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과학철학자 고인석

노틀데임대학교 HPS 프로그램 박사과정
김가영
kkim22@nd.edu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한혜정
hhj29@kaist.ac.kr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인터뷰 진행자들은 이공계 학부 배경을 바탕으로, 경험과학적 탐구에 철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 중에 비슷한 지향점을 가진 선배 철학자들과 우리의 고민을 나누며 조언을 얻고자 인터뷰를 구상하게 되었다. 첫 인터뷰 대상으로 선정된 고인석(인하대 철학과 교수)은 한국의 중견 과학철학자로 오래전부터 지능을 가진 인공물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해왔고, 특히 최근에 자율주행자동차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다. 그는 철학과에 재직하면서도 철학 내적 탐구에 국한하지 않고 공학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정책적 제안에도 참여한 바 있다. 특히 그는 협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 분야 간의 원활한 소통과 협업에 대해 제언하는 논문도 쓴 적이 있기에, 상이한 전통과 방법론이 섞여 있는 대학원에 재학 중이며 잠정적으로 과학자 및 공학자들과 협업을 고민하는 인터뷰어들에게 충분한 참조가 되리라 생각했다. 이 인터뷰가 <과학뒤켠>을 읽고 계신 독자들, 특히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다른 학우들[i]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림1

<그림 1>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Q. 어떻게 철학자가 되셨나요?

A. 학부 때는 물리학을 전공했어요. 중학생 때부터 물리학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했는데, 그 당시에는 물리학이 가장 근사한 학문 같아 보였거든요. 그러다 대학원은 전공을 바꿔 철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 계기로는, 우선 저는 어릴 때부터 철학에 친숙함이 있었어요. 제가 교회를 다니는데 어릴 때 교회 선생님과 신과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철학적인 얘기를 많이 했거든요.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대학교 3, 4학년 때 철학과 강의를 듣다가 거기에 “낚였”습니다. (웃음) 특히 4학년 때 하이데거 원전을 강독하는 소광희 교수님 강의를 들었는데 굉장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교수님께 칭찬도 많이 들었고요. 그리고 학기가 끝날 때쯤 교수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 ‘자네는 철학을 해도 괜찮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철학을 할 때 내 안에서 어떤 반짝이는 것을 느꼈고, 그 느낌에 끌려 철학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Q. 철학과 대학원에서는 주로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A. 석사과정은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는데요. 오영환 교수님 밑에서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처음부터 화이트헤드를 공부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연세대학교에서 오영환 교수님을 만났을 때 마침 그분이 그때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라는 책을 수업하면서 번역하고 계셨습니다. 번역은 본인께서 전부 하셨지만 그것을 손질하는 데에 제가 의견을 많이 냈고요. 아마 교수님께서 이런 손질하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이공계 배경이 있는 학생을 찾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석사 논문까지 화이트헤드를 주제로 쓰게 됐습니다.

Q. 석사과정에서 전공하셨던 화이트헤드가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이 있나요?

A. 화이트헤드는 제 연구의 중심 주제는 아니지만 중요한 영감을 주곤 하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우선 대단히 체계적인 사상가지요. 특히 그의 저서 중에서도 <과정과 실재>는 개념적으로, 논리적으로 정말 치밀하게 직조되어 경탄을 자아내는 책이고, 그런 치밀한 체계성이 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 전반을 포괄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형이상학의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그의 목표 의식이 신선한 공감을 불러일으켰고요.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제가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라는 개념에 관해 석사 논문을 썼는데요. 최근에 데이터 문제에 관심이 생기면서 이 영역의 문제들을 해석하는 틀로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을 활용해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적 존재는 화이트헤드가 상정하는 존재의 최소단위 같은 것인데 그는 그것을 ‘한 방울의 경험’(drop of experience)이라고 표현하지요. 최근에 데이터 편향이나 “나쁜” 데이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데이터가 나쁘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데이터가 생성되는 과정을 현실적 존재의 생성 과정에 유비해서 좀 체계적인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직 생각이 여물지 않았지만, 내년쯤에는 이 주제를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Q. 선생님의 최근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최근에 자율주행자동차에 대해서 깊이 있는 연구를 출판하셨는데요. 예를 들어 2019년에 쓰신 자율주행자동차 규제에 대한 논문[ii]에서는 자율주행자동차가 인간 운전자를 대행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되는지를 검토하셨습니다. 논문에서 공공의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자율주행자동차 도입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시는데요. 특히 이런 태도를 분명하게 표명하는 것이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제안하신 점이 인상 깊었는데, 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A. 제가 2008년 11월쯤부터 로봇윤리헌장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는데,[iii] 그것이 계기가 되어 최근까지 로보틱스와 인공지능의 철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철학하는 사람들이 늘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요, 주장은 반드시 근거와 더불어서 논증의 방식으로 제시되어야 하고, 이 주장과 충돌하는 다른 입장이 있다면 어떤 근거에서 그러한 입장이 합리적인지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들이 충돌하면서 법도 만들어야 하고 규범도 만들어야 하죠. 그런데 자율주행자동차에 대해서는 그러한 충돌이 충분히 벌어지고 있지 않아 아쉬워요. 오늘 우연히 본 뉴스가 있습니다. 국토교통부 발표에 따르면 금년 7월에 자율주행 3단계 차가 시판 가능해진다고 해요. 이 뉴스도 그렇고, 제가 2008년에 로봇윤리헌장을 만들기 위해 불려갔을 때도 굉장히 서두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예를 들어 아마도 국회의원들도 4차 산업혁명이나 AI와 관련해서 자기 이름으로 안을 먼저 내고 싶을 거고, 또 각 부처에서도 그것에 관련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어 하겠죠. 이런 여건에서 우리나라가 최초로 3단계 자율주행자동차 규범을 마련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7월부터 이것을 판매할 수 있게 된다는 건데요. 현실에 대비해서 나름대로 이런저런 경우와 조건들을 반영해 규범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여전히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Q. 서두르는 것이 왜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서두른다는 말은 ‘그 일을 하는 이유에 부합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 자리에 놓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우선적인 목표가 되고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일의 취지에 충분히 부합한다는 것은 모호한 개념이고 우리는 어디에선가 타협해야 하지만, 후자를 목표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또 서두른다는 것은 시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효율성의 부족도 함축합니다. 제가 보기에 상당히 잘 만든 2017년 독일의 이른바 도브린트 보고서(Dobrindt Report)는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작성된 것이지만 그렇게 서두른 느낌이 없습니다.

Q. 말씀하신 자율주행자동차의 규제에 대한 연구 등이 우리 사회에서 실효성을 가지려면, 철학자뿐만 아니라 다른 분과의 전문가들도 그 연구에 관심을 가져야 수월할 것 같아요. 실제로 선생님의 연구를 철학 외의 다른 전공자들이 읽고 응용한 사례가 있나요?

A. 작년에 저로서는 고무적인 반응이 법학계에서 나왔어요. 자율주행자동차나 인공지능 관련 규범을 연구하는 법학자들이 제 논문을 읽고 많이 인용해 주셨습니다. 제 연구가 그렇게 법학에서 인용되는 이유는, 실제로 법 규범을 마련하기 위해 자율주행자동차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고, 어떻게 관리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 등을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논의가 바탕이 되어야 해서 그런 것 같아요.

Q. 그렇다면 과학자/공학자들은 어떤가요? 과학철학과 과학/공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텐데,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연구가 과학자/공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게끔 하기 위해 노력하신 것이 있나요?

A. 딱히 없습니다. 우선 저는 누구를 직접 움직이고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도가 있지는 않아요. 그것은 제 역량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요. 다만 저는 되도록 철학 비전공자들도 읽을 수 있는 친절한 글을 쓰려고 하는 편입니다. 예컨대 얼마 전에는 한 법학 교수님께서 제 논문이 쉽고 재미있다고 동료 법학자한테 추천하시더라고요. 이 재미있다는 말이 저는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는 법학자들에게 어떤 소정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이 과학자/공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통로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자/공학자들이 실제로 물건을 내놓으려면, 그것이 사회 규범에 잘 부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때 제 논문이 직접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과학/공학 연구의 중요한 테두리에 영향을 미치게 될 수 있겠죠.

 

그림2

<그림 2>  고인석 선생님의 논문들

Q. 선생님께서는 과학자/공학자와 협업을 자주 하셨는데요. 특히 기억에 남는 협업의 경험을 하나 말씀해주시겠어요?

A. 최근에 2년 정도 우리 학교에서 공대 교수님들과 함께 했었던 테크노인문학이라는 융합 프로젝트[iv]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그 프로젝트를 하고 1년 후에 작은 국제학술대회를 열었고, 제가 연구 단장이었기 때문에 인사말을 준비하면서 거기에 연구단 경험을 적었는데, 인문학과 공학이 같이 얘기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고 썼습니다.[v] 프로젝트를 하면서 느낀 것이, 많은 이공계 분들이 인문학에 대해, 특히 철학에 대해 동경과 더불어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우리는 무식해서 그런 것 잘 모릅니다’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갑-을이라는 도식을 쓰자면 그분들은 본인들이 갑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시거든요. 본인들이 갑인데, 을도 생각보다 굉장히 똑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련된 혹은 너그러운 갑의 모션을 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련된 모션이 진솔한 대화를 막는 것 같았고요.

Q. 그러면 진솔한 대화 없이 그 융합 프로젝트가 끝난 건가요?

A. 아니요. 1년쯤 지난 후에야 드디어 정말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고 말이에요 (하하). 그런데 저는 이렇게 툭 터놓고 이해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대화가 되는 거라고 봤어요.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런 말이 나오고 대화가 비로소 진행되니, 융합연구라는 것이 참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Q. 선생님께서 과학자/공학자와 협업을 많이 하신 것은 선생님의 연구 스타일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의 연구는 실제 과학/공학 사례들을 깊숙하게 들여다보고, 형이상학적인 혹은 논리적인 가능성보다는 실제 현상 분석에 집중하는 것이 특징적인데요. 한국 철학자 중에서는 흔치 않은 스타일인 것 같아요.

A. 예, 저는 과학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이를테면 작년에 있었던 블랙홀 관측 같은 일들이 누군가는 더 깊게 들여다봐야하는 일처럼 생각이 되더라고요. 메타적인 관점에서 과학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할만합니다. 거기서 얻어낼 수 있는 흥미로운 메시지도 있을 것 같고요.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실제 사례보다는 형이상학적인 혹은 논리적인 분석에 더욱 집중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저는 이 중에 어느 하나가 학문적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대신에 중요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스타일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하지만 사례 중심 연구를 지향하는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학생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확신을 얻기가 사실 쉽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후배 학자들에게 도움말을 주신다면요?

A. 우리나라 학계의 풀이 작아 자신의 성향과 맞는 곳을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께 마음이 맞는 동료를 만나 꼭 함께 공부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 학생 때 경험을 비추어보면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같이 공부하지 못했던 것이에요. 그런데 두 명이든, 다섯 명이든,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동료들을 찾아 같이 공부를 하면 훨씬 힘이 나고 행복할 겁니다.

(인터뷰 전문은 http://monads.byus.net/index.php/insok-ko/ 에 수록)


읽을거리

고인석 (2019), “자율주행자동차를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 <철학논총>, 제96집 제2권, 91-107쪽.

인터뷰에 소개된 논문으로, 서둘러 자율주행차 관련 법과 정책을 마련하고 싶은 이들에게 제동을 걸 수 있는 철학적 성찰이 담겨있다. 저자는 “우리는 이 기술을 어떤 범위에서, 어떤 조건에서 현실에 적용해야 옳은가?”를 묻고 자율주행의 단계별로 가능한 문제들—기계 시스템에서 사람으로 제어 권한이 매끄럽게 이양되지 않는다는 문제(3단계와 4단계), 딜레마 상황에서 작동 원칙을 결정하기 어렵다는 문제(5단계)—를 검토한다. 저자는 “공공의 안전이라는 가치”가 자율주행 기술의 도입에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면 “인공시스템이 유능하고 사려 깊은 인간 운전자를 대신하도록 해도 좋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5단계 자율주행기술의 도입을 보류”해야 할 것을 주장하며, 자율주행에 관한 규범에 대한 사회적 결정과 조정 과정이 우리 사회에 충분한 수준으로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고인석 (2010), “생산적인 융합연구를 촉진하는 학제적 소통을 위한 방안”, <과학철학>, 제13권 제2호, 91-116쪽.

개별 학문 분과들이 상이한 문화적 특성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고 그 간극이 소통을 어렵게 한다면, 우리가 애초에 소통을 하려는 이유와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 논문은 먼저 학제적 소통의 효용과 지향점을 확인하고 생산적인 소통을 진작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안한다. 특히 철학과 개별과학의 소통에 대한 절에서는 저마다 고유한 관점을 지닌 개별과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조각들을 묶어 큰 그림을 그려내는 철학자의 역할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엿볼 수 있다.

실천적 과학철학회 미션 선언문

전통적으로 과학철학은 주로 과학의 이론에만 집중하고 과학의 실천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실천적 과학철학회(Society for Philosophy of Science in Practice; SPSP)는 이러한 상황을 바꾸고자 2006년 설립된 학회이다. 실천적 과학철학회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지식의 습득과 확인뿐만 아니라 그것의 이용에도 관심을 둔다. 둘째, 과학 이론뿐만 아니라 이론과 세계를 매개하는 인공물(개념 모형과 실험 기기를 포함)이 과학의 실행을 어떻게 빚어내는지를 본다. 셋째, 과학적 실행에 대한 견해는 특정 과학 분야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사회과학, 공학, 의학 등 상대적으로 방치된 분야들에 대한 관심을 통해 보완되어야 한다. 넷째, 철학적 사유와 과학적 실행 사이에 생산적인 상호작용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과학자, 공학자, 정책입안자 등의 참여로도 이어질 수 있다. 실천적 과학철학회의 미션 선언문은 https://www.philosophy-science-practice.org/about/mission-statement 에서 볼 수 있다.

 


[i] 과학철학 내지는 넓은 의미에서 과학학을 공부하는 학우들, 과학자/공학자와 협업하면서 메타학문으로서의 과학학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학우들, 인문학과 과학/공학의 협업을 모색하는 학우들 등.

[ii] 고인석 (2019), “자율주행자동차를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 <철학논총>, 제96집 제2권, 91-107쪽.

[iii] ‘로봇윤리헌장 수립을 위한 연구위원회’. 이 때의 경험은 고인석 (2012), “체계적인 로봇윤리의 정립을 위한 로봇 존재론, 특히 로봇의 분류에 관하여”, <철학논총>, 제70집 제4권, 173쪽 참조.

[iv] 인하대학교 Techno-Humanities 연구단(WCSL).

[v]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학제적 협업, 또는 분과를 넘나드는 대화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를 시도해 본 어떤 이라도 이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안다. 토머스 쿤이 설명한 것처럼, 모든 전문 분과는 그 분야의 세계관이 연루된 각자의 어휘집(lexicon)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These days, many people are talking about interdisciplinary cooperation, or transdisciplinary dialogue. But everybody who has ever tried it knows that it is really difficult. Thomas S. Kuhn explains it. Every discipline, every professional domain has its own lexicon, and the lexicon of the discipline involves its worldview).” 학술대회 인사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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