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코프스키의 통조림

네월


6년 전 이맘때에 신사동의 한 음악감상실을 대관해 지인들과 하루 종일 음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세월이 세월이니 만큼 그때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단 하나의 사건만큼은 뚜렷하게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고 예정된 막곡을 틀자 적당히 옆에서 나름의 업무를 보시던 사장님께서 갑자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나름 거금을 들여 고가의 음향시설을 사용하는 마당이니 우리에게 연주만큼 중요한 사항은 음질이었고, 따라서 각자 연주 수준이 보장되는 범위 내에서 고음질로 녹음된 음반들을 몇 장씩 구비해 들은 터였다. 나름 고인물이셨을 법한 사장님이 하루 종일 옆에서 묵묵히 듣다가 종내에 이런 말씀을 하실 정도면 사실 오늘 음질에 있어서의 승자가 누군지는 판가름이 났다고 해도 무방한 셈.

영광의 주인공은 버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1943)>이었다. 물론 이 곡이 좋은 음질을 필요로 하는 곡임은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관현악곡은 또 무엇이 있을지? 차라리 나는 이 연주의 지휘자가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임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연주가 1960년에 녹음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스토코프스키는 영국인이지만 한평생을 미국의 지휘자로 종사하면서 그의 수족인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소위 ‘스토키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위대한 지휘자가 한둘이겠냐마는 스토코프스키가 특별한 이유를 꼽자면 그가 오케스트라 녹음의 여명부터 있어온, 녹음 기술의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흐, 바그너, 무소르그스키 등의 곡을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편곡하던 그는 본래 음향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또한 왕성한 사람이었다.

“녹음으로 스토코프스키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기록의 우수성과 다른 관현악단과 비교되는 음색의 웅장함에 대해 많은 사람이 구술해왔다. (중략) 문제의 진실은 스토코프스키가 음향의 녹음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다른 지휘자보다 오케스트라의 음색에 더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조탁하는 방법, 그것을 부리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녹음에 기록하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1]

 

전기(電氣) 녹음 방식은 오늘날까지 고급형 마이크로 쓰이는 콘덴서 마이크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녹음의 대역폭이나 선명도뿐만 아니라, 관련 업무의 양식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이는 음원에 공간감을 가능케 한 스테레오 방식으로 판도가 넘어간 때보다 더 대단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종전의 어쿠스틱 녹음 현장의 사진을 보면 어떻게든 자신의 악기가 녹음에 잡히기 위해 연주자들이 어쿠스틱 호른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연주할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에 스트로(Stroh)를 붙여서 연주를 한다.

그림 1

<그림 1> 빅터 사의 오케스트라가 어쿠스틱 녹음을 하고 있다 

그림 2

<그림 2> 스트로 바이올린 

이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은 어쿠스틱 녹음으로 제대로 된 연주를 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실제로 스토코프스키는 1917년부터 빅터 사 아래 어쿠스틱 녹음을 진행했지만 450여 회 정도의 녹음 중 실제로 음반으로 발매하도록 승인한 녹음은 15% 정도에 불과하다. 60년 뒤 스토코프스키는 이에 대해 술회하며 “그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녹음에 대한 견해에 마음을 돌리지는 않았다. 난 더 잘 만들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우리가 세계 도처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이 가지는 웅변을 전달하고 싶었다”라 하였다.

이는 물론 어쿠스틱 녹음으로 ‘스토키 사운드’를 담기에 무리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겠지만,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이 기간 동안 스토코프스키는 최선의 결과물을 위해 악단의 배치를 이리저리 바꾸어 보았을 터이고, 이런 시기가 이후의 “스토키 사운드”에 밑거름이 되었으리란 추측도 가능하다. 이 추측이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은데, 예를 들어 어쿠스틱 녹음은 팀파니 같은 타악기의 음형을 녹음하는 일이 어렵기에 고심 끝에 팀파니를 해체하고 저음 목관악기인 콘트라바순으로 대체한다. 이런 음향학적 실험들은 이후에 각 악기를 모두 녹음할 기술적 여건이 마련된 이후에도 계속된다.

빅터 사와 스토코프스키는 1925년부터 전기 녹음을 시작하게 된다. 전기 녹음은 기존 어쿠스틱 녹음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음질이 가장 큰 장점이겠지만 연주하는 입장에서 가장 크게 다가온 장점은 이제 호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연주하지 않고 정규 연주회와 같이 넓은 공간배치로 연주해도 콘덴서 마이크가 잘 녹음해준다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스토코프스키가 가장 관심을 보였던 건 스튜디오 그 자체였다. 녹음 기사들의 작업에 상관없이 본분인 지휘에 충실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마이크와 악단의 배치, 음향 반사판 등에 흥미를 보였고, 이 순간 스토코프스키의 음악관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첫해는 어쿠스틱 녹음의 과도기였을 따름이다. 스토코프스키 본인이나 엔지니어들에게 당시 전기 녹음은 그저 대역폭이 넓은 신기술일 뿐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세계 최초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전기 녹음으로 녹음하는 위업을 달성하지만, 여전히 팀파니를 콘트라바순으로 대체하는 등 이전 어쿠스틱 녹음에서 행해진 구습 또한 그대로 답습한다. 하지만 그들도 그럴 필요가 없음을 곧바로 인식하게 되었고, 1926년 6월 10일 비로소 110명의 온전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악기를 대체하지 않고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를 그대로 연주하면서 최초의 ‘스토키 사운드’를 녹음한다. 당시 이 녹음은 모든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5개월 뒤에 녹음한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1892)>은 어찌나 정성을 들였는지 1934년에 이루어진 재녹음보다도 음질이 더 우수하다.

 

스토코프스키의 행보는 녹음기술의 행보와도 일치한다. 스토코프스키가 한정된 녹음기술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벨 연구소는 진공관을 발명한 해럴드 D. 아널드를 연구소장으로 임명한다. 그를 주축으로 벨 연구소는 왁스층에 흑연을 입혀서 마스터를 기록하는 종래의 방법이 흑연으로 인한 잡음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1931년 진공 챔버에서 왁스층에 금 박막을 1분자 두께만큼 까는 실험에 성공하여 대역폭을 6kHz에서 13kHz까지[2] 올린다. 이 무렵 벨 연구소는 스토코프스키와 만난다. 그리고 거의 만나자마자 두 대표자는 합심하게 되고 스토코프스키는 아널드에게 아예 음악 아카데미 지하에 실험실을 설비해 놓고, 비밀 보장된 음향 실험을 무제한 하도록 허가한다.

로버트 맥긴 교수는 아널드가 세 가지를 예측했기에 이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평했다.[3]

첫째로 더 넓은 무선주파수의 대역폭과 더 높은 음량의 라디오 방송이 결과적으로 가능해질 테니 벨 연구소는 이에 미리 대응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FM 방송의 등장으로 곧 증명되었다.

둘째로 무선으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방대한 정보량의 음질은 라디오와 별개의 새로운 시장을 만들 것이라 보았다. 당시 이 생각은 도박에 가까웠는데 1930년 경제 대공황이 바로 그 이유이다. 전기 녹음의 기적 같은 성공으로 연 3천만 장을 우습게 팔아치우던 빅터 레코드는 1930년 판매량이 절반으로 감소했고, 2년 뒤에는 고작 3백만 장밖에 팔지 못한다. 따라서 새로운 시장 운운할 사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예측은 보기 좋게 적중해 곧바로 판매량은 상승하고 정확히 10년 뒤인 1940년에는 이전의 판매량인 연 3천만 장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다음 해인 1941년에는 연 5,600만 장을 이룩한다.[4]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음악을 통해 문화를 전달할 기회를 보았다. 앞서 이유보다는 다소 덜 계산적인 까닭이지만 양질의 음악에 대한 보다 더 광범위한 감상의 확대가 곧 시장의 확대를 의미한다고 보았던 아널드는 심지어 “이 과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점으로 고려되어야 한다”[5]라고까지 이야기했다.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에고이스트인 스토코프스키 역시 이 만남에서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겠지만 그도 역시 음악을 사랑하는 지휘자임은 분명했고 서로 간에 이런 순수한 목적이 전무했다면 과연 이런 만남이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실제로 스토코프스키는 1932년 연구소의 학자들 앞에서 즉흥적으로 연설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양질의 음악을 전달하고, 투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가능케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현재, 그것들은 불완전하고 제한적이지만, 우리가 새로운 지평선, 새로운 가능성을 연구함에 따라,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질 테지요.”[6]

그는 이 연설 당시 이미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많은 구상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뒤이은 다음의 연설을 보면 이는 더욱 명백하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전기적 장치로 우리가 원하는 화음을 강화하고 어떤 음색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장치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다른 게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기존 음보다 기이한 음을 더 강렬하게 만들어 완전히 새로운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7]

녹음은 현장의 연주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야 한다고 믿는 근본주의자들에게 이 연설은 큰 충격이었고, 스토코프스키의 이러한 구상은 아직 녹음 기술의 세례를 받지 못한 기존의 지휘자들에게 상상조차 힘든 견해였을 것이다. 이런 인식은 토스카니니를 비롯한 지휘자들에게 스토코프스키화(化)라는 식의 비아냥을 듣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심지어 지휘자 첼리비다케는 음반을 “통조림 음악”이라 멸시했다.[8] 하지만 스토코프스키가 보여준 이러한 발상을 통해 녹음은 실연의 열등한 복제물이 아닌 독자적인 영역의 예술 행위로 확대될 수 있게 되었고, 더 넓은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스토코프스키의 상상력과 벨 연구소의 기술력이 극적으로 접목한 결과물이 바로 스테레오 음향이었다. 이미 그들은 1932년부터 실험적이고 간헐적으로 “제대로 된[9]” 스테레오 녹음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자연스러운 음의 재현을 위해 어느 정도의 대역폭을 필요로 하는지 분석을 완료한 상태였다. 당시 연구 책임자로 일하던 저명한 물리학자 하비 플레처는 더 자연스러운 녹음을 위해 마이크를 양 뺨에 부착한 백화점 마네킹을 관중석에 앉혀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녹음하기도 했다. 오늘날 ASMR의 녹음 등을 위해 흔히 쓰이는 더미 헤드(Dummy Head)는 이미 85년도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단지 양호한 녹음만으로는 부족했다. 제대로 된 스테레오 음향을 위해서는 당연히 제대로 된 출력 장치가 필요했다. 여러 실험 끝에 무대음향의 방향성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스피커(좌, 우, 중앙)를 놓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1933년 4월 27일 저녁, 워싱턴 DC의 콘서트홀인 ‘Constitution Hall’에는 이미 대통령 고문, 상원의원, 의회 대표 등의 고위 관계자들로 구성된 청중들이 모여 있었다. 무대에는 세 대의 확성기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윽고 무대에는 두 명의 잡역부가 망치와 톱으로 상자를 만드는 ‘소리’가 나왔다. 청중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잡역부들의 ‘소리’를 시선으로 쫓았지만 실제로 무대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소프라노의 아리아 등이 이런 식으로 나와서 청중들의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걸작은 쇼의 마지막이었다. 불이 꺼진 무대에서 두 명의 트럼펫 연주자가 서로 재즈 릭(lick)을 연주하며 대결하는 상황을 듣던 청중들은 마침내 불이 켜지고서야 무대에는 단 한 명의 연주자만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명은 어디 있던 것일까? 230km 떨어진 필라델피아의 연주장에. 청중들은 실시간으로 양 주(州)간의 음향 전송을 지켜본 것이다.

그림 3

<그림 3> 스테레오 시연 당시 플레처와 함께 벨 연구소의 음향 재생 장비를 조작하고 있는 스토코프스키(왼쪽) 

7년 뒤 카네기 홀에서 스토코프스키는 확성기를 추가해 음량을 100dB 가까이 올린 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마치 2천 명의 연주자가 동시에 연주하는 양 터진 대음량에 카네기 홀은 흔들렸고, 스토코프스키가 꿈꿔 온 “새로운 가능성”의 물꼬를 텄다.

 

이후 스토코프스키는 디즈니 사와 함께 <판타지아 (1940)> 녹음을 진행하고 말년까지 실험적인 첨단 기술에 기꺼이 참여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1960년 녹음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1944)>은 영화 필름으로 사용되는 35mm 와이드 테이프에 녹음되었는데 당시 기술로는 이렇게 녹음된 정보량을 제대로 재생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었다. 2000년에 DVD-오디오 규격이 발표되고 나서야 이 고음질 녹음이 온전히 재생되었으니 사실상 21세기에 나올 법한 기술을 써먹은 셈이다.

몇 년 뒤에는 데카 레이블과 함께 페이즈 포(Phase 4) 규격으로 녹음을 진행했는데 이 방식의 골자는 오케스트라의 악기군을 20개로 묶어 각 묶음마다 채널을 할당해 총 20채널로 연주를 녹음하고, 이후 이를 4채널로 압축하여 재생 매체에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당시 쓰이던 재생 매체인 LP에는 스테레오, 즉 2채널까지만 녹음되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4채널 중 후방의 두 채널은 초고주파의 음역대로 변환하여 나머지 채널에 함께 기록한 후 전용 카트리지를 통해 가청 주파수대로 재변환하여 본래의 4채널로 재생하는 원리를 차용했다. 멀티 채널 역시 영화사(史)에 있어 1970년에 개발되어 90년대에 5.1채널로 가정용 DVD를 통해 보급되었으니 이 역시 오버테크놀러지(over-technology) 비슷한 꼴일 것이다. 비록 많은 연주가 다소 과장된 음향으로 지금은 잊혔지만 스토코프스키가 제작한 대부분의 연주는, 현재도 따라하기 힘든 홍수처럼 쏟아지는 음향을 자랑하며, 특히 1964년에 녹음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 (1888)>는 여전히 동곡의 가장 대표적인 음반으로 손꼽힌다.

 

이제는 당연하게 디지털로 모든 녹음을 진행하기에, 현재 시점에서 스토코프스키의 혁신이 더 이상 충격은 아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낯익은 땅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경작된 근래의 과실이 스토코프스키 이상의 혁신을 담보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1931-32년 시즌에 현장 녹음된 그들의 녹음이 40년대에 정규 발매된 음반의 음질을 상회하듯이[10], 아직도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1943)> 녹음의 5악장 총주[11]에서 스토코프스키의 녹음만큼 각 악기군이 명확히 들리는 연주는 듣지 못했다. 그런 건으로 생각해본다면 스토코프스키의 통조림은 꽤 유통기한이 긴 모양이고 고백하자면 식당에서 갓 나온 음식보다도 맛있다.

빈말로라도 현대의 기술이 스토코프스키가 누렸던 기술보다 떨어진다고 말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직도 반세기 전의 성과가 그토록 빛나 보이는 것일까? 단순히 복고주의에 젖어서?

오늘날 음반사(社)에서 예술가의 영역과 기술자의 영역이 ‘예우를 갖춰’ 거의 독립되어있는 구조를 떠올려볼 때, 아마도 스토코프스키와 벨 연구소가 협업한 일은 그야말로 예술과 기술이 서로를 존중하면서(단순히 상대의 의의를 인정하는 정도를 넘어 서로가 서로에게 감탄하여 탐구하여 부단한 상호작용을 이루어) 지극히 공익적인 목표를 향해 함께 달린 극히 드문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공익적인 목표”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대중들에게 새로움을 보여준, 아니 대중들이 새로움을 보도록 세상을 조성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혁신’의 참된 정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들을거리

읽을거리 표지 1벨러 버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1944)>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EVERAST, 1960 

이 복잡하고 정교한 걸작을 스토코프스키는 완벽하게 교통정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낱낱이 지켜볼 수 있는 선명한 유리창도 여기에 있다. 

 

 

읽을거리 표지 2-1읽을거리 표지 2-2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셰에라자드(1888)>,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Decca/Cala, 1964 

phase 4 레코딩의 정수, 하지만 새로운 기술로 대중들을 놀라게 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다소 무리하여 손해를 본 면이 있다. 이를 Cala에서 리마스터링하여 드디어 제대로 된 연주를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메타-기술이란 관점으로 보면 재미있다. 

 


[1] Charles O’Connell (1947), The Other Side of the Record, New York: Alfred A. Knopf, p. 297.

[2] 일반적으로 각 악기의 소리는 6kHz에서 충분히 판별이 가능하지만 13kHz까지 녹음이 가능해지면서 트라이앵글등의 고음역이나 기존 악기의 배음 등을 더욱 선명히 듣게 되었다

[3] Robert E. Mcginn (1983), “Stokowski and the Bell Telephone Laboratories: Collaboration in the Development of High-Fidelity Sound Reproduction”, Technology and Culture 24, no. 1, pp. 49-50.

[4] “Leopold Stokowski – Philadelphia Orchestra Recordings of 1931”, https://goo.gl/1hhCSU

[5] Ibid.

[6] Leopold Stokowski (1932), “New Horizons in Music”, The Journal of the Acoustical Society of America4, no. 11, p. 11.

[7] Ibid., p. 13

[8] 중앙선데이(2013. 06. 16), “’통조림 음악’ 결사 반대 … 음반 취입 거부”,https://news.joins.com/article/11812778

[9] 녹음 과정 중, 다른 위치의 마이크로 백업 녹음을 진행한 경우 마스터 녹음과 백업 녹음이 다른 위상차를 가지므로 나중에 “Accidental Stereo”라는 식으로 발매되는 경우가 있다.“Accidental Stereo: Reconstructed Recordings, 1929-1933–most of the classical recordings where the original 78 matches up with a standby recording made at the same time from another mic”, goo.gl/GTX9UH

[10] McGinn (1983), p.51

[11] Tutti. 오케스트라곡이나 합창에서 다같이 연주하는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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