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과기린의 영화뒤켠: 크리스토퍼 놀란과 포장의 과학

곰과기린


 

필자 소개

이제는 각자 살게 된 곰과 기린은 만난지 올해로 8년째가 되는 사이다. 기린은 여전히 석사과정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곰은 드디어 학부생 신세를 면하였다. 8년 동안 곰과 기린의 주된 술안주는 영화였다. 영화뒤켠은 그 술자리 이야기를 글로 연성하라는 편집장의 요구로 탄생하였다고 한다.

 


 

곰: 안녕하세요 여러분, 곰과기린의

기린: 영화뒤켠 코너가 돌아왔습니다. 정말 연재 코너가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곰: 저번 호에서는 우리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다뤘죠. <블랙 팬서(2018)>는 다들 보셨나요? 

기린: 아, 저도 <블랙 팬서> 봤는데요, 지난 4호의 영화뒤켠을 읽으셨다면 마블 영화에서의 과학이 어떻게 새롭게 그려졌는지 생각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곰: 영화뒤켠에서는 앞으로도 대중 영화 속의 과학을 다룰 겁니다. 영화가 과학을 영상 속 이미지로 그릴 때나, 시나리오 속의 플롯 장치로 사용할 때 어떤 시각이 그 뒤켠에 자리잡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죠.

기린: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과학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아보기로 할텐데요. 이번 영화뒤켠의 테마는 바로 한국 극장가의 또 다른 대중성 끝판왕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입니다.

Film: The Prestige.     (2006) Director CHRISTOPHER NOLAN on the

<그림 1. 한국 극장가의 또 다른 대중성 영화의 끝판왕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잘생겼다.>

 

곰: 한국에서 놀란의 대중성은 정말 놀라워요. 비교적 최근작인 <인터스텔라(2014)>가 천만 영화라는 것도 놀랍지만, 다른 나라의 흥행 성적과 비교하면 더 돋보이는 결과입니다. 한국의 영화 시장 규모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비슷한데, <인터스텔라>의 흥행성적은 우리가 영국의 2배가 넘고, 프랑스에 비해서는 거의 4배나 돼요.

기린: 수치로 보니 정말 대단하네요. 그런데 대중성 이외에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놀란 감독이 과학이라는 소재를 영화 속에서 애용한다는 거에요. 우주를 소재로 한 <인터스텔라>뿐만 아니라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과학으로 그려내는 <인셉션(2010)>, 그리고 마술과 과학을 연결지어 보여주는 <프레스티지(2005)> 등이 그렇죠.

곰: 한국에서 <인터스텔라>의 과학은 개봉 당시 상당한 관심을 끌어모으기도 했죠? 메X스터디 수능 강사가 나와서 상대성 이론같은 걸 설명하기도 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저희가 여기, 과학뒤켠의 영화뒤켠에서 놀란을 다루기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죠, 기린형?

 

<그림 2. 이번에 다룰 놀란 감독의 세 영화>

 

“위에 언급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과학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서사에서 과학이 특징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린: 네, 바로 놀란의 영화에서 과학이 사용되는 방식이 주목할 만 하기 때문이죠. 위에 언급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과학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서사에서 과학이 특징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곰: 그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우선 과학 소재가 너무나도 자명한 <인터스텔라>부터 다뤄볼까요? <인터스텔라>의 줄거리를 정리해주세요.

기린: <인터스텔라>는 식량난과 자연 재해에 휩쓸리는 인류를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우주 개척의 필요성을 주장하죠. 인류는 지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행성을 개척해야 하는 운명적 난관에 처합니다. 주인공인 쿠퍼(매튜 매커너히 분)는 엔지니어이자 파일럿인데, 이 행성 찾기 임무의 핵심 멤버입니다. 그는 지구에 남겨진 인류를 구하기 위한 임무에 나서죠.

곰: 하지만 인류를 구하러 떠나는 쿠퍼에겐 가족이 있습니다. 특히 딸 머피(제시카 차스테인 분)와의 관계가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어요. 쿠퍼는 분명 머피로 대변되는 자식 세대를 구하기 위해 우주로 떠나지만, 딸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원망하게 되죠. 쿠퍼가 떠난 뒤에도 둘 사이의 관계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기린: 쿠퍼는 우주로 나가 웜홀을 통과해 머나먼 은하계에 도착하고 블랙홀과 5차원 공간을 탐험하는 등 여러 고생 끝에 결국 인류를 구하게 되고 영화 마지막에는 딸 머피와 재회합니다.

곰: 네, 그런데 멀리 떨어진 이 둘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아버지 쿠퍼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머나먼 우주로 여행을 떠나고, 딸 쿠퍼는 아버지가 블랙홀 속 5차원 공간에서 보내준 데이터를 분석해 인류의 지구 탈출을 실현시키죠. 딸 쿠퍼는 이 데이터를 알아보면서 아버지가 보낸 것이라는 걸 깨닫고 감격해요. 수 년간의 원망 한순간에 뒤는 과학적 발견이죠.

기린: <인터스텔라>의 세계관에서 과학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책으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과학의 여러 특징들이 있는데요, 이를테면 주인공인 쿠퍼가 과학을 대하는 방식에서 나타나요. 아빠 쿠퍼의 과학 사랑은 영화 내내 강조됩니다. 그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고, 그런 사고방식을 딸에게 가르치려 꾸준히 노력해요.

곰: 네, 영화 초반에 무인드론을 탈취하기도 하고, 농사 짓는 땅의 자동화된 농기구들이 전부 아빠 쿠퍼의 손에 의해 고쳐진 것들이고요.

기린: 아빠의 과학 사랑이 도드라지는 부분은 역시 학부모 면담 장면이에요. 아들이 성적때문에 엔지니어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 선생님이 미국의 달 착륙을 음모론 취급할 때에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분노하죠.

 

“<인터스텔라>에서 쿠퍼는 과학이야말로 영광과 풍요의 과거를 상징하는, 지금 길을 잃고 망해가는 지구가 추구해야할 대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학을 잃어버린 현재의 인간들을 한심하게 생각해요.”

 

곰: 그가 과학을 바라보는 방식이 나타나는 또다른 장면이 있어요. 집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한탄하는 장면에서 쿠퍼는 과학이야말로 영광과 풍요의 과거를 상징하는, 지금 길을 잃고 망해가는 지구가 추구해야할 대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학을 잃어버린 현재의 인간들을 한심하게 생각해요.

 

그림 3

<그림 3. 맥주를 마시며 인류의 암울한 상황 한탄하는 쿠퍼.>

 

기린: 극 초반부터 굉장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로 세팅이 되어있죠. 과학을 포기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던 쿠퍼에게 인류의 미래를 과학으로 구해낼 기회가 찾아옵니다. 예산부족으로 폐쇄된 것으로 알려졌던 NASA 비밀리에 준비한 계획에 어쩌다보니 동참하게 된 그는 지구를 구하러 우주 멀리 떠납니다.

곰: 보면서 어이없었던 것 중에 하나가 뭐 항상 그렇지만 이번에도 역시 지구를 구하는 건 미국이라는… 다른 나라는 뭐하나요? 다른 나라는 영화에 아예 등장도 하지 않죠? 모래 폭풍이 불었는데 미국인들만 살아남은 걸까요? 

기린: 아무래도 미국만큼 과거의 영광이 휘황찬란한 우주 과학 국가 없긴 하죠. 과거의 영광, 그리고 그에 대한 향수는 쿠퍼 캐릭터의 주요한 동기잖아요. 다 죽어가는 지구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다시 등장하는 NASA는 달에 첫 발걸음을 내딛던 그 NASA의 정신을 이어받아 머나먼 우주로의 모험을 떠나죠.

곰: 그렇게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우주로 모험을 떠난 우주선의 멋진 과학자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이 모험을 떠나면서 지구에는 버려진 것들이 남아있어요. 아빠 쿠퍼는 인류를 구하겠다며 어린 아들 딸 쿠퍼들에게 아무 설명 없이 언젠가 돌아오겠다는 약속만 하고 급히 떠나버렸죠. 쿠퍼는 과학자이자 모험가이자 파일럿으로서 사회에 공헌할 어떤 가능성을 위해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포기합니다. 무언가 더 큰 대의를 위해 희생되는 건 가족 간의 사랑이네요. 크리스토퍼 놀란이 <인터스텔라>에서 보여주는 NASA와 아빠 쿠퍼로 대변되는 파이오니어(pioneer), 즉 선구자적 과학이 드러내는 과학의 한 측면은 바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의 우주여행을 알고있는 것도, 결정하는 것도, 수행하는 것도 모두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죠. 지구에 남겨진 다른 사람들은 이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계획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아는 바도 없습니다.”

 

기린: 그런데 이 모험적, 선구자적 과학이 결국 인류를 드라마틱하게 구한다는 점이 문제 아닐까요? 희생되는 것들이 있지만 결국 멋지게 지구를 구한다… 그러니까 <인터스텔라>에서 놀란이 그려내는 과학은 소수의 과학이에요. 이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의 우주여행을 알고있는 것도, 결정하는 것도, 수행하는 것도 모두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죠. 지구에 남겨진 다른 사람들은 이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계획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아는 바도 없습니다.

 

그림 4

<그림 4. 어디론가 대피 중인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 이들은 우주탐험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곰: 심지어 인류가 달에 갔다는 것도 음모론이라고 교육 받는 세상이에요. 과학을 모르는 인간들은 매우 무력하게 그려지죠. 이게 어른이 된 아들 쿠퍼(케이시 에플렉 분)라는 캐릭터로 형상화되어서 나타나요. 아들 쿠퍼는 과학을 믿지 않고 가족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는 꼴통 레드넥 캐릭터로 나오는데,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인간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거죠. <인터스텔라>에서 평범한 인간은, 인류를 구하려는 소수 엘리트가 힘들게 노력하는 과정에서는 방해꾼 역할로 나타나지만, 인류를 소수 엘리트가 구해낸 다음에는? 마지막에 평범한 불특정 다수의 엑스트라 캐릭터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평화로운 우주 정거장에서 잘 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결국 마지막에 평화롭게 구원된 장면에서만 다시 등장할 뿐이라니! 이 얼마나 선민주의적 과학이란 말입니까?

기린: 근데 문제는 놀란은 이걸 정당화하는 서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거죠. 방금도 언급했지만 영화에서 쿠퍼와 과학자들은 그 모든 위험요소와 역경을 뚫고 결국 인류를 구해냅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거죠. <인터스텔라>에서 등장한 소수에 의한 과학은 그렇게 감동적인 과학으로 변모합니다. 놀란의 영화에서 과학은 주로 그럴듯한 서사를 이끌어가게 돕는 핵심 장치로 등장하는데요. 놀란은 항상 과학을 소재로 쓰면서 과학이 가진 여러 이미지들을 가지고 오지만 정작 그 이미지 자체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는 서사를 보여줍니다. 과학을 포장의 도구로만 소비하죠.

곰: 다른 영화에서도 비슷한 점들이 발견됩니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인셉션>을 생각해볼까요? <인셉션>도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 찍지 않았나요? 아, 600만 정도네요. 놀란이 한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게 이 <인셉션> 때부터라고 해도 좋겠죠. 마지막 장면에서 팽이가 돌면서 끝나는 결말에 대한 해석이 다양했던 기억이 나네요. 

기린: 네, 놀란 영화답게 <인셉션> 또한 치밀하고 복잡한 구성으로 짜여져 있는데요. <인셉션>의 줄거리를 정리해주세요.

곰: <인셉션>은 궁지에 몰린 주인공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로 시작해요. 코브는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조국인 미국에서 도망 나온 범죄자 신세입니다. 자식들을 떠나온 그는 세계를 전전하며 불법 무의식 도둑질로 돈을 모으며 아이들에게 돌아갈 궁리를 합니다. 그러던 중 사이토라는 잘나가는 글로벌 에너지 기업의 대표님이 코브의 혐의를 싹 지워 주겠으니 한 건 해달라며 의뢰합니다. 바로 ‘인셉션’을 해달라는 것이죠.

기린: 인셉션이라는 건 대상의 무의식에 어떤 생각을 심는 것인데, 이 세계관에서 인셉션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돼요. 코브가 받은 의뢰의 내용은 사이토의 경쟁 기업의 경영권 상속자 머릿속에 어떤 메시지를 심어서, 그가 회사를 통째로 말아먹게 해달라는 주문이었죠.

곰: 코브는 너무나 자식들에게 돌아가고 싶기 때문에 업계에서 불가능이라 일컬어지는 제안에 선뜻 동의하고 최고의 팀을 꾸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꿈 속 세상의 어벤져스 리크루팅을 목격하다가 어느새 결전의 날에 도달하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인셉션의 날에 등장하는건 무의식 세계에 도사리고 있던 코브의 과업이에요. 코브를 믿고 함께 따라온 팀원들은 코브의 과거와 맞서 싸워야합니다. 여느 놀란 영화가 그렇듯 열심히 싸우다보면 주인공은 목적을 이루고 코브는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영화는 아리송한 팽이 샷으로 마무리돼요.

기린: 이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 장치로 과학이 등장합니다. 과학이랑 별로 상관이 없어보이는 이 영화에서도 사실 과학적 장치들이 서사를 위한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죠. 

 

“놀란 감독은 <인셉션>에서 꿈 잠입을 굉장히 과학적인 메커니즘으로 보여주고자 노력합니다.”

 

곰: 분명히 Sci-Fi 영화이긴 하죠. 꿈과 무의식의 세계 속 상상의 모험이 현실처럼 느껴지도록 꾸며낸 세계관인데 근거가 되는 과학적 배경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니까요. 주인공인 코브와 일행이 목표 대상의 꿈 속으로 잠입하는 과정은 굉장히 과학적으로 표현됩니다. 우선 꿈에 잠입하게끔 해주는 ‘드림머신’이라는 기계가 이 영화 속 세계관을 가능케 하는 기술이에요. 영화에서 드림머신을 통한 꿈의 공유는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라고 설명하죠. 이외에도 혈관에 적절하게 혼합한 약물을 적당량 만큼만 주사하는 약사나 꿈 속의 세계를 설계하고 구현하는 건축가가 있는 등 굉장히 구체적이고 전문화된 작업으로 설정되어 있어요. 놀란 감독은 <인셉션>에서 꿈 잠입을 굉장히 과학적인 메커니즘으로 보여주고자 노력합니다. 

 

그림 5

<그림 5. 꿈 도둑질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계장치, 드림머신.>

 

기린: 그리고 그 과학을 영화 내내 설명하는게 코브라는 캐릭터죠. 코브는 영화 시작 즈음 사이토의 꿈에 잠입해서 정보를 캐내는 장면에서부터 세계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 본격적인 꿈 세계의 설명은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 분)라는 새로운 건축가를 영입하고 나서 신입 오리엔테이션 교육처럼 진행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관객들에게도 설명하죠.

곰: 제가 고등학생 때 인셉션을 봤던 것 같은데, 이번에 다시 보면서 정말 뼈저리게 느꼈던게 있어요. 코브가 정말 정말 엄청난 민폐 캐릭터라는 거에요. 이 영화의 모든 문제는 코브 때문에 일어나고, 코브 때문에 모두가 위기에 빠지고,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이 미궁으로 빠지는 모든 상황이 코브로부터 비롯돼요. 코브가 절대 소통하지 않고 지 맘대로 밀어 붙이는 최악의 리더이기 때문이죠. 인셉션을 향한 개인적 탐구욕과 집착,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죄책감에 사로잡힌 캐릭터에요. 이거 완전 매드 사이언티스트 아닙니까?

기린: 맞아요, 코브는 작품 안에서 과학자와 비슷한 행동을 보여주는데요. 우선 코브의 전공 분야는 무의식과 꿈의 세계이고, 드림머신과 약물이라는 실험도구를 다루고, 인셉션이라고 하는 궁극의 목표를 가지고 있죠. 아내 맬(마리옹 꼬띠아르 분)과 함께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코브는 긴 시간에 걸쳐 끝없는 실험을 반복합니다. 코브가 가지고 있는 지식도 대부분 맬과 무의식 세계에서 수십 간 실험하면서 얻었어요. 그러다 무의식 세계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코브는 맬에게 인셉션을 하죠.

곰: 그런데 코브의 무리한 인셉션 때문에 이미 맬이 사망했잖아요? 코브에게 인셉션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로서 가지고 있는 하나의 숙원 사업이에요. ‘어쩌다 성공했는데, 아내가 부작용으로 죽어버렸다. 이번에는 더 완벽히 하고야 말거야’, 뭐 이런거죠. 코브가 피셔(킬리언 머피 분)에게 시도하는 그의 두 번째 인셉션은 이런 마음가짐이었다고 생각해요. 

기린: 대기업 회장 아들에게 자기 아버지 기업을 해체하라는 인셉션을 해놓고 자기는 자식들을 만나러 가는 게 대체 뭔가요! 생각할수록 화가 나요.

곰: 코브가 영화 속에서 일련의 민폐를 통해 보이는 그 집요한 탐구욕이 누구와 비슷한 것 같지 않은가요? <인터스텔라>의 쿠퍼 부녀와 닮지 않았나요? 그저 이번에는 지구를 구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운명을 구하려는 발버둥이란 차이죠.

기린: 그렇네요. 저도 이번에 보면서 다시 느낀 것이 있는데, 바로 맬이라는 캐릭터에 관한 거에요. 곰 군이 언급해준대로 그녀는 코브의 인셉션에 희생된 인물이죠. 코브가 과거에 인셉션을 통해 심은 생각 때문에 맬은 현실 세계에서 자살에 이르게 돼요.

 

그림 6

<그림 6. 코브의 인셉션으로 자살에 이르게 된 아내 맬은 코브의 무의식 속에서 잔인하고 난폭하게 그려진다.>

 

곰: 맬은 분명 코브가 만들어낸 피해자에요. 코브가 직접 그녀를 죽이지 않았더라도 코브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맬의 무의식을 조작해버립니다. 하지만 코브가 성공시켰던 첫 인셉션, 배우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코브의 이 행위는 <인셉션>의 서사에서 코브가 벗어나야할 과거로 그려질 뿐이에요. 코브는 반성보다 과오를 지우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야할 캐릭터로만 그려집니다. 그런 코브의 여정에서 맬은 피해자보다는 오히려 코브의 여정을 방해하는 가해자로 그려져요. 정말 악의적인 여성 혐오적 설정이에요. 영화에서 접할 수 있는 맬의 모습은 사실 실제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 코브의 무의식에 투영된 이미지에 지나지 않잖아요?

기린: 맞아요, 그러니까 맬은 코브의 인셉션을 위한 집착과 탐구욕에 희생된 것이죠. 곰 군이 말한대로 문제는 코브가 영화에서 매우 억울한 캐릭터로 그려진다는 겁니다. 그의 무의식 속에서 맬은 매우 폭력적으로 투영됩니다. 그래서 맬은 나쁜 여자고, 코브가 억울하고 착한 아빠다, 라는 뉘앙스가 영화 내내 짙게 풍기죠.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부분이에요.

곰: 희생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마지막으로 탐구욕과 희생에 관 영화인 <프레스티지> 얘기를 해볼까요?

기린: 좋아요, <프레스티지>의 줄거리를 정리해주세요.

곰: <프레스티지>는 마술에 대한 열정과 야망이 넘치는 두 청년 마술사의 이야기에요. 보든(크리스찬 베일 분)과 앤지어(휴 잭맨 분)는 나이 든 마술사의 조수 역할로 시작하죠. 그런데 마술 도중 보든의 실수로 앤지어의 아내가 죽는 사고가 발생해요. 앤지어는 그 이후 보든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죠. 

기린: 이후 앤지어와 보든은 서로 물고 또 물어 뜯는 경쟁극을 펼치죠. 이 경쟁 서사에서 중요한 마술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순간이동’ 마술인데, 앤지어는 보든의 완벽한 순간이동 마술을 넘어서기 위해 은둔 과학자 테슬라(데이빗 보위 분)를 찾아갑니다. 앤지어는 테슬라가 만들어준 전기 기계 장치를 통해 완벽한 순간이동 마술을 선보입니다.

 

그림 7

<그림 7. 순간이동 마술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계장치. 테슬라가 발명했다.>

 

곰: 그렇게 복수에 성공한 듯 보였던 앤지어는 보든을 감옥에 보내고 안심했지만 사실 보든은 쌍둥이었죠. 그래서 앤지어는 감옥에 가지 않은 나머지 쌍둥이 보든에게 총을 맞고 죽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나요. 근데 여기서 무슨 과학 얘기가 있나요, 기린 형?

 

“<프레스티지>에서는 마술사의 영역을 벗어난, 마법을 이야기해요. 마술 같이 관객을 속이는 트릭이 아니라, 정말로 실제로 일어나는 말도 안되는 현상을 마법이라고 얘기하죠. … 궁극의 마술은 과학이 만드는 현실이에요.”

 

기린: <프레스티지>에서는 마술사의 영역을 벗어난 마법을 이야기해요. 마술 같이 관객을 속이는 트릭이 아니라, 정말로 실제로 일어나는 말도 안되는 현상을 마법이라고 얘기하죠. 그리고 이 마법 테슬라의 기계가 가능케한, 앤지어의 궁극의 순간이동 기술입니다. 궁극의 마술은 과학이 만드는 현실이에요.

곰: 맞아요, 마술쟁이들 얘긴데 갑자기 테슬라랑 에디슨 얘기가 나와서 뭔가 했어요. <프레스티지>에서 과학의 영역, 즉 마법사의 영역은 마술쟁이가 끊임 없이 추구해야 할 목표로 그려져요. 정말로 완벽한 속임수란 과학적 설계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영화 속에서 앤지어는 이를 강박적으로 찾아 나섭니다.

기린: 테슬라와 앤지어의 대화에서 이 두 사람이 합의에 이르는 지점이 바로 그 부분이죠.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커다란 희생이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거에요. 이 희생의 키워드는 <프레스티지>에서 지속적으로 그려집니다. 마술사 보든과 앤지어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마술, 즉 마법을 행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인간들이에요.

곰: 그리고 역시나 그 희생의 과정이 영화 속에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앤지어 아내의 죽음, 보든 아내의 죽음, 보든 쌍둥이 형제의 죽음 등, 주변 사람들이 꾸준히 희생 됩니다. 거기에 더불어 앤지어도 보든도 각자의 방식으로 순간이동 마술을 위해 궁극의 희생을 하지요. 보든은 쌍둥이 형제가 마치 한 명의 인물인 것처럼 평생을 연기하면서 두 명의 인생을 하나로 구겨넣었어요. 그리고 앤지어는 테슬라의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의 복제 인간을 매번 물 속에 익사 시켜야 합니다.

 

그림 8

<그림 8. 희생양이 된 앤지어의 아내(좌)와 보든의 아내(우)>

 

기린: 놀란은 여기서 마술의 이상향에 과학을 연결하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과학자인 테슬라를 서사에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마술처럼 과학 또한 막대한 희생이 따르고, 그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뤄내야 하는 것처럼 설명해요.

곰: 결국 주인공 마술사들의 집요한 욕심과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모든 것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테슬라라는 천재 과학자가 부여하는 과학의 이미지를 사용한거죠. 무언가 위대한 성과를 위해서는 으레 그런 희생이 따른다. 주인공의 간절함을 위해 놀란은 이번에도 여자들을 죽이네요.

기린: 이쯤 되면 놀란이 여성 캐릭터를 못살게 구는게 거의 과학이라고 봐도 되겠어요. 맞아요, <프레스티지>에서 과학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성취해야 하는 절대적인 가치로 그려집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무모한 도전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의 이미지를 조작했어요. 현실 세계에서의 과학은 그래서는 안되죠.

곰: 네, 이렇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총 세 편을 정리해 봤는데요. 세 영화 모두에서 과학이 중점적인 소재이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기린: <인터스텔라>, <인셉션>, 그리고 <프레스티지> 모두에서 놀란 감독은 과학을 주인공이 강박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상으로 잡아두는 것 같아요. 그 이상은 새로운 영역으로의 끝없는 탐구와 도전이에요. 주인공은 눈 앞에 해결해야 할 문제를 끊임없이 붙잡고 갖은 노력을 기울여 결국엔 문제를 해결해냅니다.

곰: 관객으로서 우리는 이 과정을 보면서 주인공에 이입하여 그를 응원하게 되고 스릴 넘치는 액션 시퀀스와 감동적인 연기, 웅장한 음악, 그리고 잘 설계된 교차편집 따위에 매료되죠. 하지만 주인공이 추구하는 이상을 위해 주인공의 주변은 어떻게 되나요? 상처받고, 버려지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위대한 가치를 위한 자잘한 희생으로 그려지는 거에요.

 

“놀란은 과학을 주인공을 포장하는데 사용합니다. 과학의 멋지고 예쁜 부분만을 골라서 주인공을 포장하는 데 써버리죠. 이 과정에서 과학의 어두운 부분들은 다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겨지는 것에 가까워요.”

 

기린: 놀란은 과학을 주인공을 포장하는데 사용합니다. 과학의 멋지고 예쁜 부분만을 골라서 주인공을 포장하는 데 써버리죠. 이 과정에서 과학의 어두운 부분들은 다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겨지는 것에 가까워요. 

곰: <인터스텔라>에서 우주 과학은 인류를 구하는 마지막 보루로 그려지지만, 이를 견인하는 엘리트주의 문제는 딱히 드러나지 않아요. <인셉션>에서도 코브가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인셉션을 하려는 의지는 아름답게 그려지지만 그 희생과 여파에 대해서는 역시 표현되지 않죠. 그리고 <프레스티지>에서는 위대한 성취를 위한 희생이 당연시되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기린: 이번에 놀란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지금까지 속아 왔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분명 놀란은 영화를 굉장히 잘 만드는 감독이고, 장르 속에 자기만의 이야기를 잘 녹여내는 각본을 쓰고, 세련된 편집을 하는 명장이에요.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기있는 감독이고, 티켓파워도 충만하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문제들이 산적한 영화들을 찍었네요.

곰: 저도 영화관에서 개봉작을 봤을 때는 오늘 얘기한 것들에 대해서 바로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 현란한 교차편집과 시간축 짜집기를 거쳐 클라이맥스의 한스 짐머 음악까지 합쳐지면 관객은 감쪽같이 속을 수 밖에 없죠.

기린: 맞아요, 노트북 앞에 앉아서 장면 단위로 끊어가며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영화들이에요.

곰: <프레스티지>에서 놀란의 영화 철학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놀란은 영화를 마술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마술사라고 여기고 있어요. 관객을 잠시라도 감쪽 같이 속이는게 놀란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이고, 그렇게 속아넘어간 관객이 영화가 끝나고 올라오는 크레딧을 멍하니 쳐다보게 되면 놀란은 매우 좋아할 것 같아요.

기린: 놀란의 차기작에서 또다시 과학이 등장한다면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도 좋겠네요. 그러면 우린 답을 찾을 거에요, 늘 그랬듯이.

곰: 근데 우리 다음 호에서도 만날 수 있는건가요, 편집장님?

 

그림 9

<그림 9. 포장의 과학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여전히 잘생겼다.>

 


읽을거리

읽을거리 이미지
Whi
tey on Mars: Elon Musk and the rise of Silicon Valley’s strange trickle-down science

(링크 : https://aeon.co/amp/essays/is-a-mission-to-mars-morally-defensible-given-todays-real-needs)

<인터스텔라>의 NASA가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미래를 머나먼 우주에서 찾는 사람들은 비단 영화 속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엘론 머스크는 2016년에 인류의 미래를 위해 화성에 식민지를 세우겠다는 중대 발표를 해 화제가 되었죠. 지구의 문제와 맞서기 보다 우주 어딘가에 새로운 희망을 거는게 과연 옳은 일인가 질문을 던지는 기사가 여기 있습니다. <인터스텔라>에서 우주 과학적 향수를 제공했던 아폴로 미션의 시대에 제기되었던 의문들을 21세기의 엘론 머스크에게 다시 던져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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