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궁수처럼 글쓰기

윤기준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ykj90@kaist.ac.kr


 

올림픽 궁사처럼 쏘기

현대 궁술은 정적이다.

올림픽 양궁을 떠올려 보자. 양궁장의 궁사들은 모두 가만히 선 채로, 정해진 거리에 있는 정해진 크기의 과녁을 맞힌다. 활과 화살의 규격 또한 정해져 있고, 각 궁사는 정해진 개수의 화살을 정해진 시간 안에 쏘아 과녁에 정해진 대로 점수를 합산한다.[1] 모든 선수는 연습과 같은 상태로 활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활의 상태를 점검한다.[2] 모든 것이 정해진 상태에서 선수들은 최고의 한 발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비록 시간은 제한되어 있으나 그들은 화살을 꺼내기부터 발사까지 충분한 시간을 들이고, 또 그렇게 하도록 훈련받는다. 최고의 한 발을 만들기 위해 그들은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하고, 바람의 상태를 파악하며, 근육 하나하나의 움직임까지 조절해 과녁을 조준하여 시위를 당긴다.

 

1. 2012 런던 기보배

<그림1> 2012 런던 올림픽에서 시위를 당기는 기보배 선수

 

이들의 궁술은 마치 아들과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과를 맞추려고 하는 빌헬름 텔을 연상시킨다.[3] 스위스의 잔인한 영주인 헤르만 게슬러는 자신의 모자에 경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빌헬름 텔을 죽이려 내기를 건다. 80보의 거리에서 아들의 머리 위에 얹은 사과를 맞추면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실수하면 아들을 스스로 죽이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텔은 신중하게 최고의 한 발을 쏘고, 정확히 사과를 맞추어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렇듯 정해진 상황에서 쏘는 최고의 한 발이야말로 현대 궁술의 정수이자 핵심이다.

 

2. 빌헬름 텔

<그림2> 세상에서 가장 신중한 한 발을 준비하는 빌헬름 텔

 

고대 궁수처럼 쏘기

그러나 총기가 발달하기 전 전장에서 활약하던 궁술은 동적이었다. 궁수들은 전황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고, 과녁—그러니까 상대 병사—또한 마찬가지였다. 정해진 것은 없다. 고대 궁수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활을 쏠 수 있어야 했다. 16세기 아랍에서 쓰인 궁술 교본[4]은 전장에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상황과 각각의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파지법, 활시위를 당기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궁수들은 가만히 서서는 물론이고 달리면서, 말을 타면서, 장애물을 넘으면서 활을 쏘아야 했다. 궁수들은 상황에 맞추어 왼손과 오른손을 가리지 않고 시위를 당길 줄 알아야 했으며, 활 양편에 시위를 거는 데 익숙해야 했다. 장비 또한 일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화살뿐만 아니라 적의 화살 또한 이용할 줄 알아야 했고, 비가 오거나 습기가 많아 활이 최적의 상황이 아닐 때도 활을 쏴야 했다. 거리 또한 정해져 있지 않았다. 활은 멀리 있는 적을 타격하는 데뿐만 아니라 가까운 거리에서도 쓰였기 때문에, 궁수들은 자신을 향해 휘두르는 칼보다 빠르게 시위를 당겨야 했다. 궁수들은 정해진 상황에서 정해진 표적을 맞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하고 적응하고 이용하여 어떻게든 활을 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총기가 발달한 이후 궁술이 전쟁에서 급격하게 사라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뛰어난 궁수가 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급박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 변화에 아무나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연습과 경험을 통해 역량을 쌓은 궁수만이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3. 이집트 전쟁궁수

<그림3> 전차를 탄 이집트 궁수

 

궁수처럼 쓰기

우리 대학원 학생은 1년 차에 필수 과목인 과학기술학통론과 과학기술정책통론을 듣고 한 학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초과목시험을 친다. 시험의 지침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 미리 고지한 시험 날짜에 8시간 동안 각기 1,000단어 분량의 에세이 4개를 써야 한다. 문제는 당일에 발표되지만, 대략적인 주제와 방향성은 기존 시험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일까? 당시에 나는 당시 기초 과목 시험을 정적인 현대 궁술로 생각했던 것 같다. 정해진 상황에서 한 학기 동안 배운 모든 것을 검토하여 최고의 작품을 쓰는 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부족했다. 시험에 들어가 보니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검토하고 신중을 기할 시간은 없었다. 또, 문제의 방향성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시험 문제에 대응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주어진 문제에 빨리 답하는 것이 대학원 과정의 목표란 말인가? 시험을 마치고 나는 조금 화가 났고, 지도교수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지도교수님은 내 어려움에 공감하시면서도 “생각보다 마감에 쫓겨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고 말씀해주셨다. 제시간에 글을 내는 것이 유일한 목표는 아니지만, 모든 것을 고려하고 신중을 기할 만한 시간이 주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마감에 쫓겨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나는 이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안다. 미리 정해진 환경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글을 쓸 수 있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글쓰기는 마감이 촉박하고 여러 이유로 관련된 모든 자료를 검토할 수 없다. 글을 쓰는 도중에 주제와 관련된 새로운 사건이 터지거나, 글 외적으로 개인적인 상황이 변화하기도 한다. 전장에서 궁수들이 뛰고 달리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변 환경에 대처하며 어떻게든 화살을 쏘아내는 것처럼, 글쓰기 또한 시시각각 변화하는, 달갑지 않은 환경에 대처하며 어떻게든 글을 써내는 일이다.

여기서 어려운 점은 화살을 잘 맞추지 못하면 그 어떠한 상황 대처도 쓸모없는 것처럼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위를 떠난 화살이 궁수의 사정을 생각해서 날아가 주지 않는 것처럼, 독자들도 내 사정을 봐주고 글을 읽지 않는다. 뛰어난 궁수가 되기 어렵듯이 뛰어난 글쓴이가 되는 일도 어려워 보인다. 그렇게 어려워서 나는 이 글의 결론을 못 내고 있다.


볼거리

읽을거리 그림.png

리우 올림픽 여자 양궁 개인전 결승(Rio Replay: Women’s Individual Archery Final)

https://www.youtube.com/watch?v=d1fzS993cTk

장혜진 선수가 우승한 2016 리우 올림픽 여자 양궁 개인전 결승 동영상. 선수들이 얼마나 신중하게 활을 쏘는지 볼 수 있다. 양궁의 이런 분위기 때문일까? 양궁 중계는 카메라 움직임도 대단히 정적이다. 시위를 당길 때 클로즈업되어 보이는 선수의 얼굴과 화살이 꽂힐 때 과녁 모두 화면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재미있게도 준우승한 독일 선수를 비출 때 카메라가 더 많이 움직인다는 느낌이 드는데, 아마 기분 탓이겠지?


[1] 70미터 거리에서 122센티미터 크기의 과녁에 쏘고, 예선에서는 72발, 본선에서는 세트당 3발을 쏜다. 한 번 쏘는 데 20초 제한이 있다. 활의 재질과 크기에도 상세한 제한이 걸려 있다(세계양궁연맹, 2015).

[2] 올림픽 현장에서 궁사들이 활과 화살을 점검하는 일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올림픽 전에 비파괴검사를 하는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하기도 한다.

서울신문, 2016.08.06.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806500029

연합뉴스, 2016.08.13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8/13/0200000000AKR20160813027800003.HTML

[3] 사실 빌헬름 텔은 활이 아닌(더 정적인) 쇠뇌를 썼다.

[4] 저자미상, Arab Archery: An Arabic manuscript of about A.D. 1500 “Book on the Excellence of the Bow and Arrow” and the Description thereof 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다. 번역자는 Nabih Amin Faris와 Robert Potter El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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