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의 변명: 정책 보고서의 생산과 활용에 대해 묻다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이인건
catshowers@gmail.com


1.

연구를 대가 없이 하는 것은 어렵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과제를 통해 자신의 연구를 부양한다. 인건비, 재료비, 임대료, 각종 활동비 등을 과제로 충원한다. 한국과학기술원의 과학기술정책대학원도 정책용역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학생들은 연구 조교로 참여해서 정책 보고서를 쓴다. 정책 보고서에는 의뢰기관이나 조직이 당면한 문제를 분석하고 걸맞은 제언을 담는다. 연구 조교는 각종 2차 자료와 1차 증거를 수집하여 문제 분석과 정책 제언을 합리화하는 작은 논리와 주장을 적는다.

석사 1년 차에는 정책과제를 하는 것이 연구의 연습이라고 기대했다. 정책 보고서의 목차도 학술 연구의 일반적인 구성을 갖추기 때문이었다. 정책 환경과 선행연구 분석, 방법론 학습, 데이터 수집 및 분석을 경험할 수 있어서 학위 연구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첫 과제는 예상과 달랐다. 2015년, 모 기관의 미래 정책 작업에 참여했다. 기관이 지향하는 비전을 따라 몇 십 년 뒤에는 조직 구성과 기관이 활용하고 기관을 제약하는 제도가 바뀐다는 가정에서 발주된 과제였다. 거시적인 내용과 인적 구성, 업무 수행 방식, 대외 관계까지 제안하는 과제였다. 큰 그림부터 세부사항까지 그리는 만큼 연구진의 규모도 컸고 의뢰 기관도 밀착해서 내용을 협의했다.

우리 연구진은 미래의 기관이 갖는 대외 관계 구상에 참여했다. 이 연구의 가정은 몇 십년이 지난 후에 의뢰 기관이 시민사회와 지역 공동체에 지금보다 더 친화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 업무 수행 및 소통 방식에 변화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원래는 마감이 더 길어질 예정이었으나 회의가 미뤄져서 남은 시간은 일주일이 채 안 되었다. 전공이 아닌 내용을 60쪽 정도 적어 편집팀에 보내야 했다. 문헌을 찾는 것부터 시간이 많이 들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알아가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한 학기 선배는 술술 쓰고 있었다. 우리 모두 관련된 분야를 학습하거나 연구를 한 적은 없는데, 한 학기가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그는 일단 쓰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된다고 했다.

마감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문헌 조사를 토대로 정리하고 생각난 것을 어찌어찌 적을 수 있었지만,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결국 논문과 보고서를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다음에 그 문장이 보고서의 흐름에 맞도록 글을 바꾸고 있었다. 연구 표절 교육을 받을 때 이런 사례를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긴 문장을 쪼개고, 주어와 목적어를 바꾸고, 술어를 유사한 말로 쓰면 ‘복붙’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한 문장 한 문장을 새로 넣을 때는 그래도 복붙 이상의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연구윤리에 대한 질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초고를 제출했다. 피드백 결과, 내가 작성한 부분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전부 들어내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 피드백에서 기관의 장이 이 내용을 창의적이라고 평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편집팀은 내용을 40쪽 더 늘리자고 제안했다. 차라리 다시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 참에, 담당자가 내게 연락했다. 참고문헌과 기관의 백서를 보내줄 테니 원래 내용을 백서에 맞춰서 다시 쓰자고 했다. 대전역까지 찾아온 담당자들은 씩 웃으며 보고서를 쓴 사람이 교수님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고 교수님께서는 곡소리를 멈추지 않으시며 ‘성실한’ 작업을 약속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교수님께 혼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이후 정해진 결론과 참고문헌을 따라 다시 썼다. 이제 보고서 쓰기란, 그저 주어진 자료를 차근히 읽고 직접 인용을 할 부분을 추려낼 뿐인 일이 되었다. 만약 부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그때 내 언어로 채우면 된다. 기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 중 백서의 내용에 가장 유사한 것을 찾아 예시로 넣어 소개했다. 만약 그 제도의 사례 연구가 있다면 더욱 수월했다. 분량이 부족하지도 않았고 전문성이 필요한 내용의 이해 여부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마감에 맞춰 내용을 채웠다.

참여 기간이 종료되었다. 맡은 부분을 완료했고, 그제서야 별다른 수정 사항을 받지 않았다. 간간이 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최종 보고서의 발간을 앞두고 편집 총괄과 연구진 간의 업무 분배를 맡던 박사님이 이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두 번째 석사 학기가 시작되고 약 팔백여 쪽을 담아 보고서가 출판되었다. 보고서의 내용 중 일부가 언론에 오르내리며 작은 논란을 만들기도 했다.

 

2.

다음 과제가 시작됐다. 보고서를 쓰는 실력이 늘고 있었지만, 연구를 연습하기에는 부족했다. 2차 자료를 직접 생산할 때는 배우는 게 많았지만 일정 상 연구 방법을 연습하거나 문헌 조사를 충실히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내가 참여했던 과제는 학위 연구 주제와 잘 연결되지 않았다. 보통 우리 연구진은 교수님 한 두 분과 조교 서너 명으로 구성되었다. 동시에 짧은 과제를 두 개 정도 수행했는데, 과제를 학술지에 게재 가능한 연구로 끌어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교수님께서는 언제나 과제를 연구로 이어가자고 하셨으나 다른 일이 생겨서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하셨다.

과제 기간 중 일이 많지 않아 보이는 시기가 있었다. 그때도 교수님은 다른 일을 하고 계셨다. 가끔 전화 몇 통과 짧은 메일이 오간 후 교수님의 일이 시작되기도 하는 것을 본 적 있다. 발표자료를 만들고, 회담을 기획하며, 짧은 보고 문건을 만드셨다. 내가 좀 더 긴 주기를 두고 과제에 필요한 작은 부품들을 만들고 그 사이에 연구를 한다면, 교수님은 더 빠른 주기 속에서 연구할 틈을 내기도 어렵게 마감을 맞추고 있었다.

보고서를 통과시키는 것이 주된 목표가 되니 보고서에도 품질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학술지에 투고된 연구 원고는 엄밀한 동료 평가를 거친다. 보고서의 경우, 기관 담당 관리자가 마음에 찰 때까지 보고서의 품질을 검사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품질을 높여야 보고서가 통과할 수 있을까? 사안의 시급한 정도나 보고서가 최종 승인을 받기까지 거쳐야 하는 단계의 수, 관리자의 전문성이나 동원할 수 있는 행정적 자원 등이 영향을 줄 것이다.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원론적으로 정책이 의제 선정부터 제정까지 한 단락을 짓는 과정은 마치 문제, 정치, 정책으로 분리수거가 된 쓰레기통의 각 칸에서 각각의 요소를 적당히 꺼내 결합하는 것과 같다. 정책 과정 속에 있는 그 관리자와 공무원이 쓰레기통을 뒤적이게 된 여건과 의도에 따라 보고서의 ‘좋음’도 맥락마다 다를 것이다. 전문가와 의사결정자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대안을 담은 보고서란 품질 보증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고서의 품질을 높이는 것은 연구자 자신이지만, 과제의 목적은 연구자가 의뢰 대상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다. 과제 관리자는 외부 기관에서 온 연구자에게서 객관적으로 지지 받는 정책 제언을 기대한다. 관리자에게도 자료의 신뢰성과 주장의 타당성이 필요할 것이다. 검증하기 어려운 신뢰성은 전문가가 보증해야 할 요소가 된다. 의뢰 기관은 제언 받고자 하는 결론까지 이르는 논리의 타당성과 개별 증거가 가진 중요성을 판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을 비롯한 외부 기관에 정책용역과제를 의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의 연구자들이 대학의 연구자로서 할 수 있는 정책 제언이 있지는 않을까? 요청받은 제언을 반복하기보다는 문제를 돌아보고 대안을 모색할 여지가 있다면, 정책 의사 결정의 과정에서 외부 기관을 더 잘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3.

그래서 보고서의 역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과제가 포함된 정책이 모습을 갖추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연구자의 자리는 어디까지인지, 자리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궁금해졌다. 관리자가 생각하지 못했던 대안과 논리를 연구자가 제안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지, 연구자가 과제에 제안한 논리와 대안이 평가와 경합을 받을 수는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 질문은 내가 스스로 답하고 찾아가기엔 큰 물음이지만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과제를 정책 속에서 파악하려니 과제를 의뢰한 이들은 누구이며 그들이 어떤 맥락 속에 있었을지 알고 싶어졌다. 어떤 권한과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일을 맡길 수 있을까? 그가 처한 맥락과 일을 맡긴 의중은 무엇일까, 여기에 응답하는 교수님에게는 어떤 인센티브가 있을까?

제도화된 정책을 따라 파생된 과제는 큰 관점으로 보면 과제의 역할과 맥락이 모두 명시적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나는 융합 연구의 경향을 모니터링하고 신기술 탐색을 위한 기준을 만드는 과제를 한 적이 있다. 기존에 구축된 탐색 체계를 평가하고 새로운 기준을 개선방안으로 제안하는 일이었다. 의뢰 기관은 탐색 체계를 시작으로 기술개발, 인력양성, 사업화 등 신기술에 관한 연속선상에 있는 정책을 갖고 있었다. 탐색 체계는 첫 단계였다. 과제를 의뢰한 이유는 간단해 보였다. 제도에 따라 평가를 수행하고 대안을 논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과제가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과제 결과를 받을 사람과 활용할 사람은 명시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과제 진행은 익명이었다. 대부분의 보고서처럼 우리 연구도 목차 앞, 제출문에는 무슨 기관의 장 귀하 아래로 과제를 발주한 의뢰인은 어느 부서의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적지 않았다. 이 기관과 상위 기관은 과제의 결과물인 보고서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과제 종료를 앞두고 담당자가 바뀌기도 했다.

구체적인 맥락은 커다란 맥락에 가려졌다. 대부분의 보고서처럼 첫 장은 넓은 맥락에서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고령화 사회와 인구 감소, 제조업 경쟁력 제고,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 등 사회를 크게 바꿀 것만 같은 현상이 구체적인 지표와 함께 나열되어 문제의 심각성을 설득한다. 크고 굵직한 현상은 과제를 진행해야 할 당위성만 부여한다. 문제를 설명하는 구체적인 맥락은 다른 곳에 있다. 우리 과제에서 실상 평가가 필요하고 개선점을 도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존 탐색 체계나 새로운 기준에 따른 예상 결과가 아니었다.

탐색 체계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신기술을 선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훌륭한 체계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관적인 관심사를 갖고 투자를 하거나 개발 결과물의 사업화를 위해 산학연과 관계부처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국내에는 이미 타 기관들이 5년 이상 운영 중인 크고 작은 탐색 체계가 있었다. 과제 인터뷰 중 만난 약 30명의 전문가는 서로 다른 사례와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신기술 탐색부터 추진, 개발, 활용 과정까지의 일관성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현장의 연구자들이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연구하고 개발하며 다른 연구자들이나 기업의 수요자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것은 이 두 가지가 없다면 논할 수도 없었다. 연구개발계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잘 변하지도 다루어 지지도 않는 문제였다.

당시 연구진은 격주로 의뢰 기관에 20-30쪽 분량의 보고물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에 보고서를 써서 중간 보고나 과제 말에 몰아서 쓰는 일을 막아보려는 취지였다. 협력하는 연구 기관도 있었고, 개발한 체계를 바탕으로 시범 운영을 외주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교수님의 업무가 늘어나며 격주 보고가 지연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제 앞에서 연구진은 헤매고 관리자와 교신이 늘어지던 중, 급히 외주를 내어 시범 체계를 운영한 결과를 제출했다. 그 사이 변경된 관리자는 결과가 추상적이라고 생각하고 더 구체적인 결과를 요청했지만 과제 종료를 앞둔 시점이었다.

과제 일정을 초과하는 작업이 생기기 한 달 전 연구조교들도 걱정하고 있었다. 분명 의뢰 기관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교수님은 너무 바쁘셔서 빠르게 일이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교수님과 책임 조교가 과제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 보고서 작업을 했다. 근본적이었고 다른 종류의 지적이 필요해 보였다. 기관은 어떤 연유로 타 기관과 구분되는 나름의 체계를 갖추려 했을 것이고 그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새로운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원래 목적에 맞는 명확한 제언을 요청했기 때문에 작성은 더욱 어려워졌다. 끝내 신기술 중 일부를 선정해서 구체적인 탐색 결과를 예측해서 제출했다.

 

4.

신기술 탐색 체계 과제의 방향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모두가 알지만 잘 변하지 않는 그 문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가는 방법은 없었을까? 새롭게 도출된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과제의 제언도 변할 수는 없었을까? 몇몇 행정학 연구에 따르면 정책 보고서가 이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책 보고서의 주된 역할은 지식 전달이다. 정부부처에 있는 연구관리담당 공무원들에게 정책 보고서의 영향력을 질문한 결과, 허만형 등(2011)은 보고서가 정책과정에 주는 직접적인 영향력은 낮다고 주장한다. 보고서의 지식은 현실성도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식은 실질적 도구가 되기보단 주로 문제 정의와 해결책 제시의 정당화에 활용된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공무원들보다 정책 보고서의 지식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i]. 국책연구기관이 정책에 기여하는 바를 측정한 연구도 있다. 해당 기관에서 출간한 보고서의 우수성 평가 점수가 높을수록 공무원이 평가하는 기관의 기여도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기관장의 재임기간이 길어질수록 기여도 또한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연구를 수행한 이광훈 등(2014)은 기관장이 정부조직 출신 여부는 기여도를 높이지 않으며 전문성이나 기관장 재직기간이 더 중요한 변수라고 주장한다[ii].

보고서의 역할은 제언을 하는 순간 종료된다고 봐야할 것이다. 의제가 선정되고 제도로서 구체화되어 집행, 결과 산출, 평가까지 한 단락 짓도록 하는 것은 사람이고, 보고서는 그 과정에서 활용되는 작은 자원 중 하나이다. 지식과 대안은 정책 과정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맥락이 보고서의 품질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구관리기관의 국가정책기여도에 관계된 요인을 전문성과 대정부 관계 등으로 분석한 홍형득 외(2018)의 연구는 기관이 맺는 대정부 관계보다 기관의 역량인 전략/기획 전문성이 정책 기여도와 더 큰 양의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iii].

연구자가 정책 속에서 지식과 연구자의 역할을 모색하는 방법 또한 연구일 것이다. 과제는 종료되어도 정책은 끝나지 않는다. 과제를 의뢰한 사람은 그들이 활동하는 정책 과정 속에서 계속 의사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상을 논하고 신기술을 탐색 및 선정하는 작업은 정책 과정의 앞단과 관련이 깊다. 의제를 정하고 입법을 추진하는 과정과 유사한 점이 있다. 기존 정책에 변화를 원하는 사람과 조직이 제도로 확정되지 않은 대상을 논하고 특정 방향을 투영한다는 점이다. 제도 안으로 다른 의제를 가져오려고 할 때 의제를 추진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논리와 증거가 더욱 필요할 것이다.

의제를 추진하고 정책을 기획하는 사람을 명확히 조명한 연구는 많지 않다. 의제 선정과 입법 단계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정치의 기회를 활용하며 대안을 문제에 결합시키는 사람들은 다중흐름모형 이론에 잘 설명되어 있다[iv]. 우리 나라에서 다중흐름모형을 적용한 연구 중 상당수는 정책 추진가를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기도 하고, 추진가의 자원과 전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v]. 이를 지적한 장현주(2017)는 한국 사회의 다원주의적 정치가 취약하여 대통령이나 고위 공무원 집단이 정책을 선도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전문가 집단, 이익집단, 시민단체가 정책 선도가로서 법률의 제/개정과 지침 및 대책의 수립/변경 여부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장현주(2017)의 기초 통계량이 보여주듯 분석 사례에서 전체 선도 그룹 중 공무원과 대통령의 빈도가 훨씬 크다. 정책 평가 연구를 리뷰한 안국찬(2016)의 지적처럼 대부분의 연구들이 횡단적인 방법론을 취해서 장기적으로 의사 결정자가 보고서와 지식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고 대안을 제공하는 연구자들과 교류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vi].

 

뜻밖의 일들이 생겼다. 정책의 지형을 알 수 없던 과제가 가시적인 정책 변화로 이어졌다. 석사 때 참여했던 미래 정책 과제 보고서에 나온 내용이 정부 의제와 결합하여 이슈를 만들었다. 어떤 일을 거쳐 당시 보고서에 담긴 제언이 대안으로 부상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슈가 된 이후에도 계속 대안의 형태가 보고서와는 달라졌다. 확실한 것은 보고서를 쓴 이후 4년간 보고서와 관계된 사람들은 정치와 정책의 흐름을 타고 움직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보고서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만났다. 박사과정자격시험을 준비하던 2018년, 교수님을 돕기 위해 한 회의 현장에 갔다. 큰일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회의가 열리는데 속기록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연구관리기관과 출연연구소의 매니저들, 한 부처의 공무원들이 모여 있었다. 회의는 각 기관들이 개발 중인 신기술의 사업화 가능성을 타진하는 자리였다. 회의에는 정책 연구 기관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공무원은 직접 회의를 진행하며 듣고 싶어하고 묻고 싶어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보고서를 얼마나 활용하고 있었을까?

이듬해 봄에는 어떤 교수님께서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자문위원회에서 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에 갔다. 위원회는 정무직을 비롯한 고위 공무원들과 민간 자문위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분과 별로 민간위원들이 회의를 진행하면 공무원들이 자문을 구했다. 회의가 뜸해질 무렵, 정말로 4차 산업혁명이 있냐고 묻던 공무원들은 정책을 구체화해 가져왔다. 참관 경험을 나누던 교수님은 그 정책이 최근의 기술 변화에 잘 대응하는 기획이라고 평가했다. 청중 중 한 사람이 덧붙이며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에 가까울수록 경험이 많고 실적을 잘 내온 공무원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정책 기획의 결과물이 괜찮을지라도 최근 두드러진 정보통신기술의 변화를 의제로 선정할 때 이해 관계자들의 포괄적인 의견수렴을 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누군가가 의제를 정하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고 한편으로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제가 놓인 맥락을 묻고 관계된 사람들을 찾는 것은 조급함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흐름 속에서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모두가 알고 있으나 잘 논의되지 않는 문제를 응시하며 차근차근 증거를 수집할 수도 있고 새로운 방법론으로 잘 활용하지 않던 증거를 들어 논증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 와중에 과제도 하고 다시금 내용이 정해져 있어서 읽히지 않을 것 같은 보고서를 쓸 것이다. 하지만 보고서가 읽히지 않는 이유가 곧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이 연구자와 관리자 또는 정책의 결정자 사이에 지식이 오가는 과정이며 연구자가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문제를 알리는 과정이길 바란다. 정책 제언을 하는 것은 특정 집단의 이해를 해당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계와 전문가가 이전에는 제시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던 증거와 방법을 활용해서 비판적으로 옹호하고 회고하여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의뢰한 사람도 생각하지 못한 대안과 논리를 제안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언하는 사람은 신뢰할 만한 증거를 토대로 타당성을 갖춘 대안과 논리를 확장할 때 그들도 합당한 정치 행위자로 정책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i] 허만형, 정훈, 박치성 (2011), 「국책연구기관 정책연구의 지식활용에 관한 연구」, 『정책분석평가학회보』, 제21권 제4호, 145 – 166쪽.

[ii] 이광훈, 김권식, 박순애 (2014), 「정부싱크탱크의 정책기여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탐색: 자원이론의 관점」, 『행정논총』, 52권 2호, 92-118쪽.

[iii] 홍형득, 이광훈, 박광표, 황병용 (2018), 「연구관리기관의 역량이 성과에 미치는 영향 분석」, 『기술혁신학회지』, 제21권 제2호, 788–817쪽.

[iv] Kingdon, J. W. (1995), Agendas, Alternatives, and Public Policies (2nd ed.); New York: Addison Wesley Longman.

[v] 장현주 (2017), 「한국의 정책변동과정에서 나타난 정책선도가의 유형, 역할과 전략은 무엇인가? – Kingdon의 다중흐름모형에 대한 메타분석 -」, 『한국정책학회보』, 26권2호, 449-475쪽.

[vi] 안국찬 (2016), 「우리나라 정책평가 결과 활용 연구에 관한 비판적 고찰」, 『정책분석평가학회보』, 제26권 제3호, 223 –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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