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만든다 : 과학고는 우리가 성장하도록 무엇을 도와야 하는가

조수진
fawkes737@gmail.com


 

여는 말

나는 2010년대 중반에 과학고를 졸업했다. 그곳에서 많은 것을 얻었고, 그만큼 많은 걸 잃을 뻔했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과학고에 다니는 동안 내가 무엇을 지키려고 했고, 내가 그것들을 지켜낼 수 있도록 학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글을 통해 나와 우리가 건강한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과학 엘리트 교육의 안팎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함께 고민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엘리트 교육이라는 대단한 기회를 얻은 것 같았지만 막상 그 속에서 번번이 부서졌던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다.

덧붙여, 꿈꾸면 기회를 얻을 수 있고, 대단한 꿈을 꾸지 않더라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린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는 말들이 내가 그리는 세상에 아주 조금의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낭만과 동경 그리고 환상

중학생 때 나는 과학자가 되는 막연한 꿈을 꿨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발견이나 연구로 노벨상을 받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얀 실험복을 입고 실험을 하는 것, 좋아하는 분야의 공부를 밤늦게까지 파고드는 것, 주말에는 친구들과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되돌아보면 열여섯의 나이는 너무나 어려서, 과학자가 된 어른에 대한 순수한 동경이 있었다. 마침 시기적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해야 했고, 과학고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게 생겼다. 그 시절의 나에게 과학고는 뽀얀 안개에 가려진 예쁜 성과 같은 느낌이었다. 안개를 걷고 성문을 열어 들어섰을 때 많은 게 환상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과학고 학생이 되다

나의 과학고 입시는 보통 특목고를 준비하는 친구들과는 조금 달랐다. 나중에 입학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들이 많은데, 내가 본 많은 과학고 학생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교육청이나 지역의 대학에서 운영하는 ‘영재원’이라는 교육 기관을 다녔었다. 영재원은 영재성 판별을 위한 시험, 면접 등을 통해 선발하는데 이를 위해서 수학〮과학 전문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과학고 합격을 위해 선행학습을 하거나 경시대회 등에 입상하기 위해 이르게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학원을 다녀온 친구들도 많았다. 다른 목적이 있다기 보다는 수학〮과학을 좋아해서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학원을 다녔던 친구들도 있었다.

반면 나는 과학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했던 것 같다. 나는 과학고 최종합격이 결정되고 나서 수학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에는 학습을 위한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출신 중학교의 첫 번째 과학고 진학자였기 때문에 주변에 정보를 얻을만한 기회가 없었다. 몇 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오는 대부분의 친구에 비해 어쩌면 쉽게, 덜컥, 갑자기 과학고라는 집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입학할 때 과학고는 입시나 교육 커리큘럼의 과도기에 있었던 것 같다. 우리 학교의 경우에는 정원을 80명 정도에서 120명으로 늘린 세 번째 해였고(현재 100여 명으로 다시 바뀌었다.), 같은 지역의 신설 과학고가 2기 신입생을 받는 해이기도 했다. 또한 전국의 과학고 입시는 해를 거듭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0년까지만 해도 과학고 신입생 선발을 위해서 학생들에게 중학교 수학〮과학 내신성적과 고난도 수학〮과학 구술 면접 시험을 요구했다. 2011년부터는 내신, 서류, 면접으로 선발하는 자기주도학습전형과 과학 캠프 참여평가로 이뤄지는 과학 창의성 전형이 동시에 진행이 되었고, 내가 입학한 2013년 입시부터는 전원이 자기주도학습전형으로 선발되었다. 나의 몇 기수 위 선배들은 높은 학교 내신 성적뿐 아니라, 올림피아드 입상 실적도 있어야 했고, 수학〮과학 구술 면접 준비를 위한 선행학습도 불가피했었다. 하지만 내가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던 해부터는 과학고 교육을 통해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낼 잠재력이 있는 학생을 선발하고자 했고, 나는 운이 좋게 입학 기회를 얻었다.

실제로 과학고에 합격하기까지 내가 선행학습이 전혀 안 되어있어서 불리한 점이 있다거나 어려움을 겪은 것은 없었다. 과학고 입시 설명회에서도 입학사정관들이 가장 강조한 부분은 미리 선행학습을 할 필요가 없으며 중학교 교육 과정을 성실하게 따랐다면 선발될 수 있고, 학교생활도 잘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합격 이후의 학교생활들은 나뿐 아니라 미리 준비하지 못한 다른 아이들에게는 쉽지 않았던 시간이었을 것 같다.

내가 다녔던 과학고의 경우, 과목 이름은 ‘물리1’, ‘물리2’, ‘수학1’처럼 일반고와 비슷했지만, 범위는 많이 달랐다. 물리의 경우 입학하자마자 『할리데이 일반물리학』이라는 대학교재를 썼었다. 나는 물리라는 과목을 제대로 접한 것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가 처음이었고 기초적인 미적분 개념도 가지지 못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물리학을 배운다는 것은 물리가 어떤 과목인지 알기도 전에 ‘어렵고 싫다!’라는 생각을 먼저 하도록 만들었다.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였다. 과학고가 다른 학교에 비해 수학〮과학에 대한 더 높고 깊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해야 하고, 과학고에 다니는 학생은 어려운 과제를 만나더라도 더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나는 어디에나 적절히 밟아 가야 하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학생들이 효과적으로 기초를 다질 수 있는 커리큘럼은 아니었다고 느껴진다.

우리 기수까지는 거의 전원이 2학년 때 대학 입시를 마치고 조기 졸업을 했다. 조기 졸업을 위한 대학 입시는 과학고 입학 이후 1년 반 동안의 학업 성취 결과로 이뤄진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짧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게다가 내신성적이라는 건 나의 성취만으로 나의 발전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학교생활을 해온 다른 동기들과의 비교 평가이다. 입학 전에 이미 많이 벌어진 학력 차이를 좁히기는 어려웠다. 차근차근 학력차를 극복하기에는 붕 뜬 교육 커리큘럼, 잘 좁혀지지 않는 틈에서 느끼는 조급함,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학문적인 교육 외에 제공해야 하는 인성 교육의 부족함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여 나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곳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과학고는 어떠한 혜택을 제공했는가

과학고 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많았다. 고등학생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가의 실험 기자재를 수업과 동아리 활동에서 쓸 수 있었고, 다양한 과제연구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학비는 특별히 비싸지 않았다.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는 대학 입시에서도 어떤 면[i]에서는 자유롭고 유리한 환경이었다고 생각한다. 시기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대입을 준비하던 때에는 대부분의 학생이 수능을 응시하지 않고도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는 입시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 다른 면에서는 과학고 생활을 통해 내가 성장할 수 있었던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에, 내가 과학고를 다닐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첫째로 나에게 계속해서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과학고에서 인연이 된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정서적인 고마움은 물론이다. 둘째로 주도적으로 사고하는 태도를 갖출 수 있었다. 과학고를 다닐 때 했던 실험이나 과제 중에서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실험 계획에만 반 학기가 걸렸고, 수행 후 결론을 정리하고 검토하는 데만 나머지 반 학기를 쓴 적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이 여러 번 쌓이다 보니 스스로 많이 고민하고 찾아보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다. 셋째로는 내가 해내기 힘들 것 같은 일을 눈앞에 두고 못할 거라 쉽게 단정 짓지 않으려는 자세를 갖추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시스템을 모두 빼놓고 생각했을 때, 내가 과학고를 졸업하고 나서 가장 후회했던 건 내 앞에 서 있는 어려움에 대해 너무 겁냈던 나 자신이었다. 겁내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앞으로의 삶에서는 조금 더 당당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학고, 그리고 과학 엘리트 교육은 누구에게 무엇을 빼앗는가

내가 경험하고 느낀 우리나라 과학 엘리트 교육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너무 일찍, 너무 빠르게 판단하여 결정 내려버린다는 것에 있다. 판단 기준은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올바르지도 못하다고 생각한다. 결정에 대한 책임 또한 당사자 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지려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호한 기준으로 ‘똑똑하고 탁월하며 잠재력이 있는’ 아이를 ‘과학 영재’라는 이름으로 선발하지만, 선발 이후 아이들이 마주치게 되는 고민과 난관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제대로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 과학고는 학교 밖 사회에서 ‘특권학교’라는 비판을 받는 것에 비해, 학교 안 구성원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물론 과학고가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육에서의 부작용은 한 사람의 인생 전반을 잘못된 방향으로 밀어낼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완벽하기 위한 고민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엘리트 교육이 기대하는 것 중 하나는 뛰어난 아이들을 한 곳에서 공부하고 생활하게끔 하여 서로 상호 보완하는 것, 경쟁을 통해 서로가 더 나은 학업적 성취를 이뤄내도록 도모하는 것일 거다. 그 과정에서 사소해 보이기 때문에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 온 문제들이 발생해왔다. 사소해 보이는 그 문제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믿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한 길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심각하다.

엘리트 교육은 그 안에서도 엘리트와 엘리트가 아닌 자로 또 한 번 나눈다. 일례로 나는 R&E(Research and Education)라는 대학-고등학교 교류 연구 프로젝트의 선발을 꼽고 싶다. 우리는 재학 중 1·2학년 전교생이 R&E에 참여했다. 분야는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정보수학 등으로 나누어졌었는데, 많은 학생들이 하고 싶어 하는 과목이 있고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과목도 있었다. 모든 학생이 자신이 원하는 과목에 참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각 과목에 학생들의 수를 조절해 분배해야 했고, 그 기준은 성적순이었다. 수요량이 공급량보다 클 때 성적을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이 어쩌면 가장 공정하고 깔끔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쉽고 간편한 방법이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시간과 노력이 좀 더 들더라도 성적순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교육적’인 결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과학고를 다니던 시기에 나는 스스로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었다고 느끼며 동시에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도 나의 자존감이었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자 학업 전반에 있어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없어졌었다. 이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로 번져, 공부 외에도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당시의 나는 이런 문제를 낳는 주된 원인이 학교나 교육 시스템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나의 성격 문제 또는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이나 기술의 차이도 있다. 때문에 같은 상황에 놓여있어도 누군가는 수월하게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끙끙 앓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이 상황을 인지하는 방식과 정도가 다를지라도 고등학교라는 교육기관은 학생에게 최소한의 방어막을 쳐 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치는 방법을 알려주기라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교 공부를 좀 못한다고 해서, 학교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한 사람의 자존감을 떨어뜨릴 만큼 큰 일일까?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똑똑하다’, ‘잘한다’라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보내는 내내 뭐든지 잘 해내야 한다는 심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주변에서 나에게 ‘넌 꼭 1등 해야 해’ 하며 직접적인 압박을 가했던 사람은 없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사사롭고도 많은 혜택들은 은연중에 내가 지금처럼 잘하지 못하면 모두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이어야 했는데, 어린 나에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나를 이루는 가장 크고 강한 정의였다. 하지만 과학고에서의 생활은 더 이상 내가 공부로 특별할 게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운다. 배우는 내용은 어렵고, 그 어려운 내용을 쉽게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은 생각보다 많다. 내가 스스로를 가둔 정의가 더 이상 효력을 다할 수 없어지자 자신이 부정당한 것 같았다.

고등학교를 벗어나 조금 더 큰 세상으로 나오고 나니 어떤 시기의 성공이 앞으로의 성공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고, 어느 시기에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내지 못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평생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걸 배웠다. 나는 과학고에 다닐 때 물리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당시에는 혼도 많이 났고, 주변의 친구들과 나를 계속해서 비교하며 괴로워했었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은 충분한 시간 동안 필요한 양의 학습을 하면 나도 어느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 너무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공부하라는 말 대신 많은 아이들 앞에서 잘하지 못하는 나를 무안 주고 비난하는 방식을 택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그 선생님께 나도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오기에 물리를 가장 열심히 공부했고,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되었다. 다만 학업적 성과와 별개로 내가 과학고를 다닐 적에 학업적 부족함에 대한 몇몇 선생님들의 차가운 시선은 지금도 나의 삶에 생채기로 남아있다.

과학고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었는가

과학고를 다니며 많은 것을 바랐던 게 아니었다. 몸과 마음 건강하게 사는 것, 천진한 꿈을 꾸는 것, 나를 묵묵히 응원하고 도와주는 괜찮은 어른들을 곁에 두는 것을 바랐다. 철없는 소리라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고등학생이라면 얼마든지 너른 꿈을 꾸고 꾸밈없이 말하고 다녀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내가 있는 자리와 나라는 사람이 너무 동떨어진 것 같은 기분에 많이 괴로웠고, 가까워지기 위해 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과학고 3년은 배움이 가득한 학습 공동체 혹은 떠올리면 기분 좋은 추억거리는 아니다. 그렇다 해서 마냥 지우고 싶은 상처만도 아니다. 내가 과학고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재학생으로 있으면서는 움츠리고 있느라고 다양한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고, 우리 학교 밖의 아이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웠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면서도 그렇지 못했을 학교 밖의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우리나라 과학 엘리트 교육은 엘리트 교육이라 칭해지는 경계 안의 사람과 경계 밖의 사람 모두에게 결핍을 안겨준다는 게 안타깝고 슬프다. 과학 엘리트 교육의 어두운 면을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함축하면 다음과 같다. 너무 어린 나이에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로 비난당하고 능력을 의심받아야 했으며, 정서적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한 나는 타인에게 내가 제법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계속 확인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되어버려 가끔 찾아오는 자책의 시간이 견딜 수 없이 외롭고 아프기도 하다. (현재로서는 그렇다. 그렇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엘리트 교육 바깥의 아이들은 보다 나은 질의 교육과 다양한 경험을 자신의 삶 속에 들일 기회를 너무 어린 나이에 빼앗긴다.

나는 열여섯의 내가 동경하던 낭만적인 과학자의 삶의 형태를 여전히 꿈꾼다. 슬프지만 열여섯의 나도, 열아홉의 나도, 그리고 스물넷이 된 지금의 나도 아직 내가 원했던 일상을 살지는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학부 졸업 이후에 배우고 싶은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강렬한 갈망이 생겼다. 하지만 가끔 현재 나의 능력이나 바람과는 무관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정해져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무 살이 지나고 나서 꿈이 생기고 그것을 뒷받침할 실력이 생기는 사람들에게는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거의 없다.

더 나은 과학고를 기대하며

공부를 잘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큰 부분을 차지했던 열일곱, 열여덟의 아이들에게 지금의 시험 성적이 너희 삶의 지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군가는 명시적으로 말을 해줘야 했다. 얼마나 무거운 압박감 속에서 버텨내고 있는지 아이들 스스로 꺼내어 보여주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헤아리고 도와줘야 했다. 나는 선생님들께서 그 역할을 조금 더 잘 해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한편으로는 단순히 선생님들 개개인의 정성과 성의가 부족했던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어른이지만 몰랐을 수 있고, 미처 내다보지 못한 마음들이 있었을 거고, 하고자 했지만 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고 교육 시스템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뿐 아니라 학생들의 스트레스 관리와 인성 교육에도 비슷한 수준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커리큘럼의 수정, 선생님들의 학생 관리에 대한 적절한 매뉴얼 개발 등 여러 가지 대안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과학고 전반에 이런 변화가 생긴다면 부가적으로 학업 성취가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학생들의 학력을 더 나은 수준으로 자연스럽게 끌어올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과학고가 모든 학생들에게 학교 교육에 의한 상처를 남기지 않고 풍부한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의 소임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누가 건강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보다 무엇인가를 더 잘할 수 있다.’는 항상 참인 것은 아니다.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다. 내 가치를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만족할 수 없고, 내가 지금은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타인의 능력과 삶을 단정 짓지 않고, 본인도 자신의 세계를 제한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도 누구나 건강한 마음을 가진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슬럼프를 겪는 중이라거나 공부든 일이든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때 자신을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단지 개인의 성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교육과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과학 엘리트 교육이 뛰어난 과학적 소질을 가진 아이들을 미리 발굴하여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더 나은 연구 환경에 기여하는 역할이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학 엘리트 교육의 본격적인 출발선 즈음에 있는 과학고는 그곳이 단순히 과학 영재만을 키워내는 곳이 아니라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단순히 과학자를 길러내는 것 이전에 ‘건강한 개인’으로 키워내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과학고가 안개에 가려진 예쁜 성으로 보여지길 바라지 않는다. 누구나 발을 들일 수 있는 들판이면 좋겠다. 다만 들판의 가장자리에는 낮은 울타리가 쳐있어 쉽게 길을 잃지 않고, 누구도 엉킨 풀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바닥 곳곳을 미리 살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좋겠다. 느리게 걸어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도록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좋겠다. 영영 그 들판을 떠나더라도 떠나는 뒷모습이 초라하지 않고, 원하는 이에겐 언제나 다시 돌아올 길을 비추어주면 좋겠다.

 


 읽을거리와 볼거리

 

읽을거리_1_게으름에 대한 찬양 (1)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역 (2005),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Bertrand Russell (2004), In Praise of Idleness, Routledge]
끊임없이 성과를 내길 강요하다시피 하는 시대에, 경종을 울릴 만한 통찰력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시 읽을 때마다 이 책이 1935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전체적인 맥락에
공감하지만, 본문과 관련해서는 특히 ‘금욕주의에 대하여’라는 장을 읽어 보길 추천한다.

 

볼거리_1_와일드 (1)

<와일드> (2014)
감독: 장 마크 발레
원작자: 셰릴 스트레이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지난 실수와 기억을 극복하거나 혹은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기 싫다고 자꾸 숨기고 묻어 두면 곪는다. 주인공의 여정을 지켜보다 보면 나도 그녀처럼 상처를 드러내고 용서할 용기가 생긴다. 나에게 이번 글쓰기가 그러했듯.
시간을 내어 꼭 한 번 보길 강력하게 추천한다!

 

 


[1] 셰릴 스트레이드(2012), <와일드>, 나무의철학, 5쪽.

[2]  ‘어떤 면’이라고 표현한 것은 수능 응시 없이 수시만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과학고 입시 환경이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에게 또 다른 한계를 경험케 했기 때문이다. 내가 대입을 준비하던 시기에 과학고 학생들이 대학을 갈 수 있는 경로가 획일화 되어있어서 내신 성적이 곧 대학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었고, 그 때문에 과학고 내신 안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얻은 학생의 경우 본래 자신이 희망했던 전공이나 학교와 무관하게 진학을 하기도 했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WordPress.com 제공.

위로 ↑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