하게 우월하다고 선언되기에 이르며,[24] 이후 많은 교실에서 수어 사용이 금지되기도 한다.

기술이 농아를 정말로 동화시켰을까?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당대의 청각 기술은 장애라는 정체성을 건드리지 못했다. 귀 포노토그래프와 벨의 교육은 청각을 위임하는 교육 대상, 즉 농아에게 의존하는 기술이다. 농아를 지우려 하지만, 농아가 있어야 살아남는 기술인 것이다. 기술은 농아를 그들의 인간으로 동화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농아를 대상화하는 ‘인형의 집’이 되었다. 동화는 실패했고, 동화주의는 수어 교육과 발성 교육 사이의 적대적인 논쟁[25]만 남긴 채 그림자 너머로 물러난다. 먼 미래에 전자소자를 이용한 달팽이관 회로 이식이 가능해지고 나서야, 기술은 농아 공동체에 새로운 동화의 칼날을 들이대며 그들을 위협할 것이었다.

 

마치며 – 산업과 배제

하지만 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걸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적어도 벨은 그랬던 것 같다. 청각 산업이 꿈틀대고 있었다. 벨은 귀 포노토그래프를 개발한 지 2년 만에 전화를 상용화한다. 백 년이 넘게 이어질 도용 논쟁[26]에서 알 수 있듯이 논란이 많았지만, 벨은 계속 전진했다. 전화의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농아 교육을 위한 볼타 연구소, 혹은 벨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소를 바탕으로 초기 축음기 경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더불어 설립한 전화전신 회사는 훗날 AT&T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회사의 부속 연구소는 역시 벨 연구소[27]란 이름으로 20세기 실리콘 산업의 전위가 될 것이었다.

청각 산업은 농아를 배제했다. 의미심장하게도, 벨은 실험용 레코드를 돈을 세는 자신의 목소리로 채워놓기도 했다.[28] 청각 기술에서 돈 냄새를 맡은 건 벨 뿐만이 아니었다. 무선통신과 디스크 축음기가 등장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아, 음반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29] 뉴욕에선 1910년 이미 공영 오페라 중계가 진행[30]되었다. 청각 산업이 농아 공동체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펄프 픽션과 활자 신문이 지구를 연결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다. 수백만이 방송 오케스트라와 야구장의 홈런을 듣기 위해 거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청각 기술의 침공을 고고하게 버티던 활동사진, 즉 영화조차 1920년대가 지나기 전에 소비자의 요구[31]에 굴복했고, 이 모든 변화에서 농아는 배제되었다.

말년의 벨은 훗날 분자유전학 연구로 유명해질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 산하의 우생학 사무소 자문위원장을 맡고, 미국 자연사 박물관이 주관하는 국제 우생학 학회의 명예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동화주의와 관련된 소일거리를 찾은 셈이다. 하지만 기술은 이미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버렸다. 기술은 농아 공동체를 철저하게 배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벨의 오래된 헌신은 이미 텅 빈 과녁을 향하고 있었다.

 


읽을거리

The Atlantic (2013. 08. 09), 「Understanding Deafness: Not Everyone Wants to Be ‘Fixed’」

정체성으로서의 청각장애를 소개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사.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협회를 중심으로 농아 교육의 쟁점을 꼼꼼하게 소개한다. 더불어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의 <가만한 당신> 부고 연재 중 「”춤추는 나를 보고 감동 말라” 장애 편견에 저항한 작은 거인」 (2015. 01. 03.) 또한 비슷한 소재를 장애인의 관점에서 더욱 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Screen Shot 2017-09-29 at 7.03.37 PM.png조지 버나드 쇼, 김소임 역, <피그말리온>, 열린책들, 2011. 

고전이 가지는 풍부한 사회문화적 맥락, 특히 <마이 페어 레이디>로 대표되는 계급과 젠더 권력 문제를 떼어놓고 본다면, 피그말리온은 벨의 농아 교육이 제기하는 동화와 정체성의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상징물이다. 실제로 쇼는 아버지 벨과 만나며 작품을 다듬었고, 그를 주인공 히긴스 교수의 모델로 사용했다고 작품의 서문에서 언급하기도 한다.

Screen Shot 2017-09-29 at 7.04.19 PM.png

조너선 스턴, 윤원화 역, <청취의 과거>, 현실 문화, 2010.

청각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는 주로 관념적이다. 저자는 이런 이해에 반발하며 청각에 대한 이해와, 청취 행위, 도구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는지 분석하고, 나아가 이를 근대적 삶의 태동의 맥락에 연결해 우리가 청각에 대해 놓치고 있던 것들을 한데 끌어모은다.

 


[1] The Atlantic(2013. 08. 09), 「Understanding Deafness: Not Everyone Wants to Be ‘Fixed’」.

[2] 「agbell」, http://www.agbell.org/

[3] 「The new bionics that let us run, climb and dance」, https://www.ted.com/talks/hugh_herr_the_new_bionics_that_let_us_run_climb_and_dance

[4] 앞서 언급한 논쟁적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협회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5]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생애와 관련해서는 http://www.biographi.ca/en/bio/bell_alexander_graham_15E.html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Graham_Bell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exander-Graham-Bell 등을 참고하였다.

[6]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조부 알렉산더 벨 역시 농아 교육에 종사하는 임상의였다.

[7] Bell, A. G. (1922), “Prehistoric Telephone Days”,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Vol. 41, p. 236 이는 다음에서 재인용 한 것이다: Jonathan, S. (2002), The Audible Past: Cultural Origins of the Sound Reproduc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pp. 75-76.

[8] 이와 관련해서 다음을 참조하라. 구자현 (2013). 『음악과 과학의 만남』, 경성대학교출판부. 구자현 (2012), 『공생적 조화 – 19세기 영국의 음악 과학』, 서강대학교출판부.

[9] Sterne, J. (2003), The audible past: Cultural origins of sound reproduction, Duke University Press, pp. 62-65.

[10] Ibid, pp. 68-70.

[11] 프란시스 베이컨이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상상한 과학기술 연구기관으로, 경험 지식을 축적하고 그 인과관계를 파악해 인류의 실용에 기여하는 장치를 만드는 기관으로 묘사되어 있다.

[12] 두산백과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항목에서는 ‘시화법’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된다.

[13] 최경봉, 시정곤, 박영준 (2008),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책과 함께, pp. 88-98.

[14] 「United States Library of Congress」, https://memory.loc.gov/cgi-bin/ampage?collId=magbell&fileName=196/19600204/bellpage.db&RecNum=0

[15] Sterne, J. (2003), The audible past: Cultural origins of sound reproduction, Duke University Press, pp.36-39.

[16] The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http://americanhistory.si.edu/documentsgallery/exhibitions/hear-my-voice/3replica.jpg

[17] Snyder, C. (1974), “Clarance John Blake and Alexander Graham Bell Ontology and the Telephone”, Annals of Ontology, Rhinology, and Laryngology, Vol. 83(4), p. 30.

[18] 이와 관련해서 다음을 참조하라. Baumann, H. D. (2004). “Audism: Exploring the metaphysics of opperassion”, Journal of Deaf Studies and Deaf Education, Vol. 9(2).

[19]  Petrie, A. R. (1975), Alexander Graham Bell, Ontario: Fitzhenry & Whiteside, p. 17. 이는 다음에서 재인용 한 것이다. 「Alexander Graham Bell」,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Graham_Bell

[20] Bell, A. G. (1883), “Upon the formation of a deaf variety of the human race,” Mem. Nat. Acad. Sci., Vol. 2, pp. 179-262.

[21]  Sterne, J. (2003), The audible past: Cultural origins of sound reproduction, Duke University Press, p. 40.

[22]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 맞서 수어 교육을 주장한 사람은 에드윈 마이너 갤러뎃이다. 다음을 참조. 「Gallaudet University」, https://giving.gallaudet.edu/HOF/pastinductees/edward-miner-gallaudet

[23]   Sterne, J. (2003), The audible past: Cultural origins of sound reproduction, Duke University Press, p.41.

[24] 「Deaf History – Milan 1880」, https://www.verywell.com/g00/deaf-history-milan-1880-1046547

[25] 현재도 농아 교육은 수어 교육과 발성 교육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갤러댓 대학교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협회는 양쪽 세력을 대변한다.

[26]  2002년 미국 의회는 전화의 특허를 도용당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더 메우치를 전화 발명자로 인정한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을 참조하라. 「Invention of the Telephone」, https://en.wikipedia.org/wiki/Invention_of_the_telephone

[27] 두 개의 벨 연구소는 다른 연구소이다.

[28] 「A direct recording of Alexander Graham Bell’s voice – Filtered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ZALUgxsnCOk

[29] 20세기 전반의 음악 산업 성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헤르베르트 하프너, 홍은정 번역 (2016), 『음반의 역사 – 실린더 레코드부터 디지털 음원까지』, 경당. [Herbert Haffner (2011), Die Geschichte der Schallplatte, Berlin: Parthas.], 노먼 레브레히트, 장호연 번역 (2013). 『클래식 음반세계의 끝』. 마티. [Lebrecht, N. (2007), The Life and Death of Classical Music: Featuring the 100 Best and 20 Worst Recordings Ever Made, New York: Anchor].

[30]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1910년 진행된 무선 생중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Lee de Forest」,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Lee-de-Forest

[31] 최초의 유성영화는 1927년 개봉한 <재즈 싱어>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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