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Model)과의 대화

신유정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ssinyou@gmail.com


*본 글은 2017년 봄학기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 개설된 <냉전과 과학기술> 수업 시간 중에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강의를 해 주신 최형섭 교수님 (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전임교수) 및 같이 토론한 수강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며, <그림 1>은 수업 시간 중 김성은 학생이 소개해 준 것임을 밝힙니다.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다 보면 많은 ‘모델’들을 만날 수 있다. ‘선형 모델,’ ‘혁신 모델,’ ‘한국형 모델,’ ‘추격 성장모델’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런 ‘모델’들은 복잡한 현상을 몇 가지 특징들을 바탕으로 단순화 시켜 주기에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상당수의 연구자들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장에서는 이 모델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책이나 활동들을 고안해 내고 있다. 형형색색의 다이어그램과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모델들은 마치 자동차의 네비게이션과 같이 실제 세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며, 운전자들(여기서는 정책입안자들 또는 정책집행자들)로 하여금 안내에 따라 운전을 하도록 한다. 하지만 ‘모델’을 따르기 전에 잠시 멈추고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자(옛말에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 것이라 했다). 과연 모델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보고 있는 모델들은 무엇을 대변하고 있는가, 또는 무엇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 글에서 나는 새로운 모델의 개발 및 시행만큼 중요한 것이 ‘모델과의 대화’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모델의 사전적 정의는 “완성된 작품의 대표적인 보기,” “본보기가 되는 대상이나 모범”이다. 즉 모델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또는 가치 있는 요소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델이란 기억의 집합체인 동시에 망각의 결집체이다. 미국 역사학자 닉 컬라터 (Nick Cullather)는 자신의 저서 『배고픈 세계』에서 모델이란 “일종의 선택적 망각”의 결과물임을 강조한 바 있다.[1] 닉 컬라터는 1960년대 전후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녹색 혁명의 모습이 얼마나 다르게 나타났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이들을 하나의 ‘개발모델’로 논하는 것이 얼마나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우화(capsule narrative)”인지 보여주었다.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맥락에서 일어난 실행들과 담론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망각 위에 ‘개발모델’은 강력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2] 사실 모델 개발의 궁극적인 목적이 현상의 단순화라는 것을 주지할 때, 모델에 많은 망각의 조각이 자리하고 있을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곤 한다.

모델이 기억과 망각 그 사이 중간쯤 위치한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의 모델을 만들 때 어떤 것을 기억할 것이고, 어떤 것을 기억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선택을 누가 어떤 이유로 하는지가 될 것이다. 닉 컬라터의 경우 1960년대 만들어진 ‘개발모델’이 개발의 당사국뿐만 아니라 당대의 미국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소련과의 체제 경쟁이 한창이던 당시 미국에게 정교하게 정리된 ‘개발모델’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미국 이념의 가치를 설득하기에 좋은 도구였다. ‘개발모델’은 미국의 비전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자국민들에게 전시하고자 적극적인 노력을 들여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으며, 이렇게 생성된 모델은 그 과정에서 특정 이유로 선택된 기억과 망각의 존재는 잊혀진 채 여러 나라로 확산되고 활용되었다. [그림 1]은 1966년 개발모델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미국 경제학자 윌트 휘트먼 로스토우가 한국에 방문하였을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만평이다.

Picture1.png

[그림 1] “ “로스토우”’ 씨 살려주시오!: 확실한 도약단계 속의 확실한 빈사지경” (1966년 11월 3일, 동아일보 1면)

 

모델의 힘은 재생산에 있다. 비록 그것이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우화”라고 할 지라도, 단순화된 현상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여러 사람에 의해 회자되며 이 과정에서 그 실체는 강화되게 된다. 처음에는 우화에 불과한 모델이 실제 행위자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태를 규정하는 하나의 틀로 작용하면서, 그 모델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우화인지 분간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강화 기제를 지닌 모델의 특성 때문에 한 번 정립된 모델은 그 생성 배경 및 원인에 대해 점점 인지하기 어렵게 되며, 때문에 특정 모델의 이유 있는 기억과 망각들을 주지하기 위해서는 ‘모델과의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한 모델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잊고 있는지, 그 결과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묻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물론 하나의 모델에 모든 목소리와 이야기들을 다 담을 수는 없다. 그것은 모델의 일차적 목표와도 위배되는 요구일 것이다. 하지만 망각된 기억과 목소리를 인지하고 모델을 논하는 것과, 그러한 망각들에 무지한 채로 모델을 논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델과의 대화, 왜 필요한가?

현재 한국에서는 카이스트의 성공모델을 본떠 아프리카 케냐에 제 2의 카이스트를 설립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3] 또한 베트남 하노이에 한국과학기술원(KIST)을 모델로 한 베트남과학기술연구소(V-KIST) 건설도 진행되고 있다.[4] 개발도상국과의 ODA 사업에서 소위 한국의 과학기술발전 모델이란 것은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이다. 이 모델들에 담긴 카이스트와 한국과학기술원, 한국의 과학기술발전은 어떤 모습들일까? 이 모델들에 망각된 기억과 목소리들은 없을까? 우리는 이 모델들을 다른 시공간에 확산시키기 전에 얼마나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카이스트를 모델로 하여 새로운 기관을 설립한다고 하면, 그 기관이 모델로 삼는 카이스트는 1980년대의 카이스트인가, 1990년대의 카이스트인가, 오늘날의 카이스트인가? 더 나아가 그 모델이 담고 있는 카이스트의 기억은 그 시대의 학생의 기억인가? 교수의 기억인가? 총장의 기억인가? 혹은 카이스트 외부 사람들의 기억인가?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모습의 카이스트들을 인지하고 논하고 있는가? 오늘날을 생각해보면 카이스트라는 한 공간에는 저마다 다른 기억을 안고 있는 다양한 사람과 사물들이 있다. 그들의 상이한 경험들이 얽히고 설켜 오늘의 카이스트를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과거의 카이스트라는 공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이스트를 하나의 모델로 개발한다고 했을 때, 어떤 것을 기억하고 망각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수많은 모델들이 만들어 질 수 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카이스트를 둘러싼 많은 모델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강력한 대통령의 의지로 설립된 불이 꺼지지 않았던 연구실의 모습만이 카이스트의 모델로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다. 이 외에 다른 카이스트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상당부분 무지하다. 왜 우리는 무지를 간직한 채 같은 기억만을 반복해서 외치고 있을까? 하나는 그 기억을 지속적으로 외쳐야 할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망각을 인지하지 않기로 했을 수 있다. 양자 중 어느 쪽이 되었든 특정 모델을 논할 때 그 모델이 내포하고 있는 전제 조건과 가정 그리고 망각의 존재에 대해 선험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무지와 망각이 만날 때 모델은 자신의 맥락성을 잃어버린 허울로 남을 위험이 있다. 예로 든 카이스트 모델을 찾는 이 중 어떤 사람은 그 속의 학생의 모습을, 그 속의 연구실 문화를, 그 속의 연구자들의 생활을 궁금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카이스트 모델을 외치면서 이러한 궁금증에 답해줄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아직 없다. 특정 모델을 예로 들었지만 한국에 산재하고 있는 여러 모델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모델에 대해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와 단상들만이 반복된다면 이는 그 모델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많은 대화를 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정 모델의 생성 배경 및 기능, 그 모델이 담고 있는 것과 담고 있지 못하는 것 등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하나의 현상을 다각도에서 살펴 볼 만한 시간과 심리적 여유가 필요하며, 이것은 국내 정책연구의 문화를 개선해야 함을 암시한다. 다른 종류의 연구에 비해 국내에서 ‘정책연구’는 매우 단시간에 속전속결로 행해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시급한 현안에 대해서는 이러한 정책연구 문화가 현안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이것이 정책연구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여유 없는 정책연구 문화에 여유 있는 정책연구가 수행될 리 만무하며, 정책연구에 대한 괄시 속에 괄목할 만한 정책이 도출되기는 힘들다. 모델에는 성공사례 모델뿐만 아니라 실패사례 모델도 존재할 수 있으며, 하나의 현상에는 하나 이상의 다양한 모델이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모델일 지라도 서로 다른 시공간에 상이한 모습으로 모델들이 진화하고 있을 수 있다. 모델을 통해 모델화 되지 않은 것을 이야기 할 수도, 모델화 되지 못하는 것들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모델과의 대화가 얼마나 다양해 질 수 있는지,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델과의 대화, 어떻게 할 것인가?

모델을 ‘현상의 이상적 대변자’보다는 ‘현상에 대한 대화의 매개체’로 이해할 때, 우리는 모델과의 대화에 한 걸음 나설 수 있다. 모델이 과연 현실을 얼마만큼 대변하는가? 이 질문은 과학철학자들의 오랜 질문 중 하나였다. 흔히 정책의 현장에서 사용되는 사회현상 대변 모델들을 차치하더라도, 과학 연구에서 사용되는 모델들이 정말 자연현상을 잘 대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모델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과학적 연구 방법론’을 차용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과학 연구에서 모델을 둘러싼 논란은 주목할 만하다. ‘뒤엠-콰인 명제’로 유명한 19세기 프랑스 자연철학자 피에르 뒤엠(Pierre Duhem)은 당시 영국 학자들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모델’이란 것에 대해, ‘모델’이란 해석적 다의성이 커서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 의미가 전혀 없으며, 오직 수식적으로 표현된 이론만이 현상을 질서 정연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뒤엠은 영국인들은 몰라도 지성이 깊은 프랑스 학자들은 모델 없이 추상적 수학만으로도 충분히 자연 현상을 이해 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으며, 모델의 가치를 매우 낮게 보았다.[5] 모델의 등장 초기부터, 자연현상이든 사회현상이든 모델의 현상 대변 능력에 대해서 모든 학자들이 동의한 바는 아니었다. 이 보다는 모델의 ‘이론과 현상의 매개 능력’이 많은 학자들의 이목을 끌었으며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되게 되었다.

 

“모델을 ‘현상의 이상적 대변자’보다는 ‘현상에 대한 대화의 매개체’로 이해할 때, 우리는 모델과의 대화에 한 걸음 나설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모델이란 대화의 매개체로 가변성과 유동성을 지닐 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이상적인 또는 절대적인 대변자로서 모델을 다루기 보다는, 계속해서 논의하고 해체해야 할 대상으로 모델을 여기게 된다면 좀 더 풍부한 논의가 가능해 질 것이다. 성급하게 모델을 개발하고 현장에 투입하기 전에, 모델과 다양한 대화를 시도하는 작업들이 선행 되었으면 한다. 이는 기존에 정립된 모델의 실체를 더욱 분명히 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논의들을 펼쳐나갈 밑바탕이 될 것이다. 현상의 단순화라는 명제 속에 모델에는 특정 기억과 망각이 혼재하고 있음을 주지하고, 망각의 인지 속에 모델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강조 해 본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를 가능하게 할 연구 풍토가 마련되어야 함을, 이러한 연구 풍토 위에 좀 더 풍부한 정책들이 탄생할 수 있을 것임을 짚어본다. 더 이상 맥락없는 여러 모델들을 만들고 이전하는데 집착하기 보다는, 모델 그 자체에 말을 걸고 연구하는 문화가 확산되기를 빌어본다.

 


읽을거리

임재윤, 최형섭 (2017). “최형섭과 ‘한국형 발전 모델’의 기원.” 역사비평 통권 제 118호, 169-193. 

저자 중 한 명인 ‘최형섭’과 논문의 주인공인 ‘최형섭’은 다른 인물이다. 전자의 최형섭은 본 글의 영감을 준 수업의 담당 교수님이고, 후자의 최형섭은 한국의 과학기술처 2대 장관이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IST)의 초대 소장으로 ‘한국 과학기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독자분들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다. ‘한강의 기적’이란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용어이다.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한국형 발전 모델’은 한국의 자랑거리이자, 개발도상국에게 널리 전파하고 있는 교육거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형 발전 모델’에도 부모와 탄생 배경이 있다. 이 논문은 ‘한국형 발전 모델’이 특정 국내외 정세 속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있다. ‘모델과의 대화’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화를 하면 무엇이 달라질지 고민한다면, 이 논문이 좋은 출발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Cullather, N. (2010). The Hungry World. Harvard University Press.

Screen Shot 2017-09-29 at 7.27.13 PM.png본문에 소개 된 책이다. 역사학자 닉 쿨라터가 ‘녹색 혁명’이라는 모델이 실제로 다양한 나라에서 어떻게 작동하였는지 살펴본다. 꽤 두꺼운데 그만큼 ‘녹색 혁명’이라는 모델이 주입된 여러 나라들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녹색 혁명’ 모델을 주장하고 지지했던 사람들은 누구인지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밝히고 있다.

압권은 이 모델이 오늘날까지도 특정 형태로 살아있음을 이야기하는 지점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모델이란 계속해서 현실을 대변하기도 동시에 구성하기도 하면서 진화함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한 모델이란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있는 것임을, 누군가 계속해서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모델 속에 잊혀진 망각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Models in Scienc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과학 철학에서 ‘모델’은 중요하게 다루어져 온 주제 중 하나이다. ‘모델’은 얼마나 현상을 대변하는가? 과학 지식의 생성 과정에서 ‘모델’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모델’과 ‘이론’은 어떻게 다른가? ‘모델’과 ‘실험’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여러 영역에서 사용되는 ‘모델’이란 개념이 본디 ‘과학적’인 접근법을 차용하고자 함에 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먼저 과학 내에서 ‘모델’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해되고 활용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과학 철학 내에 ‘모델’에 대한 논문과 책은 많지만,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 기존의 논의가 잘 정리되어 있어 링크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참고 문헌도 잘 정리가 되어 있어 관심 있는 독자들은 참고 문헌을 따라 더 깊은 논의를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모델’에 대해 공부를 하다가 과학 철학의 매력에 빠진다면 (사실) 그것이야 말로 내가 이루고자 한 바이다.

모델과의 대화에 관심있는 분은 언제든 환영이다. 나와 먼저 대화하자☺


[1] 녹색 혁명이란 20세기 후반 새로운 농업기술의 도입을 통해 식량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을 일컫는다.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품종 개량 등을 통해 개발 도상국에 녹색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2] Cullather, N. (2010). The hungry world. Harvard University Press.

[3] 정은모, “케냐 요청…카이스트 모델 아프리카 진출 추진한다,” 중부매일, 2016년 6월 2일, 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38395.

[4] KIST STORY/MIRACLE KIST, “국가대표 과학기술 모델 ‘KIST’ 베트남 간다,” KISTory, 2014년 1월 20일, “http://kiststory.tistory.com/1194.

[5] Magnani, L., Nersessian, N., & Thagard, P. (Eds.). (2012). Model-based reasoning in scientific discovery.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Morgan, M. S., & Morrison, M. (Eds.). (1999). Models as mediators: Perspectives on natural and social science (Vol. 52).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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