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과 데이터 센터: 인류세 시대에 지식 감각하기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석사과정

김동진

djkim1994@kaist.ac.kr


 

어떤 이들은 신을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나 더 큰 책이 있으니 창조된 세계 자체가 그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1]

 

들어가며

KAIST 서버실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캠퍼스의 정보망을 총괄하는 일종의 데이터 센터인 셈인데, 오래된 벽돌 건물에 숨어 있어 근처를 자주 지나다녔음에도 서버실이 거기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서버실은 최첨단 전자 장비와 이를 유지하기 위한 상쾌한 온/습도가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흥미로운 건 건물 외벽에 보이는 PVC 재질의 오래된 굴뚝이었다. 너무 조용하게 붙어있어 평소엔 저런 물건이 있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서버실 내부의 풍경을 떠올리자니 굴뚝의 예스러운 외모가 계속 눈에 띄었다. 서버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엇에 쓰이는 굴뚝일까. 서버실이 아니라 식당이 건물에 있었다면 어디선가 불을 썼을 테니 차라리 이해가 쉬웠겠다. 내게 이 굴뚝은 캠퍼스의 데이터보단 밥 냄새 나는 증기와 어울려 보이는 것이다. 나는 고민 끝에 이것을 일종의 사랑니로 여기게 되었다. 기능이 불필요해져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흔적기관 말이다.

내겐 오래된 헌책방 또한 사랑니 같은 존재다. 헌책방 다수가 변하는 도시의 압력에 기능이 접힌 채로 발길이 끊겨 소리 없이 사라지곤 하기 때문이다. 헌책방의 인상은 그곳의 공기에서 완성된다. 책방지기조차 그 수량과 출처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다양한 책이 한데 모여 각자의 색채와 향기로 헌책방을 채운다. 그곳에는 종이의 셀룰로스 섬유가 산화하며 만든 아몬드 향이 흥건하다. 여기에 잉크와 접착제의 냄새, 곰팡이, 그리고 공간을 두껍게 하는 먼지가 한데 모여 헌책방의 독특한 공기를 만든다. 방문객은 그 향긋함에 시간을 잊고 희미한 두통이 생길 때까지 헌책 더미를 하염없이 둘러보곤 한다. 이것을 곧 책이 주는 감각, 혹은 지식이 주는 감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림1

<그림 1> 서울 회현 지하상가의 헌책방 ‘클림트’[2]

이 글은 인류세의 지식을 다룬다. 인류세, 즉 지질학적 인류 시대라는 단어는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학술 지면에 등장했다. 이 단어에는 인류의 힘과 오만이 역사의 물장구에 그칠 것이 아니라, 지구가 사라지는 날까지 땅에 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녹아있다. 세(世)의 구체적인 진행을 가늠하기 위해 자연과학자는 땅이 머금게 된 방사능, 화석연료에 의해 늘어난 대기의 이산화탄소, 대양을 부유하는 플라스틱 등에 주목했다. 인문/사회과학자 역시 인류세를 시작한 우리의 전과를 고민하며 산업 문명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이를 통해 남아있는 미래까지 전망했다. 인류세라는 개념, 혹은 상황은 지성의 협업을 광범위하게 끌어내며, 다양한 종류의 지식이 만들어지는 것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나는 이러한 지식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을 넘어, 지식을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표현이 어색하게 들린다면, 지식과 감각의 연결고리가 잊힌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책’을 라이트모티프[3]로 사용하여 이 연결고리가 무엇이었고, 이것은 어떻게 잊히게 되었는지 묘사할 것이다. 책은 지식을 담아왔고 시대와 문명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이러한 변주는, 지식의 물질적 조건, 즉 지식을 생산·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원이 우리 감각의 지평에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특히 인류세의 지식이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지식 그 자체의 물질적 조건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일상에서부터 지식을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감각이 희미할 대로 희미해졌지만 말이다.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보기, 육체 없는 지식과 데이터 센터

책을 제작하는 과정은 고된 노동이었다.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 이전의 수도원으로 가보자. 가죽으로 종이를 만들고, 지식을 한 글자씩 새긴 다음, 장정을 마쳐 서고에 보관하는 과정은 모두 수행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책은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체(media)를 넘어, 오감을 자극하는 공예(art)이자, 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행위(practice)에 가까웠던 것 같다. 수도사는 필사본에 직접 삽화를 그려놓곤 했는데, 여기에는 세계의 감각을 지면에 정제하려는 야망이 보인다. 삽화는 지식, 혹은 신의 말씀을 도해하기 위해 제작되었지만, 때론 그 틀을 넘어 세계의 다양한 모습으로 페이지를 장식하기 위해 설계되기도 했다. 앞서 인용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는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환유다. 책이 세계를 담기에 우리는 그것을 읽지만, 책 자체가 하나의 창조된 세계이기에, 우리는 창조된 세계 자체도 일종의 책으로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책으로서의 세계, 혹은 세계를 한 권의 책처럼 읽는 태도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림2

<사진 2> 벤첼 왕의 <성서> (14세기 제작,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소장)[4]

19세기 말 (일명 세기말) 서구로 가보자. 지식은 날카롭게 벼린 도구로서 수 세기 동안 그 정교함을 뽐내며 널리 확장되었다. 지식은 누군가를 해방하거나 억압하며 빛을 발했고, 그런 사례가 쌓이며 ‘올바른’ 형태의 지식이 체계화되었다. 책은 대량생산에 힘입어 지식을 담고 전 세계를 여행했다. 이와 함께 지식과 감각이 서로 눈에 띄게 멀어졌다. 물론 앞선 시대의 수도사에게도 지식은 신의 영역으로서 감각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하지만 세기말 지식인과 다르게 그들에게는 직접 채집한 물질로 종이와 잉크, 나아가 책을 제작하는 미덕이 있었다. 세기말 지식인들은 반대로 제국의 생산과 유통구조를 바탕으로 지식의 물적 조건과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권을 가졌고, 이는 감각 없는 추상의 세계에 지식이 자리 잡는데 기여했다.

‘책으로서의 세계’라는 관념 또한 이와 함께 변화했다. 세기말에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세계가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도달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물론 말라르메가 직접 손으로 들고 읽었을 책은 지금 우리의 것보다 질이 좋지 않았을 것이고, 그가 생각한 아름다운 책과도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헌책에서도 물질이 아니라 활자와 그 배열을 읽었고, 활자 너머의 사상과 이상을 본 것이다.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 달아나리! 저곳으로 달아나리!”[5] 말라르메의 세계는 그가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서 찾은 플라톤적 공간, 즉 물질적 조건이나 어떤 종류의 비루함이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감각에서 멀어진 지식이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말라르메의 비전은 끊임없이 변주되고 보강되었다. 물론 프루스트나 조이스 같은 후대 작가들이 말라르메의 책을 계승하고 완성했지만, 이것이 단순히 문학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일례로, 출판/제지 산업 또한 아름다운 책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산업은 높은 품질의 펄프를 쉼 없이 공급하기 위해 숲까지 창조했고, 표백과 산도(pH) 조정 기술을 통해 빛이 바래지 않는 순백의 종이를 갈망해왔다. 야금술과 화학공학, 그리고 설계를 위한 다양한 기술-도구가 누구나 선명하고 균일한 책을 쉽게 받아볼 수 있는 환경을 후대에 선사했다. 책은 가볍고, 간편한 물건이 되었다. 21세기의 이북(e-book)은 말라르메의 비전을 사실상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 모든 책을 하나의 화면으로 선보이겠다는 구글의 전자도서관 프로젝트를 생각해보자. 화면 너머에 숨은 픽셀로 이루어진 책에서 ‘슬픈 육체’를 찾는 건 말라르메 같은 감수성의 시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림3

<사진 3> 데이터 센터의 서버 선반.[6]

이제 세계의 ‘아름다움’은 데이터 센터에서 완성된다. 세계를 데이터가 어떻게 재구성 중인지 밝히는 연구는 많지만, 여기서는 이북 역시 데이터 센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간단한 사실만 언급하고자 한다. 이북의 광대함은 개인이 부담해야 할 지식의 무게를 한 곳에 맡김으로써 실현되었다. 지식은 가시적인 육체를 잃고 아름다움을 얻었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은 자사의 킨들 서비스가 모든 책을 단숨에(“1-Click”) 소비자의 단말기로 전송하는 사실을 홍보한다. 아마존의 “글로벌 인프라(Global Infrastructure)” 홍보 탭에 따르면 이 과정은 그저 “광범위하고, 안정적이며, 안전”할 따름이다.[7] 정체 모를 인프라를 통해 유사 이래 개인이 감당해왔던 지식의 슬픈 육체가 모두 ‘저곳으로 달아나게’ 된 것이다. 이제 그 육체를 감각하기 위해서는 미국 서부 어딘가에 숨겨진 데이터 센터를 방문해야 한다. 물론, 그곳에서도 이북의 지식을 감각하는건 쉽지 않겠다. 데이터 센터는 시설의 ‘안정적이고 안전한’ 유지를 위해 내부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차범위 내의 정적인 온/습도와 분류표 없이 한없이 이어진 서버 선반에서 방문자가 얼마 전 읽었던 책을 오감으로 떠올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류세의 지식에서 감각 되찾기

인류세의 지식은 어떤 형태일까. 인류세를 이름으로 내건 두 개의 학술지를 살펴보자. Anthropocene은 지구 시스템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한다고 자신을 규정한다.[8] The Anthropocene Review는 그 상호작용이 지구와 글로벌 시스템에 주는 영향을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9] 이를 바탕으로 두 학술지 모두 인류세의 지식을 제도적으로 축적하는 중이다. 특히 Anthropocene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지구적 변화를—특히 고고학과 지구과학 분과의 방법과 도구를 사용하여—추적하고 분석하는 연구가 주로 개재된다. 반면 The Anthropocene Review는 초학제적(transdisciplinary) 접근을 지향하며 사회, 윤리, 정치적인 쟁점을 포함하는 다양한 분석과 전망을 개재한다. 요컨대, 이들은 관찰과 전망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인류세의 지식을 구성하는 중이다.

거시적인 소재와 초학제성에서 나오는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연구 대다수에는 지식에 대한 어떤 종류의 공통된 전제가 있다. 바로 지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에 따르면 인류는 지구를 꾸준히 관찰하고,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축적해야 한다. 해답은 언제나 다양한 데이터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달성하기 힘든 종류의 해답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데이터가 안내하는 방향으로의 근사를 통해 문제에 대한 얼마간의 개선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이 전제가 완전히 틀렸다고 보긴 어렵다. 애초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을 창조했다면 이를 추구하는 건 그 자체로 옳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떨치기는 어렵다. 인류세의 지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인류세가 일반적인 문제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가 줄리아 토마스는 인류세가 기후변화와 같은 전통적인 환경 쟁점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렇기에 인류세는 해결 가능한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10] 인류세가 한마디로 다차원적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문제라고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인류세의 어느 하나를 분리하여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할 도구가 문제의 원인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풍력발전을 예시로 든다. 풍력발전은 대체에너지로서 주목받는다. 하지만 발전용 터빈을 생산/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원과 에너지를 고려한다면, 풍력발전은 깔끔한 대체재가 될 수 없다고 그는 지적한다. 문제를 다른 문제로 교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환경 문제를 다루는 방식으로 인류세를 다루는 건 팽팽한 풍선을 누르는 것과 같다. 어디를 골라 누르더라도 자연스럽게 다른 부분이 압력을 받아 부풀어 오를 수밖에 없다.

인류세가 다르다면, 인류세의 지식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인류세에 대처하기 위해 지식을 축적하는 거라면, 그 지식 또한 일종의 도구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식을 풍력 발전용 터빈처럼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지식의 육체를 잊었고 그 과정에서 지식의 조건을 같이 잊었다. 이 물질적 조건은 ‘한 권의 아름다운 책’으로서의 세계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어딘가로 이송·격리되면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지식의 영향력을, 그리고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온전하게 재어보려면, 우리는 지식의 육체를 다시금 깨우쳐야 한다. 특히, 우리가 인류세에 처한 상황이 국소적인 해결이 아니라 지구 시스템 전체를 조망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요구한다면, 어딘가 치워버린 지식의 물적 조건 또한 다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행 작업 없이 지식의 해결 가능성을 믿는 건 우리가 부여한 성질과 규범에 스스로 도취하는 것과 같다.

지식의 조건을 다시 알아가는 방법을 생각해본다. 물론 여러 갈래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지식은 오래전부터 스스로 성찰하는 방법을 모색했으며, 이것은 물질적 조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을 둘러싼 정책의 조정과 같은 제도적인 변화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에 앞서 우리가 일상에서 지식을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지 떠올려본다. 이는 앞서 묘사했듯이 쉬운 일이 아니다. 책에서 곰팡내를 맡기는 쉽지만, 이북 단말기의 녹내를 맡기란 쉽지 않다. 인쇄소의 분주한 기계음과 다르게, 정보망이 소모하는 초월적인 규모의 에너지는 일상의 감각에서 완전히 격리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헌책을 생각한다. 변색이야말로 책의 본질이며, 지식의 조건이 아닐까. 우리는 순백의 종이에 현혹되지만, ‘한 권의 아름다운 책’은 허상이다. 차라리 모든 책은 헌책으로 태어났다고 말해보자.

인류세가 오랜 전통의 ‘상처받은 지구’ 담론, 혹은 종말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문명의 물질적인 조건을 극복하거나 달아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문명의 본질, 혹은 문명 그 자체로 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류세의 지식에서 보아야 할 것은, 이북의 기판과 제3세계에 버려진 희토류의 광산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마존 킨들의 정보망과 미세먼지의 석탄가루가 연결되는 구체적인 과정과 그것의 지도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식이 남겨온 물질들, 차라리 배설물이라 말하면 어울릴 지식의 토대를 먼저 감각해야 한다.

 

나가며

어느 날 아침, KAIST 서버실의 굴뚝이 작동했다. 아침 공기를 뚫고 시원하게 매연을 내뿜는 걸 출근길에 보고 말았다. 지독하게 새까만 연기가 덜덜대는 소음과 함께 사방으로 퍼지는 모습은 내가 알아 온 캠퍼스보다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뒷골목에 가까워 보였다. 숯처럼 짙은 농담이 움실거리며 주변을 채우는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연기를 만들었는지, 무엇을 위해 굴뚝이 작동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서버실이 캠퍼스 어딘가에 살며시 모습을 감추고 있듯이, 서버실도 자신의 물적 조건을 감춰왔다는 것을 공기와 명암으로 감각할 수 있었다. 캠퍼스의 정보망이 생산하는 지식은 육체를 벗어난 가벼움과 아름다움을 날개 삼아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 나가지만, 그 시작점에는 오래된 굴뚝과 검은 연기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1] 소피 카사뉴-브루케, 최애리 번역(2006),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마티, 214쪽.

[2] fromA(2018. 04. 11), “헌책방 거리에도 봄은 올까” https://froma.co.kr/383.

[3] 유도동기(leitmotif)라고도 불리는, 음악에서 특정 인물, 상황 등을 나타내며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짧은 멜로디.

[4]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enzelsbibel03.jpg

[5] 스테판 말라르메 (1864), “바다의 미풍” in 말라르메, 황현산 번역 (2005), <시집>, 문학과지성사, 70쪽.

[6]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alticServers_data_center.jpg

[7] https://aws.amazon.com/ko/about-aws/global-infrastructure/

[8] Anne Chin et al. (2013), “Anthropocene: Human interactions with earth systems,” Anthropocene, 1, pp.1–2.

[9] Frank Oldfield et al. (2014), “The Anthropocene Review: Its significance, implications and the rationale for a new transdisciplinary journal,” The Anthropocene Review 1, no. 1, pp.3–7.

[10] 줄리아 애드니 토마스, 김동진 번역 (2019), “’인류세’는 ‘기후 변화’와 어떻게 다르며 왜 중요한가,” <에피> 제7호, 190-197쪽.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asiaglobalonline.hku.hk/anthropocene-climate-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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