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기술(記述)하기: 나는 왜 만년필을 쓰나

윤기준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ykj90@kaist.ac.kr


 

그림1

<그림 1. 플래티넘사 #3776 센츄리 샤르트르 블루>

 

볼펜

나는 원래 볼펜을 썼었다. 생각해보면 볼펜은 마법이다. 볼펜은 상황을 가리지 않고 충실하게 잉크를 종이에 묻힌다. 흔히 보는 A4 용지에도, 코팅지에도, 한지에도. 어디에도 잘 써진다. 쓰고 바로 문질러도 잘 번지지 않고, 뒤에 비치지도 않는다. 급히 써야할 일이 있으면 ‘딸깍’하고 누르기만 하면 바로 잘 나오고, 쓰지 않고 몇 달을 그냥 두어도 어제 쓴 것처럼 잘 나온다. 고장도 잘 나지 않는다. 한번 사면 계속 쓴다. 가격이 싸니 고장나도 새것을 사버리면 그만이다. 뒤집고 흔들어도 잉크가 꿈쩍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물리법칙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볼펜과 사용자의 관계는 매우 단조롭다. 사용자가 신경 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볼펜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내가 지금 어떤 종이에 글을 쓰는지, 최근에 이 볼펜을 언제 썼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볼펜의 구조나 원리를 알 필요는 더더욱 없다. 사실 그게 볼펜의 미덕이다.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쓰면 된다는 거. 그렇게 볼펜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필기구가 되었다.

우리는 큰 생각 없이 볼펜을 쓰지만, 이런 마법 같은 물건을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볼펜은 이름 그대로 볼이 구르면서 종이에 잉크를 묻혀주는 필기도구다. 따라서 볼펜의 과학은 볼을 잘 만드는 것이다. 볼의 크기가 글자 두께를 결정하고, 볼의 정교함이 볼펜을 얼마나 오래 쓸지, 글자를 쓸 때 사용감과 촉감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볼펜 두께를 표시할 때 0.5mm니, 0.38mm니 하는 숫자가 바로 이 볼의 크기다. 이 볼은 볼펜촉 끝에 있는 소켓 안에 빠지지 않도록 둘러싸여 있는데, 볼의 지름에 0.1%(0.5mm볼펜 기준으로 0.0005mm)의 오차만 있어도 볼펜은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고 한다.[1] 볼이 조금이라도 크면 끼여서 돌아가지 않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작으면 잉크가 균일하게 나오지 않아 필기를 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정교한 정밀 가공 기술은 쉽게 얻을 수 없다. 볼의 재료로서 양질의 철을 선별하고, 이를 오차없이 완벽한 구의 모양으로 깎아내는 일은 능숙한 숙련공만이 할 수 있다. 전세계 볼펜의 80%를 만들어내는 중국조차도 볼펜심은 전량 수입에 의존했고, 2017년이 되어서야 직접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2]

 

 

그림2

<그림2. 볼펜 팁 구조[3]>

 

볼펜은 완성품이다. 사용자는 이처럼 정밀한 기술이 녹아든 볼의 존재를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문방구에서 볼펜을 한 자루 사서 뒤를 누르기만 하면 글을 쓸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펜 한 자루를 만들기 위해 연구자와 기술자가 했을 수많은 고민을 상상해 보라. 잉크가 어떻게 하면 심 안에서 새어 나오지 않을까? 수성 잉크가 좋을까 유성 잉크가 좋을까? 볼펜 팁 구조를 어떻게 만들어야 볼이 튀어나오지 않으면서도 잘 굴러갈까? 이런 고민과 연구는 사용자가 볼펜을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한 동시에, 사용자가 오직 쓰기 그 자체만 생각할 수 있도록 했다. 볼펜을 구입하고 쓰기 전까지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준비 과정과 관리는 연구자와 생산자가 대신하며, 사용자는 어떤 볼펜을 살지 고민할 수 있을 뿐 볼펜이 작동하는 과정에 개입할 수는 없다.

 

만년필

“생각만으로 글이 써지는 건 아니다. 마음에 드는 필기구와 종이의 형태와 질, 그리고 기분이 하나가 될 때 글이 된다. 만년필 없으니 글 쓸 기분 안 나네.” [4]

나는 이제 만년필을 쓴다. 만년필은 기본적으로 전체 구조를 담당하는 몸체, 잉크 저장공간, 잉크를 펜촉으로 전달해주는 피드, 종이와 직접 닿아 잉크를 써지게 하는 펜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잉크를 저장공간[5]에 채우면 피드에 있는 얇은 관을 통해 촉으로 전달되고, 촉이 종이에 닿으면 잉크가 빨려나가 종이를 적셔서 글자가 써진다. 영어로는 닙(nib)이라고 하는 촉은 잉크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중간에 가는 틈이 있고(슬릿, slit), 끝은 종이와 닿았을 때 부드러우면서도 오래 쓸 수 있도록 이리듐이나 루테늄처럼 잘 닳지 않는 금속으로 마감 처리가 되어 있다. 얇은 슬릿을 잘 가공하는 기술, 촉 끝을 잘 처리하는 기술 등 만년필 제조에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만 만년필의 작동 원리 자체는 볼펜보다는 훨씬 덜 마법 같은 셈이다.

 

그림3

<그림 3. 만년필의 구조[6]>

 

만년필은 불편하다. 볼펜의 미학이 사서 바로 쓸 수 있는 점이라면 만년필의 미학은 사서 절대로 바로 쓸 수 없다는 점이다. 만년필은 사용자가 끊임없이 준비하고 관리해야만 쓸 수 있는 필기구다. 볼펜은 ‘딸깍’하기만 하면 글자를 바로 쓸 수 있지만, 만년필은 그렇지 않다. 만년필이 불편해서 편하게 쓰려고 만든 물건이 볼펜이기 때문에, 만년필은 볼펜의 장점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만년필은 신경써줘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 첫 번째로 잉크가 있는지 확인하고 잉크가 없다면 잉크를 충전해야 한다. 일회용으로 나오는 카트리지를 사용한다면 다 쓴 카트리지를 빼고 새 카트리지를 꽂기만 하면 되어서 그나마 편하지만, 잉크를 충전해줘야 하는 경우 품이 든다. 잉크병을 열고 만년필 촉을 담가 잉크를 빨아올려야 하는데, 숙련되면 문제없이 할 수 있지만 실수라도 해서 잉크를 흘리거나 쏟으면(..!) 엄청난 낭패다. 종이도 가려 써야 한다. 코팅되어 있는 종이에 쓰면 잉크가 빨리 흡수되지 않아서 손이 닿았을 때 쉽게 묻어나고, 일반적인 A4용지에 쓰면 잉크가 번지기 일쑤다. 섬유가 굵은 갱지는 펜촉이 종이에 걸려서 부드럽게 글자를 쓰기가 어렵다. 종이 섬유가 펜촉 끝에 끼기라도 하면 뺄 때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만년필은 준비도 필요하지만 평소 관리도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관리는 매일 사용하는 것이라서 꼭 필요하지 않아도 조금씩은 써야 한다. 다른 잉크를 사용하고 싶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한 달에 한 번은 세척을 해줘야 한다. 잉크가 굳어서 나오지 않거나 만년필에 착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손에 쥐는 방법도 조심해야 한다. 촉 등을 위로 가게 해서 써야 하고, 옆으로나 뒤집어서 쓰면 잉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촉이 휘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힘을 줘서도 안 된다. 그래서 만년필을 서명용으로 쓰는지도 모르겠다. 서명을 하기까지 거쳤던 수많은 고민을 손에 잡히는 형태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만년필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관리하는 일이 그다지 귀찮거나 수고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절한 종이를 준비하고, 잉크를 채우고, 세척을 위해 분해하고 조립하는 일은 만년필 사용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용자 본인만이 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만년필을 처음 사용할 때부터 내 손으로 내 필기구를 준비할 수 있다는 느낌이 신기하고 좋았던 것 같다. 내가 이 펜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사서 쓰고 버리는 도구가 아니고 나와 오래도록 함께할 도구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그래서 잉크를 충전하고 만년필을 세척하는 일은 다음에 어떤 색과 두께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릴지 고민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또, 내가 잉크를 벌써 이만큼이나 썼구나 하고 뿌듯해하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만년필을 관리하는 일이 쓰기와 워낙 깊게 관련되어 있다 보니 그 이후에는 쓴다는 행위에 만년필 준비와 관리를 자연스럽게 포함시킨 것 같다. 쓰기의 개념이 확장된 셈이다.

관리가 필요한 곳에는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촉, 잉크나 종이가 바뀌어 봐야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이런 일일수록 작은 변화가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금으로 된 촉은 어떤 느낌일지, 더 묽거나 된 잉크를 써보면 잉크 흐름이 어떻게 바뀔지, 색깔은 어떨지, 테가 뜰지 말지, 종이를 바꾸면 글씨 두께와 필기감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고 신경이 쓰인다. 그렇게 사람들이 5만원, 50만원, 500만원짜리 만년필에 빠지는 것이다. 쓴 잉크보다 써야할 잉크가 훨씬 많게 되며, 다 쓸 수 없어 잉크를 나누어 팔거나 심지어 공짜로 나눠주는 경우도 있다. 한 번만 써보고 남에게 노트를 주기도 한다.

이런 증상은 열병과도 같아서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찾아오고, 주변에 전염되기까지 한다. 내 경우 만년필을 처음 선물 받고 나서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몇 년치 잉크를 한꺼번에 구입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만년필을 전도하며 제발 내 잉크를 써달라고 거꾸로 구걸했다. 필기감 테스트를 하려고 한 번만 써본 노트가 브랜드별로 2-3권씩 있다. 만년필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몇 개를 더 들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바닥난 통장 잔고뿐이었다. 심지어 집에 더 이상 공간이 없어서 만년필이나 잉크를 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는 지금 있는 필기구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매일같이 지름신을 억누르고 있다.

많은 만년필 사용자가 만년필을 사용하는 이유로 “기분”, “느낌”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이것이 준비와 관리 단계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쓸 만한 분위기 조성이랄까? 가벼운 메모를 하거나 전화번호를 받아 쓰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가끔 중요한 글을 쓸 때는 어쩐지 펜을 들기가 부담스럽다. 그럴 때 천천히 잉크를 채워넣고 종이를 고르는 동안 서서히 글을 쓸 마음이 든다. 무소유를 말한 법정 스님조차도 만년필을 두고 “생각만으로 글이 써지는 건 아니다. 마음에 드는 필기구와 종이의 형태와 질, 그리고 기분이 하나가 될 때 글이 된다. 만년필 없으니 글 쓸 기분 안 나네.” 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 전에 자신만의 글쓰기 의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괜스레 책상을 청소한다든지…), 내 경우 그 의식을 필기구를 고르고 준비하는 것으로 치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만년필을 쓰는 것은 필기구의 준비와 관리를 스스로 더 감당하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만년필을 쓰면서 글쓰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쓰기가 단지 머릿속 생각을 종이에 옮기는 일이라기보다는, 필기구와 손이 함께하는 행위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쓰기는 단지 생각을 글자로 적는 일이 아니라 만년필과 잉크, 종이를 잘 준비하는 일까지 포함하게 되고, 관심을 가지고 준비했기 때문에 쓰는 일이 즐거워졌다. 마치 함께 먹을 음식을 요리하는 과정이 먹는 기쁨을 배가시키는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편지지와 펜을 고를 때 설레이는 것처럼, 그리고 데이트하는 그 시간만큼이나 만나러 가는 길도 즐거운 것처럼 말이다.

 


읽을거리

읽을거리1

 

겐코샤, 부윤아 번역 (2016), 『만년필 교과서』, 디자인이음.

만년필의 구조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해야 좋은지 기초부터 알려주는 친절한 책. 다양한 브랜드를 소개하고 있기도 해서 만년필을 처음 접하는 초심자가 읽기 좋다.

 

 

 


 

[1] 과학동아(2009. 12), 「볼펜 한 자루의 과학」.

[2] 우리나라의 경우 모나미의 협력사인 정화강구가 1975년 볼펜볼 상용화에 성공했다.

[3] 필자 그림.

[4] 법정 스님, 리경 엮음 (2018), 『간다, 봐라: 법정 스님의 사유 노트와 미발표 원고』, 김영사, pp. 29.

[5] 저장공간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갈아끼우기만 하면 되는 카트리지, 내가 직접 잉크를 충전할 수 있는 컨버터, 바디 전체를 저장공간으로 사용하는 피스톤필러나 플런저 방식도 있다.

[6] 필자 촬영. 트위스비사의 에코 만년필에 이로시주쿠 코스모스 잉크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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