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영재”의 기원 –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창욱 (동아사이언스)

doubur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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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과학한국 앞날은 여러분 손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경기과학고등학교를 시찰하고 있다. 한국 첫번째 과학영재교육 기관으로서, 경기과학고등학교는 국내외의 많은 인사들이 시찰한 장소였다. 좌측의 인물은 초대 경기과학고등학교 교장 홍창기.[1]

 

잘 모르겠다, 어쩌다 내가 “과학영재”가 된 건지. 시작은 아마도 중학생 시절 다녔던 ‘과학영재센터’였을 것이다. 과학영재센터는 각지의 대학교에서 진행되는 특별 과학 수업이었고, 이후로 나는 경시대회, 과학고등학교, 올림피아드, 카이스트를 거치며 과학영재라는 표현을 수없이 접했다. 실로 그 단어는 과학입국의 기틀을 닦는 대학교의 입학 소개부터, 아이들의 잠재력을 믿(으려 하)는 부모들이 받는 학원 전단에서, 그런 부모들을 ‘교육열’이라는 명목으로 비판하는 뉴스 보도에 이르기까지, 사회 이곳저곳에서 잊을 만하면 나타났다.

과학영재라니. 나와 친구들이 그렇게 불리던,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 친구 중 반절이 의사가 되었고, 나머지 반절은 대기업에 취직하였으며, 남은 한 줌 정도가 세계 여기저기서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다. 저 어느 향방에도 속하지 않은 채 과학사를 공부하게 된 나는 우리들 삶의 궤적을 바라보며 ‘과학영재’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품는다. 왜 우리는 ‘과학영재’로 불렸을까? 어쩌다 그것이 우리들 다채로운 삶의 갈림길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은 것일까? 여기에는 어떤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일까?

아마 여러분 중에서도 과학영재로 불렸던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한국 과학영재의 제도적 탄생 과정을 통해, 과학영재라는 정체성의 기원을 알아보려 한다. 지금까지 과학영재는 ‘과학고등학교’나 ‘한국과학기술원’같은 과학영재교육기관에서 육성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그 기관들은 과연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에서 설립된 것인가? 이에 대한 분석은 실제로 과학영재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되었고 왜 그 시기에 만들어졌어야만 했는지, 어떻게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물론 한국의 과학영재교육을 다룬 기존의 서술들이 이 부분을 놓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교육부가 발간한 <교육 50년사>와 같은 책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과학영재교육의 연표라기보다는 그 뒤의 모습들, 다양한 부처 간의 상호작용과 개인 단위로 분할되는 행위자들이다. 나는 그 부분을 좀 더 파고들려 한다. 예를 들어,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과학영재교육이 한국에 도입된 시기에 관한 것이다. 과학영재교육이라는 아이디어는 언제 한국으로 도입되었는가? <교육 50년사>는 그 시기를 과학교육협의회에서 과학고등학교 설치가 처음으로 논의된 1969년으로 잡고 있다. 실제로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작은 1958년, 미국에서 연수 중이었던 한 교육학자의 머릿속이었다.

 

(1) 어디에서 왔는가?

1958년 12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정연태(鄭然泰) 교수는 미국 연수 도중 처음으로 과학영재교육의 현장을 접했다. 그는 뉴욕의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와 브라운 대학,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과학에 재능을 보인 어린 학생들이 대학교 교재로 공부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특히 22살의 어린 학생이 박사 과정을 끝마치고 훨씬 나이가 많은 학생들과 경쟁하는 모습은 그에게 큰 인상을 남겼으며, “귀국하여서도 나의 뇌리에는 과학영재아들의 교육 문제가 항시 떠나지 않았다.”[2] 한국으로 돌아온 정연태 교수는 미국의 새로운 과학교육 과정을 도입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과학영재교육은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이 과학영재교육이라는 아이디어의 도입에는 두 가지 국제 정치의 맥락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소련과 미국이라는 세계적 헤게모니의 충돌로 빚어진 과학 경쟁이었다. 미국에서 영재교육은 20세기 전반 오랫동안 찬밥 신세였으나, 2차 대전 이후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 과학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점차 주목받았다. 전후 성립된 냉전 체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영재교육은 고급 과학인력을 육성할 방법으로 각광받은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1957년, 소련이 미국을 우주 경쟁에서 앞지른 상징적인 사건인 스푸트니크호 발사 때 최고치에 다다랐다. “국가 비상사태”로 불린 스푸트니크 쇼크(Sputnik Shock)의 여파로 곳곳에서 과학영재를 찾고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3] 정연태는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과학영재교육의 열풍이 불던 무렵의 미국에 도착한 것이다.

두 번째로, 미국 내 영재교육 열풍이 한국의 교육학자에게 닿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미국의 영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한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국가 중 하나였다. 정연태의 미국 연수는 미국의 교육 원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피바디프로젝트로 알려진 이 원조 계획은 미국의 ICA(국제협조처)와 피바디 사범대학 사이의 계약 체결로 시작되었으며, 6년의 기간 동안 한국에서는 총 82명의 교육자가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4] 과학영재교육은 미국과 소련의 체제 경쟁, 그리고 미국과 한국의 동맹 관계에서 정연태를 통하여 한국에 도입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영재교육은 한국 내에서 어떻게 추진되었을까? 정연태가 귀국한 1960년대 초의 한국은 과학영재교육의 불모지로, 관련 논문도 없을 뿐더러 영재교육을 뜻하는 표현도 ‘수재아 교육’, ‘영재아 교육’, ‘우수아 교육’, ‘특수 교육’, ‘특별 교육’ 등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연태는 문교부 장관을 포함한 교육 행정가들에게 과학영재교육의 도입을 주장했다. 그의 건의에서 공통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진 사안은 영재를 위한 과학고등학교 설치였다. 과학영재들이 특별한 교육기관에서 속진과 심화 교육을 받음으로써 젊은 시기부터 풍성한 연구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과학고등학교와 속진 교육, 20대에 박사를 배출해낸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1960년대부터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연태의 제안은 1970년대 말까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영재교육은 당시 문교부가 추진하던 교육정책인 평준화 정책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 평준화 정책은 명문 학교에 지원자가 쏠리고 입시 경쟁이 심해지면서 일어나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로, 1968년 중학교에서 시작되어 1973년 고등학교로 확대 적용되었다. 평준화라는 정책적 기조에서 영재교육은 ‘엘리트 교육’으로 비쳤고, “과학고교의 설치는 문교 당국이 추진하는 평준화시책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부”당했다.[5]

두 번째로, 과학영재교육은 당시 박정희 정부의 과학인력정책과도 맞지 않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박정희 정부가 중점적으로 육성한 과학인력은 과학영재가 아닌 기술 인력이었다. 정부가 내놓은 <장기인력수급추계 및 정책방향>에 의하면 1976년까지 기술공과 기능공 인력이 심각하게 부족해질 것이며, 고급 인력인 과학기술자는 오히려 3만 7천 명 가량 과잉 공급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6] “1969 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과학실험과 연구를 위주로 하는 고등학교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가 ‘지금은 공업고를 할 때’라며 거절”당했다고 술회한 경기과학고등학교의 초대 교장 홍창기의 인터뷰는 당시 박정희 정권이 가지고 있던 과학기술인력 정책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7]

즉 1950년대의 미국이 육성하려고 했던 과학영재는 1970년대의 한국이 도달하지 못한 미래였다. 박정희 정부는 과학영재교육을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영재교육이 겪고 있는 정책적 소외는 과학기술 인력 수급을 둘러싼 대내외적 조건이 바뀌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이야기였고, 이는 1970 년대 후반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변하면서 서서히 현실화되었다.

 

(2) 누구인가?

한동안 뒷전에 밀려있던 과학영재교육은 1970년대 말이 되어 새롭게 주목받는다. 그것은 박정희 정부가 1977년 발표한 제4차 경제개발 계획의 중점 과제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의 전환을 채택하면서, 소위 “고급두뇌”로 불리던 고급 과학인력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영재교육은 고급두뇌 양성의 방편으로써 70년대 말부터 다시 정부의 정책보고서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80년대에 들어서는 급격히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 80년대 초 한국이라는 공간은 첫 번째 과학영재 교육기관인 경기과학고등학교(1983)이 설립된 배경이라는 점에서 한국 과학영재의 탄생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점에서 눈여겨볼 시기는 1982년이다. 그것은 이 해에 향후 한국 과학영재교육의 모습을 결정지을 두 보고서가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1982년 2월에는 문교부에서 <영재교육 종합수행 방안>이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는 과학영재교육을 위하여 실험적인 형태의 과학고등학교를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이 과학고등학교는 “학급당 20~25명씩, 한 학년에 10학급 200~250명의 소규모로” 기획되었다. 이는 과학영재교육에 대한 기반이 전혀 없는 현실에서 실험 학교를 통해 영재교육에 대한 실질적 경험을 쌓는 것이 좋겠다는 합리적 접근이었다.

이어서 두 달 후인 4월, 과학기술처 산하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과학기술영재 양성을 위한 교육체제 확립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문교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영재학교 설립안을 마련했다. 그것은 한국과학기술원이 대덕 단지에 확보한 27만여 평의 대지에, 고등학교부터 대학, 대학원까지 이어지는 총학생 수 만 명의 거대한 영재학교를 만든다는 발상이었다. 세 단계의 교육과정을 속진으로 학습하게 하여 ‘20대 박사’를 빠르게 생산하자는 것이 한국과학기술원 영재 교육안이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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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한국과학기술원의 영재교육과정 장기 시행계획.
[8]

 

기실, 과학영재교육의 목적에서는 한국과학기술원 측의 보고서와 문교부의 보고서가 거의 같았다. 이는 두 보고서의 뒤에 정연태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교부는 1969년 이후로 정연태가 계속 과학영재교육을 주장하던 곳이었고, 심지어 한국과학기술원의 경우 정연태가 보고서의 앞부분 작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두 과학영재교육의 표현형이 극적으로 달라진 것일까?

그 이유는 부처 내부에 있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보통교육을 담당하는 행정부처의 입장에서, 문교부는 영재교육기관으로 고등학교를 선택하였다. 여기에 문교부는 평준화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왔고, 과학고등학교를 소규모로 추진하는 방법은 예상 가능한 대내외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소규모 실험학교라는 아이디어는 체육 학교 등 이전에 설립된 특별 학교들이 밟은 실패의 전철을 피할 방법이기도 했다.

한편 당시 한국과학기술원이 부닥친 현안은 1981년 개정된 대학원생 병역특례법이었다. 이전까지 이공계 대학원생의 병역특례를 인정해주는 곳은 한국과학기술원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 뿐이었다. 그러나 병역특례제도가 다른 대학원으로 확대되면서, 한국과학기술원은 서울대학교 졸업생을 비롯한 유능한 지원자를 잃을 상황에 부닥쳤다. “타 대학 대학원 교육에 대한 정부의 특혜 사항이 … 평준화 되어감에 따라 우수한 고급 과학두뇌를 양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던 학사 부문의 특징이 상대적으로 점차 감소”하는 위기 상황에서 과학영재학교 설립은 우수한 학생을 모집할 수 있는 대안이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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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보고서에 수록된 <과학기술영재교육제도>. 영재교육제도를 활용하여 신입생 모집을 이원화한다는 제안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10]

 

출발점이 같았을 뿐, 서로 다른 의도로 만들어진 두 과학영재교육 계획은 그 실행에서도 독립적으로 진행되었다. 문교부는 1983년, 첫 번째 과학영재교육기관인 경기과학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11] 비슷한 시기 한국과학기술원은 영재교육 안을 공표하고 본격적으로 학교 설립에 나섰다. 이러한 상태에서, 저 높은 곳에서, 예상치 못한 타협안이 나왔다. 1984년 2월 전두환 대통령이 “고급 과학인력 양성과 관련되어 논의되어 온 과학고등학교, 과기원 영재교육과정, 그리고 산기대의 효율적 통합운영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 지시는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과학영재교육 체제를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영재교육과정에서는 고등학교가 없어졌고, 축소된 학교는 ‘한국과학기술대학(KIT)’이라는 이름으로 대전에 설립되었다. KIT는 여전히 우수한 학생을 받아야 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반대로 곧 첫 졸업식이 열릴 경기과학고등학교는 졸업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과학고등학교와 KIT 사이에 만들어진 조기 졸업제도는 두 학교의 문제를 해결해줄 훌륭한 방법이었다. 조기 졸업제도가 확충되고 1986년 3월 첫 번째 경기과학고등학교 졸업생(조기졸업자 포함)이 KIT의 첫 입학식에 참석하면서, 한국의 과학영재교육 체제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안보를 위해 처음 미국에서 도입된 아이디어가, 30년 후 ‘경제 발전’이라는 신조를 통해 한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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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1986년도 한국과학기술대학(KIT) 입학식.
[12]

 

(3)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까지 나는 영재교육이라는 아이디어가 어떻게 한국의 과학영재교육 체제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알아보았다. 이 교육 시스템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행위자는 정부 부처였다. 즉, 과학영재는 국가적 의도로 만들어진 정체성이었다. 이 점은 과학영재교육 체제 밖에서 독립적으로 시도된 영재교육이 국가의 지원은커녕 방해를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13] 공인된 국가기관 내에서 만들어질 수 있던 ‘과학영재’는 국가가 경제 발전을 위해 학생들에게 부여한 사명의 다른 이름이었다.

한편으로 이 정체성의 형성에는 상당한 우연이 작용하기도 했다. 가령, 대덕에 교사와 학생을 합쳐 1만 2천 명에 달하는 과학영재교육 도시가 들어서거나, 문교부와 과기처가 각자의 과학영재학교를 설립하는 평행 세계를 상상해보라.[14] 1982년 초까지만 해도 이 모습이 한국 과학영재체제의 미래가 될 수 있었다. 조기 졸업제도를 통해 과학고등학교와 KIT가 이어지는 교육 시스템은 이후로 벌어진 몇몇 우연적 사건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영재교육은 국가적 의도의 산물인 만큼이나 보고서 뒤편에 숨겨진 행위자들의 상호작용과 현실적 타협이 빚어낸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탐색이 현재를 살아가는 과학영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경기과학고등학교의 개교로부터 35년이 지난 지금, 과학영재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은 있다. 우선, 현재 과학영재교육에 대한 비판의 대다수가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제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85년 6월 경향신문에는 과학고등학교가 “입시 교실로 전락”했다는 기사가 실렸다.[15] 제대로 된 영재교육이 제공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학생 선발 과정에서도 과학영재가 아니라 학력 우수자만을 선발해내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비슷한 논란은 과학고등학교의 설립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과학고등학교의 대학 입학 실적은 학부모와 학생들뿐 아니라 각 지방 교육청의 관계자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다른 지방 교육청에서 과학고등학교를 유치하는 이유로 작용할 수 있었다.[16] 평준화 정책에 밀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과학영재교육이 결국은 새로운 ‘일류 학교’를 재생산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과학영재교육 제도가 출범한 이후 지방 교육청, 학부모와 학생을 포함한 교육 구매자들이 새로운 행위자로 참가하면서 과학영재는 더욱 복잡한 형태로 변화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하는 부분은, 과학영재를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다. 경기과학고등학교가 경기 지역의 중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제한하면서, ‘다른 지역 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교육의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 문제는 다른 지역에 과학고등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몇 년간 경기과학고등학교 측이 모집 인원을 멀게는 강원도까지 늘리면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지역 형평성보다도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성별의 형평성이었다. 과학영재교육 체제의 초기 역사에서 여성들은 배제되었고, 이들에 대한 차별은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초기 경기과학고등학교는 여학생의 입학을 받지 않았고, 이는 이듬해 개교한 다른 세 곳의 과학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여학생이 들어올 경우 기숙사 관리에서 애로사항이 생긴다는 점이 표면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관련된 문서를 좀 더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과학자에 대한 젠더 스테레오타입의 문제가 기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의 경우에도 지적 활동 영역에서는 고등학교 수준에서 비교할 때,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212/100 정도로 우세하였다는 보고가 있으며, 아직까지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에 비하여 수학, 공학이나 과학을 선호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특히 보수적 성격이 강한 우리나라의 교육사회적 현실을 감안하여 여학생 선발에 관한 문제는 여학생의 과학자로서의 성취율에 관한 연구 결과를 기다리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17]

이 문제는 1988년 경기과학고등학교가 비로소 남녀공학으로 전환되면서 끝을 맺었다. 10.8:1의 경쟁률을 기록한 이해 경기과학고등학교 신입생 모집에는 271명의 여학생이 지원하였으며, 그 중 여섯 명이 최종 합격했다. 여성들은 남녀 성비 14:1의 상황에서 과학영재교육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18]

“우리는 꿈을 쏘아 올렸다.”[19]

경기과학고등학교와 KIT의 1기 졸업생이자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주인공 중 한 명인 김형신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가 말했던 과학을 향한 꿈은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모든 과학영재가 공유하는 꿈이라 할 수 있을까? 혹시 그 꿈은 과학영재라는 호칭을 받은 학생들이 지고 가야 할 짐은 아니었을까? ‘과학영재’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꾸준히 바뀌게 될, 바뀌어야 할 정체성이다. 그렇기에 과학영재의 제도적 기반을 파악하는 작업은 현재의 과학영재를 이해하기 위한 시작점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는 아마 과학영재라 불렸던 이들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던져야 할 질문일 것이다.

 

 


읽을거리

김동광 외, <한국의 과학자사회 : 역사, 구조, 사회화>, 궁리, 2010Screen Shot 2018-04-08 at 11.31.21 PM

한국의 과학자들은 누구인가? 한국의 과학자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 책은 여러 연구를 통하여 한국의 과학자 사회에 대한 다층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필자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1부 “역사적 접근”으로,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과학자 사회의 변화를 일곱 편의 연구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전체적인 개괄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 과학자 사회에 대한 연구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수 외, <과학기술영재 양성을 위한 교육체제 확립에 관한 연구>, 한국과학기술원, 1982

읽을 거리로 1차 사료를 추천한다면 아무래도 평범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학기술원의 <과학기술영재 양성을 위한 교육체제 확립에 관한 연구(科學技術英才 養成을 위한 敎育體制 確立에 關한 硏究)>를 이 자리에서 언급하는 이유는, 이 역사적인 보고서를 카이스트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쉽게 열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사논문 연구를 진행하던 필자는 한국과학기술원의 영재교육계획 보고서를 그 어디에서도 입수할 수 없어서 좌절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카이스트 도서관에 접속했다. 그런데, 그렇게 애타게 찾던 보고서를, 심지어 PDF로 다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을 상상해보라. 사료를 도서관 홈페이지에 올려놓다니 역시 카이스트는 멋진 곳이다.

 


[1] 국가기록원, 「전두환대통령수원경기과학고등학교시찰15」,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0200004508&dsid=000000000013&gubun=search#1

[2] 정연태 (1899) 『교육과 과학과 한평생 : 정연태 문집, 1권 과학영재교육』, 서울대학교, p. 1.

[3] 에이브라함 J. 탄넨바움, 김태련 김정휘 조석희 번역 (2004), 『영재교육 : 심리학과 교육학에서의 조망』,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pp. 44-45.

[4] 김지연 (2012), “전후 미국의 한국 교육원조, 1956-1962 : 피바디프로젝트 사례 분석”, ,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5] 정연태 (1984), 『한국과학교육의 오늘과 내일』, 한국방송사업단, pp. 249-250.

[6] 과학기술처 (1970), 『과학기술 연감 1969』, 과학기술처, 1970), p. 59.

[7] 조선일보 (2006. 09.22), 「”지금 과학고는 입시만 매달려”」.

[8] 한국과학기술원 (1982), 『과학기술영재 양성을 위한 교육체제 확립에 관한 연구』, 한국과학재단, p. 169.

[9] 한국과학기술원 (1996), 『한국과학기술원 사반세기』, 한국과학기술원, p. 93.

[10] 한국과학기술원 (1982), 『과학기술영재 양성을 위한 교육체제 확립에 관한 연구』, 한국과학재단, p. 77.

[11]정연태는 경기과학고등학교의 설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기과학고등학교는 지방 교육청인 경기도교육청에서 추진한 프로젝트였는데, 당시 경기도교육청 교육감으로 재직하던 이준경은 정연태와 연희전문학교 동기였다. 정연태는 그를 설득하여 경기도교육청에서 일련의 영재교육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연태 (1988), 『교육과 과학과 한평생 : 정연태 문집, 1권 과학영재교육』, 서울대학교 출판부, p. 4.

[12] 국가기록원, 「한국과학기술대학(KIT) 입학식10」.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51924121#1

[13] 정연태는 과학고등학교 설립 이후 자신이 개인적으로 실시한 과학영재 “일요교실”이 문교 당국의 방해를 받았으며, 교육자들이 설립한 영재교육학회도 당국의 인가를 받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정연태 (1988), 『교육과 과학과 한평생 : 정연태 문집, 2권 영재아와 지도』, 서울대학교 출판부.

[14] 후자의 경우, 2009년 부산의 한국과학영재학교가 한국과학기술원 부속학교로 전환되면서 부분적으로 현실이 되었다.

[15] 경향신문(1985. 06. 07), 「”入試”교실로 전락한 科學고교 英才교육”不渡”」.

[16] 송용대(경기과학고등학교 초대 교감) 인터뷰, 2017. 02. 21., 경기도 수원.

[17] 홍창기 (1988), 『과학고등학교의 교육』, 배영사.

[18] 경기과학고등학교 6기 졸업생 중 잘 알려진 인물로 정재승 교수(현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가 있다.

[19] 김형신 (1994), “우리는 꿈을 쏘아 올렸다”, 『노벨상을 가슴에 품고』, 동아일보사, p.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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