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로가 가치 있는 것은

익명의 대학원생


 

연구가 여행이라면, 우리 대학원 같은 융합 학과에서 하는 연구는 내일로 여행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로란 일정 기간 동안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등의 열차를 마음껏 이용하며 여행할 수 있는 자유여행 패스다. 어떤 열차를 탈지, 어디서 타고 내릴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여러 열차를 한꺼번에 이용할 수도 있고, 기이한 조합의 여행지들을 다양하게 가볼 수 있다. 전통적인 여행코스를 밟는 대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모험’을 하는 셈이다.

학부생 시절, 혼자 내일로 여행을 갔다. 청춘, 자유, 여행, 이런 단어들에 이끌려 표 한 장 달랑 끊고 길을 나섰다. 목표는 이랬다. 여럿이서 미리 계획하고 갔을 때 더 재미있을 법한 것들은 가능한 배제하고, 홀로 가는 내일로 여행에서만 즐길 수 있는 것들을 하기. 여름 냄새로 꽉 찬 무궁화호에 대충 쪼그려 있다가 아무 역에서나 내렸다. 경치 좋은 곳으로 걷다가 날씨가 선선하면 길거리 음식을 맛보고, 에어컨 바람을 쐬고 싶으면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사다 먹었다. 유명한 볼거리나 즐길 거리는 일부러 멀리했다. 대신 온종일 내키는 대로 걸어 다니면서, 우연히 그때그때 만난 낯선 장소들을 느긋이 감상하는 법을 배웠다. 여행은 남한을 반 정도 둘렀을 때 끝이 났고, 기숙사로 복귀한 후에는 공부와 알바를 반복하는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이 여행에서 나는, 무거운 일상일지라도 한바탕 길을 잃고 나면 꽤 근사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림 1

<그림 1> 내일로 여행길, 열차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대학원에 갓 입학했을 무렵, 나는 내일로 열차에 처음 올라탔을 때처럼 신이 나 있었다. 이 열차가 어디로 가게 될까, 어떤 새로운 것들을 배우게 될까, 하고 한동안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열차라는 건 덜커덩거리며 질주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석사 첫 학기 수강 신청을 하려고 보니 내가 들을 수 있는 과목들이 전부 폐강되었고, 교수님들과의 면담 끝에 신입생 수강 금지가 원칙인 한 수업에 얼떨결에 예외적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수업은 유익했지만, 학문을 하면서, 그것도 석사 새내기 과정에서 겪게 될 줄은 몰랐던 방황, 계획의 어긋남, 길 잃음 같은 것들을 갑작스레 맞닥뜨려 다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나는 이 정도의 방황은 자주 있는 일이며, 어쩌면 그것이 이곳의 정체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을 확신하게 된 것은 논문 학기에 처음으로 지도교수님 수업을 수강하게 되면서였다. 나는 석사학위과정 동안에 총 9과목을 수강했는데, 여러 사정으로 인해 계획이 틀어져 정작 지도교수님 수업은 마지막 학기에 학위논문 작성과 병행하며 들어야 했던 터였다. 우리 대학원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곳으로서 수업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 다른 학문적 배경을 지닌 교수님들이 모인 융합 학과인지라, 석사학위과정 동안 본인의 지도교수님이나 지도교수님의 전공 분야 수업을 여러 개 듣기는 쉽지 않다. 한 수업이 다른 수업에 도움이 되거나 연결되는 일은 흔치 않았고, 그 수업들이 내가 학위논문을 써야 하는 분야이자 내 지도교수님의 전공 분야와 결이 맞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 하지만, 사실 교수가 학문적으로 훌륭하든가, 혹은 수업에 진지하게 임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해도 좋은 수업이라던데, 정말 감사하게도 우리 대학원 수업 상당수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충족했다.[1] 다시 말해 어떤 수업을 듣더라도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도교수님의 수업을 들은 경험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고, 이러한 나의 안이함은 논문 학기에 나를 괴롭힌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논문 학기 전까지, 부끄럽지만 나는 지도교수님의 논문을 읽을 수 없었다. 논문을 소리 내어 ‘읽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첫 문단에 언급되는 학자들이 누구인지, 쏟아지는 전문 용어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 한 번은 지도교수님께 슬쩍 말씀드렸더니 굳이 내 논문을 읽을 필요는 없다, 하고 진지하게 대답하신 적이 있다. 우리 대학원은 당신과 똑같은 종류의 학자를 기르는 곳이 아닌 학제 간 무언가를 하기 위한 곳이며, 따라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해보면 될 뿐 꼭 당신의 세부 전공에 몰두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교수님의 말씀은 굉장히 감사하고 또 현명한 것이었다. 다만 그때 그 말씀을 영민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논문 읽는 것을 바로 포기해 버린 것이 종종 후회되곤 했다.

그 논문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두어 학기가 흐른 후였다. 흔히 대학원생이 된다는 것은 해당 학문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마지막 학기에 지도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며 비로소 나의 모국어를 익힐 수 있었다. 그 수업은 내가 어느 곳에 있는지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도교수님의 논문과 그 수업은 서로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 차수가 진행됨에 따라 나는 교수님의 논문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수업 자체가 직접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수업을 통해 나는 내가 어디에 발을 딛고 서 있는지 알 수 있었고, 어떤 학자를 만나려면 무슨 길로 가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면 어떤 종류의 풍경이 나오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때는 논문 학기 한복판에 있던 시기였다. 시간은 무서운 속도로 흐르고 있었고, 내 손에 쥐여 있던 건 마무리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실상은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던 학위논문 초고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학위논문과 수업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논문 작성 중에 했던 생각들은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며, 수업에서 배운 것들은 논문 작성에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효과가 좋은 만큼 몸은 빠르게 안 좋아졌다. 안 그래도 학위과정을 밟으면서 축났던 몸이 급격히 나빠져, 어느 날은 아침부터 어지러워하다가 쓰러지고는 잠깐이지만 응급실 신세를 지기도 했다. 아마 그 무렵에 부쩍 아쉬움이 늘어났던 것 같다. 미리 건강관리를 했다면 덜 고생하지 않았을까, 미리 수업을 들었다면 상황이 한결 낫지 않았을까, 같은 수많은 부질없는 ‘~했다면 ~했을까’ 들로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것은 그간 흘려보낸 경험들이었다. 이전에는 우리 대학원에서 여러 종류의 수업들을 듣는 것이 마치 가야 할 길을 못 찾고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가 내 모국어를 좀 더 일찍 깨쳤더라면. 이 수업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내 분야의 전공 지식이, 진작에 내 배경이고 내 일상이 되었더라면. 그랬다면, 다른 수업을 수강하며 얻었던, 하지만 내 언어로 다듬지 못해 그냥 흘려보냈던 다양한 경험들을 나름대로 조금 더 잘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한참을 아쉬워하다 문뜩, 이렇게 흘려보낸 경험들이 없었다면 내 전공을 탄탄히 공부하는 일상의 중요성을 아예 알 수조차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이 흘러 결과적으로 나는 대학원생들이 으레 그리하는 것처럼 건강을 잃고 석사학위를 얻게 되었다. 길을 잃고 방황하기를 거듭했던 지난 학위과정을 되돌아보면, 마치 내일로 여행을, 다만 조금 더 길고 버거운 내일로 여행을 다시 한번 다녀온 것 같은 감상이 든다. 내일로가 여러 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자유여행 패스이듯, 우리 대학원은 여러 갈래의 수업을 들으며 굉장히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는 융합 대학원이다. 어떤 모험을 하며 어떤 새로운 길을 발견할지 짐작할 수 없으며, 아마 그러한 예측불가함이 내일로와 우리 대학원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곳저곳을 혼란스럽게 돌아다녀야 하는 내일로 여행은 죽도 밥도 안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내일로가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을 무겁게 떠받치고 있는 일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을 꾸준히 살며 내 공간의 특징과 장점과 한계를 알고 있었기에, 내일로 여행에서 무심코 마주친 새 풍경이, 방황과 길 잃음이 가치 있을 수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보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당분간은 건강을 챙기며 일상에 충실히 임해볼까 한다. 무언가 심오한 일을 할 것은 아니고, 그저 나랑 비슷한 곳에 있는 다른 이들은 어떤 일상을 보내왔나 관찰하면서 조금 버겁더라도 그 일상을 조금씩 살아볼 계획이다. 지난날의 여행은 내게 묵직한 일상이 있기에 낯선 순간들이 더욱 근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일상의 길을 걷다 언젠가 튼튼해지면, 다시 길을 잃으러 떠나리라.


해볼거리

전국 편의점 투어

전국의 편의점들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편의점은 각 지역의 특색을 반영하는데, 예를 들어 전주 근방의 편의점에서는 수제초코파이를 파는 식이다. 전국을 도는 내일로 여행을 간다면 각 지역마다 편의점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자! 특히 저가에 여행을 가고 싶다면 유명한 맛집 투어를 하는 대신 편의점 맛집(?) 투어를 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1] 김민섭 (2015),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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