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고고학의 탄생 : 신임 교수의 신생 실험실 세팅 관찰기


실험실고고학자
김연화
yeonwha@gmail.com

  1. 두근두근, 새 실험실[i]

어려서부터 나는 이상하게 실험실에 매혹되었다. 큰 굴뚝 아래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마솥이 놓인 가가멜의 실험실이 시작이었을까. 티비에서 종종 보던 형형색색의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가 즐비한 실험실은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과학실에 들어가서 실습을 하는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벽에는 비커가 가득한 낡은 나무장이 병풍처럼 서 있는 과학실에서 한쪽 끝에는 개수대가 붙어 있는 두꺼운 검정색 상판이 놓여진 실험대에 팔을 걸치고 뱅뱅 돌아가는 둥근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었다. 실험실이라는 공간에 대한 애정은 나를 연구중심대학으로 이끌었다. 학부생 시절엔 실험 수업을 수강하며 화학과와 생명과학과 학부 실험실에서 학기를 보내고 화학과의 다양한 연구실에서 연구참여를 하며 방학을 지냈다. 마침내 대학원에 입학해서 실험실에서 “살기”도 했다. 비록 대학원 생활은 힘들었지만 나에게 실험실은 여전히 묘하게 매력적인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애증이 더해져 알 수 없이 마음이 끌리는 공간이 되었다.

과학기술학을 공부하면서 실험실 연구(Laboratory Studies)에 가장 매료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과학자로 상주했던 공간을 관찰자가 되어 바라보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건조하게 서술된 실험실 연구 논문들을 읽으면서도 그 공간 안에 있었을 과학자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학위논문은 실험실 연구가 되었다[ii]. 1970년대 과학기술학자들은 과학의 실행을 보기 위해 들어간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과학지식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과학자들의 지식 문화는 어떠한지를 관찰하고 연구했다(Latour & Woolgar 1986, Knorr-Cetina 1981). 실험실 연구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지는 인공물, 국가 간 실험실 문화 비교, 실험실 내 구성원들 간의 인식론적 위계질서 연구로 이어지다가(Lynch 1985, Traweek 1992, Doing 2004) 점차 과학기술학의 주요 무대에서 멀어졌다. 과학 지식이 구성되는 공간이 실험실 밖으로 확장되면서 학계에서는 실험실 연구가 끝난 것처럼 이야기되었다. 하지만 나는 왜 어려서부터 실험실이라는 공간에 끌리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궁금증이 남아 있었고,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먹고 자고 생활하는” 그 공간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아가 단시간 내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한국의 과학연구가 이루어진 그 공간에는 무슨 특징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학위논문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실험실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싶었다.[iii]

때마침 가까운 분이 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연구실을 구축하게 되었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실험실의 민족지(ethnography) 연구를 하겠다는 나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iv] 수많은 대학 연구실이 있지만 외부에 주로 알려지는 것들은 한창 성과가 나오고 있는 중견 교수의 연구실이다. 그동안 발표된 실험실 연구들도 대체로 잘 차려진, 어느 정도 수립된 실험실을 분석한 것들이었다. 그 실험실들이 초기에 어떤 방식으로 수립되고 세팅되었는지, 어떻게 연구가 시작되고 설정되는지, 실험실을 구성하는 것들이 어떻게 실험실 안으로 들어왔는 지에 대한 연구는 찾기가 어려웠다. 본격적으로 연구책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할 과학자는 어떻게 실험실을 차리고 꾸려갈까? 대학의 실험실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임용될 때 실험실 차리는 방법을 배우는 걸까? 연구 장비는 어떻게 실험실로 들어올까? 실험실이라는 공간은 어떻게 매력적이 되는가? 궁금증이 꼬리를 이었다.

신생 실험실이 위치한 곳은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제2실험동 3층에 있는 공간으로 직전 해까지 물리학과의 한 연구실이 주사 터널링 현미경(Scanning Tunneling Microscopy, STM) 장비를 두고 있던 곳이었다. 2018년 1월 방문했을 때에는 텍스타일이 없이 각종 배관과 전선이 드러난 천정, 정리되지 않은 가벽, 다 처리되지 않은 문헌 등 이전 실험실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2018년 6월 신임 교수가 부임하면서 공간이 정리되고 배관 및 배선 공사를 포함한 리모델링이 진행되어 깨끗하고 반듯한 새 공간으로 바뀌어갔다. 실험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벽은 전면이 창으로 되어 있어 채광도 좋았다. 연구실 문밖에는 “분자집합체 구조화학(Molecular Cluster Structural Chemistry) 연구실”이라는 팻말이 걸렸다. 밝고 넓은 실험실의 한 가운데에는 아마도 최신형 질량분석기가 위치할 것이다. 거기에 빳빳하게 다려진 새하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시료를 분석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대학교에서 학생을 제외하고 가장 젊은 층인 신임 교수만큼 신선하고 반짝거리는 실험실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2. 낡은 것들의 역습

초반에는 실험실 세팅도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신임 교수가 미리 그려둔 배치도에 의하면 입구 쪽에는 실험 전처리를 위한 공간을 두고, 한 쪽에는 연구의 중심이 될 이온 이동도 질량분석기를 놓고, 다른 한편은 빈 공간으로 두어 장기적으로 직접 질량분석기를 제작할 생각이었다. 여러 업체에서 주고 간 카탈로그에서 고른 실험대와 실험장 등의 가구, 흄후드와 시약 보관장, 냉장고와 온장고가 차례대로 들어왔다. 곧 실험실을 쾌적하게 유지시켜줄 항온항습기도 설치되었다. 이제 실험실은 창 밖의 계절 변화와 관계없이 섭씨 25도, 습도 40%를 유지할 것이다. 실험실의 가운데에 널찍하게 남겨둔 공간에 질량분석기만 들어오면 될 것이었다.

<그림 1>초기 실험실 배치 구상도 ©서종철

질량분석기는 분자집합체 구조화학 연구실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다. 원자들은 고유의 질량을 지닌다. 분자도 마찬가지로 이를 이루는 원자에 따라 고유한 질량을 지니기 때문에 질량분석을 통해 시료 속에 포함된 화합물을 특정할 수 있다. 질량분석기는 시료 속에 들어 있는 분자들을 이온화하여 극성을 띄게 한 후, 전기장을 걸어 이온화된 분자들을 이동시킨다. 이온의 전하가 같을 때 이온의 이동거리는 분자의 질량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분자의 이동거리를 측정함으로써 분자의 질량을 계산할 수 있다. 질량분석기의 프로그램이 출력하는 측정된 전하 대비 질량 (m/z) 피크(peak)의 패턴을 보고 시료 속의 화학물질의 특정하고, 질량분석을 응용하여 화학물질의 구조나 반응 매커니즘도 알아낼 수 있다. 질량분석기는 개발 초기에는 물리화학 연구실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분석 실험실의 필수 장비가 되었고, 화학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유기화학 실험실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여러 기업과 연구소에서 품질관리와 분석을 위해 질량분석기를 구비해 두고 있다. 질량분석기의 주요 소비자가 기업이 되면서 전문업체에서 판매하는 질량분석기의 가격도 고가로 형성되었다.

반면 신임 교수의 초기 정착금은 그리 크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신임 교원의 초기 연구비(스타트업 펀드)가 감소하는 추세였다. 게다가 개교 30주년을 넘긴 포스텍은 설립 초반 임용된 교수들이 은퇴하면서 신임 교수를 대거 임용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개별 신임교원에게 돌아가는 초기연구비가 더 적어졌다. 적은 정착금으로 연구에 필수적인 고가의 장비를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질량분석 장비를 직접 제작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조립을 위한 부품들을 해외에서 구매해야 하며, 설계와 조립을 위한 전문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게 드는 선택이다.[v] 이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연구에 맞는 질량분석기를 제작하되 초기부터 바로 연구에 투입할 수 있는 완제품을 하나 마련할 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초기 연구비가 완제품을 구매하는데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신임 교수가 부임하기 전에 포스텍에서 질량분석 연구를 하던 교수가 타대학 화학과로 자리를 옮기면서 두고 간 질량분석 장비 두 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부임한 후 확인해 보니 한 대는 불용처리되어 폐기되었고, 한 대는 장기 임대 방식으로 외부 연구소로 반출되어 있는 상황이라 활용이 어려운 상태였다. 학교가 제공한 초기 정착금으로 구매해 학교의 자산으로 등록되어 남겨진 장비들이었지만, 장비를 사용하던 연구자가 자리를 옮기자 더 이상 사용되지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반출된 장비를 들여올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사라졌을 때, 학과의 몇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1) ‘활용할 수 있는’ 장비를 저장하기

은퇴를 앞두고 실험실을 정리하던 한 교수가 실험실에 있는 고장 난 지 오래되어 작동하지 않는 질량분석기 두 대를 포함하여 실험 장비와 물품을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해당 연구실은 질량분석을 중점으로 하는 물리화학 연구실로 신임 교수가 이 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연구실에 있는 장비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신임 교수는 사실상 회생이 불가능한 수준의 장비들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부품을 떼서 추후에 질량분석기를 제작하는데 사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스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질량분석기는 세 개 이상의 모듈로 이루어지는데, 시료를 이온화하는 챔버와 이온화된 분자들을 이동시켜 질량분석을 수행하는 챔버, 이를 측정하는 감지기가 기본으로 구성되고 경우에 따라서 이온화된 분자를 가둬두거나 쪼개는 모듈이 추가되기도 한다. 여기에 질량분석이 이루어지는 동안 시료 분자가 다른 기체 분자와 충돌하지 않도록 챔버를 진공으로 유지해주는 다양한 펌프도 여러 개가 붙어 있다. 질량분석기가 작동을 하지 않더라도 장치의 부품과 펌프는 분해하여 다른 장비에 사용하면 연구비를 아낄 수도 있을 터였다.

약 일주일에 걸쳐서 실험 장비와 물품들의 이동이 진행되었다. 물리화학 연구실의 연구원들이 이동할 물품을 정리하면서 빈 철제장, 서랍장 일부를 새 연구실로 옮겨왔다. 5일 차엔 본격적으로 이사를 진행했다. 화학관 1층의 물리화학 실험실에서 화학관과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제2실험동 3층에 위치한 분자집합체 구조화학 연구실로 장비들을 옮겨야 했다. 아침에 연구실 이사 전문업체에서 트럭 한 대와 지게차, 10명 이상의 인부들이 화학관의 물리화학 연구실로 왔다. 크기가 큰 장비는 실험실을 빠져나가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실험실 문보다 높은 장비의 높이를 낮추기 위해 장비가 고정되어 있던 테이블의 바퀴를 풀었다. 그리고 이동을 위해 여럿이 함께 장비를 들어 이동 가능한 다른 바퀴를 아래에 대고 천천히 밀면서 실험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실험실 바로 옆에 건물 밖 주차장과 바로 연결된 문이 있었지만 장비의 크기 때문에 화학관 복도를 한참 가로질러 넓게 열리는 정문을 통해 건물을 빠져나와야 했다. 대포 같은 긴 원통 챔버가 가로로 놓인 거대한 질량분석기와 키가 큰 질량분석기, 약 0.5톤 무게의 자기장 챔버, 광학 장비를 설치할 수 있는 충격 흡수 테이블, 레이저 생성기 등 크고 무거운 장비들이 먼저 트럭으로 옮겨졌다. 이번에는 제2실험동 3층으로 장비를 올려야 했다. 다행히도 가장 큰 질량분석기가 약 5센티의 여유 간격을 두고 건물의 화물용 승강기에 실렸다. 바퀴와 수레, 도르래 등을 이용하여 인부들이 장비와 물품을 힘겹게 옮겼다. 그렇게 은퇴하는 교수의 실험 장비들이 신임 교수의 실험실로 옮겨왔다. 신형 질량분석기를 들여놓기 위해 비워두었던, 왁스로 반짝이던 바닥의 광택은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낡은 물건들에 가려졌고 낡은 기기가 들어오면서 실험실 바닥 여기저기에 상흔이 생겼다.

옮겨온 물품들은 바로 사용할 수 없는 장비들이었기 때문에 실험실에 정식으로 자리를 잡기보다는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놓였다. 게다가 실험실로 이동한 물품들에는 사용 가능한 부품과 고쳐서 사용할 수 있는 장비 외에도 더 이상 수리가 불가능한 장비, 필요하지 않은 부품들, 재활용이 불가능한 모듈, 해체될 장비를 지탱하는 것 외에는 효용성이 없는 테이블도 포함되어 있었다. 추후에 확인한 것이지만 사용 가능할 것이라 예상했던 장비 중에 회생이 불가능한 것들도 있었다. 밝고 깔끔했던 실험실은 어느새 해체된 질량분석기 모듈을 비롯한 각종 낡은 장비들이 저장된 창고처럼 되어 버렸다. 실험실 내에서 이동하려면 물품들이 담긴 상자들을 요리조리 피해서 발을 디뎌야 했다. 저장창고가 되어 버린 공간을 다시 실험실로 복원시키기 위해서라도 당장 연구에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했다.

<그림 2> 낡은장비들이 들어오는 중. 아직은 바닥이 반짝반짝하다(2018.8.) ©김연화

2)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장비를 구출하기

이번에는 유기화학 연구실에서 연락이 왔다. 질량분석기는 물리화학 실험실에서 개발되고 연구되었으나 이제 물리화학이나 분석화학 분과만의 장비가 아니다. 유기합성 연구실에서 합성 결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핵자기공명(Nuclear Magnetic Resonance) 장비를 사용하는 것처럼 질량분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번엔 은퇴를 앞둔 유기화학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사용하지 않는 장비를 정리하면서 비교적 작은 크기의 질량분석기를 가져갈 의사가 있는지 물어왔다. 신임 교수는 당장 사용이 가능한 장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장비가 잘 작동한다면 가져올 의사가 있었다. 이를 위해 먼저 장비가 사용 가능한지를 파악해야 했다.

유기합성 연구실의 연구원들에게 장비 담당자가 누구이며 장비의 상태가 어떠한지 물었으나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유기합성 연구실이었기 때문에 질량분석 장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 혹은 테크니션은 없었으며, 대학원생들이 돌아가며 장비를 청소하는 정도로만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장비를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하고 사용하지 않은 채로 한참을 방치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장비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직접 장비를 작동시키며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유기화학 연구실의 질량분석기는 전자분무이온화(Electro-spray Ionization, ESI) 방식으로 이온화를 시키는 모듈과 시간비행형(Time Of Flight, TOF) 분석모듈 외에 시료의 전처리에 사용되는 고성능액체크로마토그래피(High Performance Liquid Chromatography, HPLC)와 질량분석기 가동을 위한 펌프 등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작은 크기의 ESI-TOF였다. 장비와 연결된 질소통을 새 것으로 교체하고 장비를 켰다. 하루를 기다렸지만 장비 내 압력이 충분히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간 원인을 진단해 본 결과 장비에 달린 펌프의 용량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어 실험실에 있는 펌프(물리화학 연구실에서 가져온!)를 가져가 추가로 연결했다. 추가 펌프로 장비 내 압력이 충분히 낮아진 것을 확인하고 시료를 주입하여 장비의 분석 성능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장비가 오래된 것에 비해 성능이 좋았다. 전문인력이 없어서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던 것 같았던 장비는 역설적으로 해당 실험실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아 새것에 가까운 상태였다. 신임 교수와 학생들이 수일에 걸쳐 두 연구실을 오가며 진행한 장비 성능 확인 절차는 연구실로 해당 장비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확인하는 면접 절차 같았다. 다만, 일반적인 면접과는 달리 지원자가 자신의 성능을 최대한 보일 수 있도록 면접관들이 질소, 펌프, 시료 등을 제공하며 도와주었다. 면접에 합격한 장비는 연구실로 옮겨졌다. 실험실을 차지하고 있던 낡은 장비들을 이리저리 옮겨서 공간을 만들고 ESI-TOF 질량분석기를 놓았다.

이번엔 포스텍 생명공학연구센터 공용장비실에서 연락이 왔다. 최근까지 사용한 매트릭스보조레이저탈착-탄뎀시간비행형(Matrix Assisted Laser Desorption Ionization-Time of Flight/Time of Flight, MALDI-TOF/TOF) 질량분석기를 불용처리할 예정이니 필요하면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장비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검출기 두 개 중 하나가 작동하지 않지만 장비가 오래되어 제조업체가 더이상 서비스를 해주지 않아 수리할 수 없었다. 펌프 하나의 상태도 좋지 않지만 장비의 이동을 위해 바로 전날 전원을 끌 때까지도 사용했던 장비라고 했다. 방문하여 직접 확인한 결과 비교적 관리도 잘 되어 보였으며 최근까지도 사용했음을 확인받았기에 별다른 확인 조치 없이 실험실로 옮겨왔다. 이미 다른 물건이 가득 쌓여 발 디딜 틈 없는 실험실이었지만 부품 사용을 위해 해체를 기다리던 장비들을 건물 내 창고 공간으로 이동하여 꾸역꾸역 자리 한 칸을 마련하였다. 길이 2.3 m, 높이 1.4 m에 달하는 MALDI-TOF/TOF가 들어오자 실험실 공간은 완전히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간을 내는 게 쉽지 않아 성인의 가슴 높이까지 오는 큰 장비를 실험실 입구에 놓은 것이다.

장비를 켜고 확인하니 들은 것처럼 검출기 하나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문제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다음날 장비에 연결된 펌프에서 기름이 새어나왔다. 깨진 펌프를 떼어내고 실험실에 있던 다른 펌프(역시 은퇴하는 연구실에서 가져온 것!)를 임시로 부착하여 압력이 충분히 떨어지는지 확인하고 장비 테스트용 시료를 넣었다. 측정 결과 분석 성능은 사용에 문제가 없었으나 장비 캘리브레이션(calibration)이 필요했다.[vi] 결과 peak들의 위치가 조금씩 어긋난 것이다. 질량분석기는 분자이온의 질량을 측정하다보니 질량값 1의 오차만으로도 완전히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기에 정확한 값의 측정과 출력이 매우 중요하다. 실험실에 있는 캘리브레이션용 시료 샘플을 이용하여 장비 캘리브레이션을 마치고 임시 펌프를 새로 구매한 펌프로 교체하였다.

ESI-TOF와 MALDI-TOF/TOF 장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용가능한 장비가 없어서 연구원들은 실험을 위해 다른 연구실의 질량분석기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다. 장비를 미리 예약하고 시간 맞춰 해당 연구실에 방문하는 절차가 이제 사라지고 자신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vii]

<그림 3> 현재 실험실 전경. 뒤쪽 가운데 창가에 ESI-TOF, 앞쪽 왼편에 베이지색 MALDI-TOF/TOF, 뒤쪽 왼편에 흰색 이온이동도 질량분석 장비가 있다. (2020.7.) ©김연화

3. 실험실 고고학의 탄생

신임 교수는 부임하면서 자신의 연구 주제인 ‘이온 이동 질량분석을 이용한 구조화학 (Structural Chemistry using Ion Mobility Mass Spectrometry, SCIMMS)’을 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웠고 이는 연구실 배치 구상도로 물질화되었다(Hannaway, 1986). 그러나 연구실 세팅은 다르게 현실화되었다. 실험실은 구상도와 유사하게 시료 전처리, 최신형 완제품 질량분석기, 추후 장기적으로 실험실에서 제작할 질량분석기를 위한 세 구역으로 나뉘어지지만, 시료 전처리 공간엔 장비들이 침범했고, 연구실의 핵심 장비인 이온 이동 질량분석기는 최신형이 아닌 중고제품이며, 직접 제작할 질량분석기를 위한 공간에는 은퇴한 교수의 연구실에서 온 장비와 물품들이 가득 쌓여있다. 그리고 구상도에는 없던 ESI-TOF와 MALDI-TOF/TOF 질량분석기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있다. 교수의 이상적 계획은 필수 연구 장비의 너무 높은 가격, 충분하지 않은 초기 정착금, 예상보다 많은 학생연구원들, 숙련된 전문인력의 부재 등의 현실 속에서 변경되었다.[viii] 현재 실험실은 이상과 현실의 타협의 결과다. 그러나 이는 완성형이기보다는 진행형으로 실험실은 연구자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조율되며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중(lab in the making)이다.

헌 물건들이 가득 찬 “새(new)” 실험실을 바라보다 낡은 장비들에 붙어 있는 둥근 자산관리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장비가 학교의 자산임을 알려주는 스티커에는 자산 집계가 시행된 연도가 찍혀 있는데, 자산관리는 매해 시행되므로 장비가 학교 연구실에 들어온 해부터 폐기되지 전까지 매년 스티커가 한 장씩 붙는다. 낡은 장비에는 은퇴하는 교수가 부임한 해부터 최근까지의 연도가 찍힌 스티커가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일부 장비에는 포스텍이 아닌 미국 대학의 상징이 찍힌 스티커도 붙어서 장비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는 장비들에도 최근 연도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사용되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비는 실험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기회가 되면 고쳐서 다시 사용하겠다는 연구자의 바람이었을까, 새 장비가 작동하던 순간을 잊지 못하는 미련이었을까. 이 장비들은 과거에 어떤 연구를 수행했을까. 옮겨진 실험실에서 다시 연구에 투입될까.

긴 역사를 지니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여러 연구자들을 만났을 장비들 사이를 지나다니고 있자니 실험실이 아니라 박물관에 들어온 기분마저 들었다. 나의 연구현장인 실험실은 계획대로 깔끔하게 세팅되어 가는 공간이 아니라 발견되길 기다리는 낡고 오래된 물건들이 쌓여 있는 일종의 발굴현장이 아닐까.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의 용도와 활용 방식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유추하는 고고학이 실험실 현장 연구를 설명하기에 어울리는 듯했다. 차이가 있다면 실험실이라는 현장에서 발굴된 장비들은 다시 실험실이라는 공간에서 진행 중인 과학 연구에 투입된다는 점이다.

낡은 장비가 다시 활용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이전의 역사만을 품고 유물로 남아 폐기될지 여부는 돌봄(care)과 연계된다[ix]. 불용처리되어 폐기될 위험에 처했던 낡은 ESI-TOF와 MALDI-TOF/TOF는 연구자에 의해 고장난 펌프가 교체되고 캘리브레이션이 되고 새로운 질소통이 연결되는 등의 과정을 거쳐 다시 연구에 투입되었고, MALDI-TOF/TOF 장비는 화학관 구성원들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 운영되고 있다[x]. 이는 앞서 언급한 몇 년전 고가의 신형 장비가 연구책임자인 교수가 타학교로 이동하자 남겨진 채로 연구에 투입되지 못하고 폐기된 사례와 대비된다. 지금은 연구에 활용되고 있는 장비들도 더이상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하면 다시 불용처리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실험실 한 켠에 놓인 부품들도 언젠가는 장비의 일부가 되어 연구에 투입될 수도, 고철이 되어 폐기될 수 있다. 실험실 고고학은 돌봄을 통해 연구 현장에서 실험실의 유물들이 다시 과학 연구자와 관계를 맺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는 과정에 주목한다.

실험실 연구는 과학의 실행에 주목하면서 과학 지식의 구성, 과학자들의 문화, 과학기술의 물질성을 세밀하게 보여주었지만, 정작 실험실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해서는 비교적 최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Gieryn, 2008; Kaji-O’Grady et.,2019). 실험실은 언뜻 정형화되고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각종 연구 장비와 실험도구, 실험대를 포함한 가구, 실험실 공간을 쾌적하게 유지해주는 장치들과 소모품과 같은 비인간 행위자들이 활발하게 드나들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공간이다. 이는 실험실을 둘러싼 다양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그렇게 만들어진 지형도는 실험실에 고유성을 부여한다. 실험실 고고학은 물질들을 통해 이 실험실만이 지닌 특징을 읽어낸다.

다시 작동을 시작한 오래된 장비들, 언제 가동될지 모를 낡은 것들, 중고품들, 실험실에서 재조립되기를 기다리는 부품들, 폐기를 기다리는 고장 난 것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실험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바닥에 대충 놓인 전선들을 피해 발을 디디면서 한때 이 전선들로 연결되어 전원을 공급받았을 장비들을 상상해본다. 뽀얀 먼지 속에서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이야기가 가득한 실험실 현장에 들어서며 다시 가슴이 두근거린다.


참고문헌

Doing, P. (2004), “‘Lab Hands’ and the ‘Scarlet O’: Epistemic Politics and (Scientific) Labor”, Social Studies of Science, Vol. 34 (3), pp. 299–323.

Gieryn, T. F. (2008), “Laboratory Design for Post-Fordist Science”, Isis, Vol. 99 (4), pp. 796-802.

Hannaway, O. (1986), “Laboratory Design and the Aim of Science: Andreas Libavius versus Tycho Brahe”, Isis, Vol. 77 (4), pp. 585-610.

Kaji-O’Grady, S., Smith, C. L. and Hughes, R. eds. (2019), Laboratory Lifestyles: The Construction of Scientific Fictions, Cambridge: MIT Press.

Knorr-Cetina, K. (1981), The manufacture of knowledge: an essay on the constructivist and contextual nature of science, New York: Pergamon Press.

De Laet, M. and Mol, A. (2000), “The Zimbabwe Bush Pump: Mechanics of a Fluid Technology”, Social Studies of Science, Vol 30 (2), pp. 225-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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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our, B. (1996), Aramis or the Love of Technolog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Lynch, M. (1985), Art and Artifact in Laboratory Science: A study of Shop Work and Shop Talk in a Research Laboratory,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Traweek, S. (1992), Beamtimes and Lifetimes: The World of High Energy Physicist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김연화(2015), “봉한관에서 프리모관으로: 과학적 연구대상의 동역학”,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i] 일반적으로 실험실은 실험장비가 있는 공간을 의미하며 연구실은 실험실과 연구원 사무실을 포함하여 연구가 진행되는 공간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본 글에서는 실험실과 연구실을 느슨하게 구분한다. 실험장비가 위치한 공간임을 강조하기 위해 실험실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나 경우에 따라 연구실이라는 용어를 혼용한다.

[ii] 9개월간의 참여관찰을 통해 경락이 실험실에서 과학적 연구대상으로 구성되는 과정을 연구했다(김연화, 2015)

[iii] 학위논문을 위한 실험실연구를 수행할 때 왜 국가과학자의 실험실을 분석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소수의 국가과학자의 실험실을 우리나라 실험실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또한, 현재까지 대부분의 실험실 연구가 북미와 유럽의 실험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음을 상기해볼 때, 우리나라의 실험실 연구가 더 다양하게 많이 진행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iv] 나는 2018년 6월부터 포스텍 화학과 분자집합체 구조화학 연구실에서 민족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v] 신임 교수가 임용되기 전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한 프릿츠하버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는 연구원들이 질량분석기를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연구소에 장비 제작을 돕는 전문 엔지니어들이 상주하는 워크숍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vi] 캘리브레이션(calibration)은 교정이라 번역되나 글에서는 실험실에서 쓰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측정기기의 정밀도와 정확도를 확보하기 위하여 측정값을 표준값에 맞추어 보정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정확한 값을 알고 있는 표준시약을 측정하여 계측결과를 표준시약에 제시된 값과 비교하여 장비를 보정한다.

[vii] 이후 실험실엔 신제품은 아니지만 중고로 구매한 이온 이동도 질량분석기(Ion Mobility-QTOF Mass Spectroscopy)가 추가되어 연구실의 중심 연구주제와 관련된 실험을 맡고 있다.

[viii] 현실이 반드시 제약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불용처리될 장비이긴 하지만 이를 내어 준 것과 같이 동료 교수의 선의도 있다.

[ix] 기술의 성공과 실패를 기술에 대한 사랑과 돌봄으로 설명한 라투르, 라엣과 몰의 논의를 참고하라(Latour, 1996; De Laet & Mol, 2000).

[x] 장비에 대한 연구자의 돌봄뿐 아니라 구성원 간의 돌봄도 존재한다. 장비를 바로 폐기하지 않고 가져갈 의향이 있는지 물어본 이의 마음을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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