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에서 필드하기: 숲과 산림과학, 인류학적 현지조사의 뒤얽힘에 대하여


존스홉킨스대학교 인류학과 박사수료
명수민
smyung1@jh.edu

숲으로 들어가기

“무단출입 및 임산물채취 금지. 산림자원법 제73조: 3년 이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 벌금 (위반시 고발조치).” 법의 언어와 산세리프 글꼴로 상투적인 경고를 날리는 플래카드를 무심코 지나치면, 철제 게이트가 새벽부터 달려온 낡은 SUV의 길을 막아선다. 게이트에 걸린 녹슨 자물쇠를 풀고 길을 트면 ‘임도(林道)’라 불리는 울퉁불퉁한 산길을 따라 필드로 이동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월하산(가명)[1] 의 구불구불한 임도를 따라 새로운 연구 후보지에 방문할 것이다. 현장을 확인하고 연구를 할 만하다는 판단이 들면, 우리는 그곳이 새로운 사이트라는 표식을 몇 가지 남길 것이다. 사이트 표식은 멀리서도, 또 누가 언제 찾아와도 눈에 쉽게 띄어야 한다. 언뜻 사소해보이지만, 표식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숲을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며, 규약이자 작은 인프라이다.

그림 1. 플래카드

우리가 오늘 꾸려온 짐은 평소보다 단출한 편이다. 새 사이트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게 도와줄 GPS 장치, 표식에 쓸 형광색 테이프와 지주대, 지주대를 땅에 박을 고무망치, 시야와 진로를 막는 식생을 정리할 전정가위, 50m 줄자, GPS 좌표가 인쇄된 종이와 필드노트, 마실 거리와 간단한 요깃거리 등이다. 다음 번에 우리가 월하산을 방문할 때는 또 다른 도구들이 필요할 것이고, 그때 우리는 또 다른 표식과 흔적들을, 또 다른 장치들을 이곳 월하산 숲에 남기고 관리하게 될 것이다. 고라니와 멧돼지, 뱀, 말벌을 비롯한 동물과 수백 종의 식물, 그보다 더 많은 미생물 같은 월하산의 거주민들은 숲에 계속 살아갈 뿐이지만, 월하산의 방문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숲을 ‘필드’로 인식하고 경험하며, 과학적 지식의 생산을 위해 새롭게 구획하고 기입하고 등록한다.

숲-필드에서 연구하기

     서울 남부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경기도의 월하산은 약 40년 전부터 숲과 관련된 수많은 현지조사(필드워크) 및 실험이 이루어져 온 산림 연구의 중심지 중 하나다. 월하산 숲에 설치된 수십 미터 높이의 생태 타워 몇 곳에서는 국지 기상 데이터를 비롯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고, 숲과 대기 사이의 탄소를 포함한 물질들의 순환 등을 측정한다. 타워 주변에는 토양의 탄소 호흡을 측정하는 챔버도 설치되어 있다. 연구 대상 개체목에는 관리번호 태그와 연간 생장을 측정하는 금속 링이 부착되어 있고, 수관에 흐르는 수분의 열차이를 측정해 각 개체목과 임분(stand), 숲 생태계 단위의 증산량까지 추정할 수 있는 바늘 모양 장치도 꽂혀 있다. 숲 바닥을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굵은 전선을 수십에서 수백 미터까지 따라가면, 숲의 미세먼지 저감효과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백엽상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숲 가장자리의 묘포장에서는 기후변화에 대비하는 “차세대” 수종 후보로 선정되어 실험에 동원됐던 묘목들이 수년 간의 실험이 끝난 뒤에도 (잡초들과 함께)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림 2. 월하산 생태 타워에서 내려다 본 수해(樹海). ©maeilwj

위에 나열한 사례는 월하산에 설치된 연구 인프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산림 분야의 세부 전공들, 이를테면 생태학, 생리학, 수문학, 조림학, 보호학, 토양학 등과 관련된 사이트들이 월하산 숲 곳곳을 채우고 있다. 나무들이 생장을 멈추는 겨울에는 과학자들의 방문 빈도가 최저점을 찍는다. 과학자들은 나무들이 잎과 꽃을 피우는 봄부터 숲에 들르기 시작해 생장량이 왕성한 여름에 가장 자주 방문하며, 가을부터는 서서히 방문 횟수를 줄여나간다. 숲을 찾은 과학자들은 “야장”이라 불리는 노트를 들고 다니며 숲의 변화를 모니터링하거나, 노트북과 케이블을 이용해 필드 관측 장비에 저장된 수십만 개의 숫자들을 실험실로 옮기고, 이동형 측정 장비로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하기도 한다. 필드 장비와 시설이 부식되거나 야생 동식물의 간섭 등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이들을 유지/보수하는 이른바 “메인테이너(maintainer)”의 역할도 일상 업무다. 장마철 습기를 먹고 고장난 공기펌프, 멧돼지가 걷어차 깨지고 널브러진 강우량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관측 센서도 확인하고 교정(calibration) 해주어야 한다. 길다고 하기 어려운 한국 현대사에서도 비교적 연구사가 오래된 숲이다 보니, 월하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지난 패러다임의 유산으로 여겨져 버려지거나 연구가 끝난 뒤 잊혀진 사이트들도 많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같은 사이트에서 십 수년 째 장기 데이터를 수집하기도 하고, 새로운 연구 과제를 구상하고 아이디어를 얻을 때에도 이곳을 자주 찾는다.

상황 짓는 과학과 필드워크

과학사학자 로버트 콜러(Robert Kohler)는 필드과학자들의 실행을 일컬어 “상황 지어진 과학(situated sciences)”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상황 짓는 과학(situating science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2] 숲-필드에서의 연구는 과학적으로 적절한 상황을 무대에 올리기 위한 개입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필드과학자들은 단순히 눈 앞에 주어진 숲을 무대로 삼아 연구하지 않고, 숲에서 각종 실험을 하기도 하고, 연구목적에 맞게 숲을 조작하기도 하며, 잘 정립된 연구 방법이라 하더라도 현지 상황에 맞게 조율하며 연구 디자인을 수정하기도 한다. 다시 콜러의 언어를 빌리자면, 이렇게 “상황 짓는” 과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생명의 상황”은 “과학의 상황”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이는 필드에서의 시간이 곧 노동의 시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숲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은 끝이 나지 않는다.[3] 산에 오르는 일이 많은 전공에서는 40대가 되면 무릎 문제로 거의 은퇴를 해야 한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까지 나온다. 월하산에서 인생의 특정한 시기를 보내며 건강과 데이터를 교환한 연구자들은 월하산관리소의 1층에 놓인 진열대에 출판물을 전시하기도 한다. 한 스태프는 자부심을 담아 이들을 “월하산 동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이제 필드과학 분야의 어떤 논문을 읽기만 해도 노동하는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리게 되었다.

그림 3. 노동의 부산물

이렇듯 나는 산림과학자들, 특히 필드과학자들의 숲에 대한 과학적 실행에 대한 필드워크(현지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나는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계의 변화와 숲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현지조사와 실험에 동행하고, 실험실 안팎에서의 일상을 함께 하고 있다. 나는 이들을 따라다니면서 월하산은 물론 전국 각지에 있는 산과 수목원, 학술림 등의 사이트에 방문하고 있다. 열대우림에서 보노보 필드과학자들에 대한 현지조사를 진행한 인류학자는 “인류학자들은 필드과학자들이 작업을 통해 습득하는 운동감각적, 정동적, 개념적 기술들을 이해함으로써, 움직임과 신체, 느낌, 의미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고 정리한다.[4] 여기서 더 나아가서 나는 필드과학자들이 숲-필드에서 습득하고 동원하는 “운동감각적, 정동적, 개념적” 전문성들이 어떻게 숲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이해의 생성으로 이어지는지 살펴왔다. 물론 숲은 각종 최신 모델과 시나리오, 원격 탐사(remote sensing) 등으로도 연구되어 왔고, 이 방법들이 표현하는 숲의 현실과 변화도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숲은 필드워크를 통해서, 다시 말해 비/인간 신체, 개념, 의미, 정동, 관계성, 인프라, 기술과 도구 등이 뒤얽혀 있는 ‘필드’라는 시공간의 경험을 통해서 성장하는 구체적인 전문성에 의해서도 연구되고 이해될 수 있다.

뒤얽히는 길과 매듭들

이와 더불어 나는 필드과학자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나 스스로 무엇을 경험하고 어떤 관계와 인식의 기술을 획득하는지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숲에서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나니 조사 이전에는 단속(斷續)적으로만 느꼈던 숲의 계절적인 변화가 더 세밀하고 연속적으로 경험되기 시작했다.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오는 겨울은 너무나 포근했고, 이른 봄의 나무들은 평년보다 적게는 며칠에서 많게는 몇 주씩 빠르게 꽃을 피우는 것으로 유달리 따뜻했던 지난 시간을 표현했다.[5] 기상 관측 이래 최대의 더위까지 예상된다는 올해 여름을 보내고 나면 숲에 있는 나무들이 어떻게 그 힘겨울 시간을 표현하고 몸에 흔적을 남길지 아직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른 더위 탓에 잎 가장자리가 바싹 타들어간 거리의 식물들을 보며 나는 올 여름 이후 나무들이 겪을 고난을 상상하게 된다. 위와 같은 현상들은 관찰자의 관심과 경험적 지식에 의해서도 포착되지만, 필드의 기록 장비에 의해서 포착되기도 한다.

그림 4. 1시간 간격으로 생물계절 현상을 기록하는 필드 장비

숲에 대한 인식과 관계의 감각을 천천히 체득하는 일은 미리 정해진 방법이나 절차를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표현처럼 “길을 걸어가며(wayfaring)” 만들어진다. 잉골드는 “모든 지구의 정주자들은 길을 닦으며 나아간다. 거주자들이 만나는 곳에서 그 길들은 뒤얽히게 되고, 각자의 삶은 서로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모든 뒤얽힘은 곧 매듭이며, 따라서 더 많은 삶/생명의 선들(lifelines)이 뒤얽힐수록 매듭의 밀도는 커지게 된다”고 주장한다.[6] 그렇다면 지식을 생성하는 행위 역시도 일상과 분리된 독특한 행위라기보다는, 삶/생명과 앎, 인식, 관계가 뒤얽혀 가는 매일매일의 매듭을 풀고 묶고 다시 배치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지조사 기간 동안 나는 이렇게 길을 따라가며 맺어지는 삶/생명의 선들과 밀도를 더해가는 매듭들을 기록하고 분석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숲이 있다. 이와 더불어 변화 없는 숲이란 숲일 수 없다는 인식도 갖게 됐다. 여기서 변화란 차이 + 시간을 뜻한다.[7] 한 산림학자의 말을 따오자면, “숲은 항상 변화하는 상태이고, 어떤 숲의 자연 상태는 오직 ‘지금 이 시점, 바로 이 공간’에만 적용”된다는 뜻이다.[8]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란 꼭 ‘자연적’인 것만은 아니다. 나는 숲이 생산하고 숲을 구성하는 자연적 차이들이 어떻게 과학자들의 ‘보이는 손(visible hand)’과 지식의 그물망(meshwork)과 뒤얽히면서, 어떻게 ‘자연 이상의’ 차이를 만들어내는지에 관심이 있다. 이때 과학자들의 노동과 각종 필드 장비를 통해 생산되는 매일매일의 데이터는 숲의 변화를 과학적으로 기입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수집된 데이터는 분석과 해석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는 숲을 이해할 뿐 아니라, 이후 인위적 개입을 통해 숲에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낼 정보가 된다.[9] 글로벌 기후변화 정책, 1973년부터 시작한 전국 산림기본계획, 산불 및 소나무재선충 등의 방재 사업, 각종 연구기관 및 대학 단위 연구 프로젝트 등도 수시로 변화하면서 숲이 생산하는 자연적 차이와 만나고 뒤얽힌다.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 한반도 냉전 같은 폭력의 흔적도 숲의 오늘과 내일에 매듭지어져 있기도 하다. 모든 숲은 제각기의 ‘존재-이야기(onto-story)’[10]를 품고 있고, 이 이야기들은 사회/역사와 자연, 로컬과 글로벌,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인식론적인 경계를 풀어헤치면서 펼쳐진다.

인류세”에 숲 (다시) 만들기

그렇다면 <과학뒤켠> 인류세 특집 (2019년 9월)에서 김희원 필자가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숲은 ‘자연적’인 숲이 아니라 1970년대의 국가적인 “치산녹화” 사업을 필두로 인위적으로 개입해 만들어낸 ‘인공적’인 숲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11] 한국의 숲이 대체로 인위개변적(anthropogenic)이라는 지적은 산림행정과 정책의 차원에서도 일종의 ‘사실’로 간주되며, 오늘날 새롭게 소환되고 반박되기도 한다. 예컨대 산림 관련 학술대회나 워크샵에 참석하면 2020년대에는 “제2의 치산녹화”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인위적 요인으로 빠르게 상승하는 한반도 기온과 이상 기상 현상에 수많은 자생 수종들(특히 침엽수)과 1970~80년대에 대규모로 조성된 숲들은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구상나무는 이러한 서사에서 일종의 깃대종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 침엽수종은 예쁜 수형으로 사랑을 받고 있지만 기온 상승과 가뭄의 여파로 아고산지대의 자생지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른바 “국민나무”인 소나무도 구상나무와 비슷한 처지라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침엽수는 생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미래 기후에 경쟁력이 없으므로 벌채하고, 참나무를 비롯한 자생 활엽수종을 식재하고 때로는 해외 수종을 도입해 한국의 숲을 완전히 갱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불확실한 기후 미래를 염두에 둔다면, 목재나 임산물 등으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뿐 아니라 탄소고정 효과까지 높은 수종을 신속하게 선정하고, 이 수종들로 새롭고 건강한 숲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산림과학은 인류세의 과학, 또는 인류세가 초래한 생태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과학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림 5. 채종원의 분비나무>[12]

물론 이러한 관점이 합의를 이루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한 생태학자는 2017년에 개최된 국제 학술대회에서 한국 산림과학과 정책이 1970년대 이후 “제2의 도전”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나무들은 각 지역에 수천 년 동안 적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 지역에 가장 적응을 잘한 고유수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우리는 고유수종에 대한 정보가 여전히 너무 없어요. 기후변화는 각 나라의 특성에 맞추어 나타나는데, 우리나라는 워낙 사계절이 뚜렷한 데다 여름이 더 더워지고 겨울이 더 추워지는 극과 극의 기후변화가 예상되거든요. 이렇게 계절의 변화 폭이 큰 한반도에서 수천 년 동안 적응해온 자생수종들과 도입수종들을 비교하면 누가 더 경쟁력이 있을까요? 고유수종인 소나무도 기후 측면에서만 봤을 때는 그렇게 경쟁력이 없는 수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유수종과 숲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연구가 필요하며 숲에 새로운 변화를 줄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이 생태학자의 목소리는,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긴박한 전지구적, 국가적 과제에 비하면 소수의견에 그치는 분위기였다. 나는 심정적으로는 이 생태학자의 주장에 공감했지만, 산림과학자들과 이해당사자들의 의례(ritual)인 컨퍼런스에서 인류학 연구자의 존재는 생태계 침입종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인류학 연구자는 현지조사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필드의 안팎에서, 인류학 연구자의 일

앞에서 논의했듯, 한 쪽에는 숲이 만들어내는 ‘자연적’ 차이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사람이 숲을 통해 만들어내는 ‘인위개변적인’ 차이들이 있다. 물론 이 두 범주는 논의상 편의를 위한 개념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숲에서 필드과학자들과 함께 현지조사를 진행하는 인류학 연구자로서, 이 두 차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서술하고 분석하여 인류학적인 의미와 가치를 모색하는 작업이 내가 해야 할 기본적인 몫일 것이다. 또한 숲과 나무를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개인으로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인류학 연구자로서, 미래의 숲을 위해 할 수 있는 인류학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다.

지금 수행중인 현지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과학자들의) 필드워크 속에서 (인류학적) 필드워크”를 하겠다고 너스레를 떨고 다니기도 했다. 당시 내가 지향하고 있었던 것은, 현대 인류학의 조상 중 하나인 말리노프스키(Bronislaw Malinowski) 이래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인 주류로 정착된 이른바 “외로운 인류학자(lone ethnographer)” 모델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는 말리노프스키 이전 영국의 W. H. R. 리버스(Rivers) 등이 1898년에 참여했던 토레스 해협(Torres Strait) 탐사처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의학 등을 아우르는 연구자들이 모여 협업을 했던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차, 한국 인류학의 ‘제도 설립자’[13] 중 한 분인 한상복 선생님과 면담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1960년대와 80년대에 수행된 초창기 전국 자연조사 프로젝트 이야기를 듣게 됐다. 식물학, 어류학, 동물학, 곤충학, 조류학, 지질학 등의 다양한 전공 배경을 가진 필드과학자들은 물론, 인류학자들까지 함께 필드워크에 참여하며 교류했다는 이야기였다. 1960년대 DMZ의 자연환경에 대한 남한 최초의 조사단도 (인류학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비슷한 인적 구성을 하고 있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협력적인 필드 프로젝트는 과거의 유산에 가깝다. 분과학문별로 촘촘하게 분화되고 전문화된 오늘날의 학계에서, 위와 같은 협력적 모델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제국주의, 20세기 중후반의 나라-만들기(nation-building), 그리고 21세기 초중반의 기후위기라는 역사적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제는 어떠한 필드 연구도 “인류세”라고 하는 거대한 스케일의 인식론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분과에 따라 연구주제에 따라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많은 필드과학에서 “필드”는 여전히 인간적인 스케일에서 구성된다. 전지구를 포괄하는 인류세의 스케일에 비교하면, 필드는 너무나 작고 구체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각 필드들은 규모는 작을지라도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개념과 이론, 모델, 장치, 사회적/제도적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필드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필드과학자들은 필드의 연결망을 통해 지식 생산과 경험의 장을 새롭게 구축하고 또 다른 필드의 윤곽을 마름질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필드과학자들 사이에서 진행하고 있는 필드워크를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의 그물망(meshwork)도 있지 않을까?

실험실과 필드를 오가며 파도과학(wave science)에 대한 현지조사를 해온 인류학자 스테판 헬름라이크(Stefan Helmreich)는, 오늘날의 파도과학이 “역사들과 행위자성들, 글로벌 북쪽과 남쪽들, 자연들과 문화들, 비인간과 인간들의 다중체로부터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헬름라이크에 따르면 파도과학은 순수하게 자율적인 지식의 장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파도과학은 20세기 중반 이후 과학적인 관심사는 물론 수많은 생태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겪으면서 등장한 인간적인 우려를 반영하면서 발전해왔다. 따라서 헬름라이크는 “인류세 시대의 파도과학은 다른 수단에 의한 인류학 (anthropology by other means)”이라고 주장한다.[14] 이때의 인류학은 분과학문으로서의 현대 인류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너머의 삶/생명의 뒤얽힘 과정과 변화를 이해하려는 탐구의 양식일 것이다.

나는 숲과 산림과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숲은 예컨대 미세먼지 등 오염물질의 정화원으로서, 온실가스의 유력한 흡수원으로서, 도시환경에 지친 사람들의 안식처로서, 요컨대 인류세가 초래한 생태적 곤경에 대처하는 유력한 방법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따라서 나는 한국 산림과학과 정책에, 그리고 이와 더불어 변화하고 있는 한국 숲에도 일종의 “인류학”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인류학은 숲을 비롯한 우리의 둘레세계에 대한 앎과 인식, 관계성을 강화하고, 비인간과 인간이 함께 정주할 만한(inhabitable) 세계를 더 나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만들어 내기 위한 실행으로서의 탐구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필드’에 대한 관심은 그 인류학적 탐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1] 인격적인 만남에 기초한 현지조사를 수행하는 분과에서는 연구참여자들의 개인적 권리의 보호를 위해 특별한 사유(예컨대 연구참여자들의 허가 내지는 요구)가 없다면 이름과 소속, 장소 등의 개인 식별 정보는 가명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2] Kohler R. (2019), Inside Science: Stories from the Field in Human and Animal Scienc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이 책에서 콜러는 과학적 행위를 설명할 때 “situated,” “situating,” “desituating”의 양상을 구분해서 설명하며, 특히 현대 필드과학에서 “situating”의 가치를 강조한다.

[3] 예를 들면 오후에 접어든 숲-필드에서는 다음 같은 대화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편이다.

나: “오늘은 이것만 더하면 더 할 일은 없겠죠?”

연구자: “(한숨) 일을 찾아서 하자면 끝도 없죠.”

[4] Alcayna-Stevens L. (2016), “Habituating field scientists,” Social Studies of Science, vol. 46(6), pp.833-853.

[5] 생물계절학(phenology) 분야에서는 기후변화를 겪고 있는 동식물계의 시간적 리듬의 변화를 탐구하고 있다. 한국의 사례에 관해서는 다음 문헌을 참고할 수 있다: 손성원 외 (2020), 『기후변화와 한국 산림의 계절: 지난 10년 간의 기록』, 국립수목원.

[6] Ingold T. (2011), Being Alive: Essays on Movement, Knowledge, and Description, London: Routledge, p.148.

[7] Bateson G. (1972), Steps to an Ecology of Min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8] 자부리 가줄 (2019), 『숲』, 교유서가, 114쪽.

[9] Bateson G. (ibid.).

[10] Bennett J. (2010),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1] 김희원 (2019), 「강원도 산불과 산림, 그리고 한국 인류세: 한국에서 인류세 감각 키우기」, 『과학뒤켠』, 제7호, pp.26-30.

[12] 분비나무는 구상나무와 소나무 등의 침엽수와 더불어 더워지는 기후 속에서 서식지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수종이다. 여기서 채종원이란 우수하다고 간주되는 유전자를 가진 개체목을 모아 관리하여 숲 만들기와 가꾸기에 사용할 우량 종자를 생산, 보급하는 시설을 뜻한다. 대체로 국가기관에 의해 관리되며, 채종원에서의 종자 공급이 부족할 때는 채종림과 채종임분 등에서 추가로 공급한다.

[13] 박범순 (2013), 「역사 속의 인스티튜션 빌더」, 『한국과학사학회지』, vol. 35(1), pp.105-129.

[14] Helmreich S. (2014), “Waves: An Anthropology of Scientific Things”,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 vol. 4(3), 265-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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