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과학, 과학의 맛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과정
문지호
jihomoon@snu.ac.kr

감각의 전문화: 서로 다른 두 감각 전문가

 (가) “눈보라다. 겨울 세계. 아니. 틀렸어. 꽃보라로 바뀌었어요. 그런가. 그런거였나. 겨울이자 봄이기도 해요. 빛이기도 해요. 모든 계절, 모든 광경, 그리고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과 공간이 이 와인을 통해 질문을 던져요. 너의 인생은 기쁨으로 가득했는가? 아니면 슬픔에 덮여 있었나? 상실과 획득,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성공과 좌절. 상반된 것에 이야기가 있어요. 그것을 이 와인이 가르쳐 줍니다. 매력이란 모순을 안고 있는 것. 그리고 인생이란 상극의 반복이에요. 여기에는 인간이 있어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 있어요. 나는 그것을 입에 담아 맛보고, 나의 일부로만들어 갑니다. 이 맥동하는 와인은 내 피이자 살입니다. 나는 이 피와 살을 받아들임으로써, 혼자 걸어가는 고독을 이겨낼 수가 있어요. 이 놀라운 행복감과 허무감. 그 둘이 충돌하는 일 없이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 되어 온몸을 돌아요. 이 와인은 위대한 혼돈. 이 와인은 시공을 초월해 이어져 내려가는 인간의 삶. 이 와인은 영혼의 계승.” [1]

연극의 한 대사인 것만 같은 이 문장들은 와인을 두 모금 마신 후에 나온 감상의 한 부분이다. 이 감상의 대상은 1976년산 샤토 디켐. 『신의 물방울』이라는 만화 속 주인공은 와인을 둘러싼 라이벌과의 마지막 대결에서 무려 “영혼의 계승”이라는 단어로 이 와인을 정의한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인물들은 같은 와인을 마시고는 “끝나지 않는 인생의 연기”라든지, “이미지로서의 영원과 윤회를 담고 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이들이 와인을 평하는 것인지 예술 작품을 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한 편에, 시적이고 철학적이기까지 한 설명으로 와인을 평하는 게 전문가들의 세계인가 싶다는 생각이 다른 한 편에 든다. 그러나 같은 책 속에 나오는 아래의 품평은 이와는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나) “진한 루비 색, 카시스 향기, 서양 삼나무의 뉘앙스와 희미한 스모크. 그리고 비로도 같은 혀의 감촉과 묵직한 스파이스의 여운… 78년… 아니, 83년 ‘샤토 레오빌 라스 카즈’.”[2]

와인을 두고 다른 성격의 품평을 한 두 전문가는 만화 속 상상의 인물만은 아니다. (나)의 와인 전문가는 (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일상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그 맛을 상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영혼의 계승’이 무슨 맛인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비교하면 말이다. 다소 과장된 게 아닐까 싶은 (가)와 같은 설명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s)가 연구한 계급에 따른 취향 분석에서 프랑스 지배계급이 꼬냑을 묘사하는 방식에서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과육이 많지만, 지방이 없고, 단지 근육뿐인 날씬한 과육을 함유”한 꼬냑을 두고 “루벤스의 작품에 대해 보티첼리의 작품이 가지는 관계와 같다”는 오래된 경구를 사용한다든지, 우아하고 정화된 향기를 “영혼을 고양시키는 순수”한 것이라 표현한다.[3] 이들은 “전문기술적이고, 고풍스러우며, 비의적인 화술을 능란하게 곁들임으로써” 꼬냑이나 포도주에 대한 “단순한 수동적 소비를 세련된 시음과 분별”하는 전문가들이었다.[4]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면 미각을 표현하는 이들의 화법은 프랑스 지배계급이 내면화하고 체화한 ‘아비투스’의 일종이다. 

반면 (나)는 오늘날 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와인 감정법이다. 와인 소믈리에 또는 와인 마스터라는 호칭을 가진 감정가(connoisseur)들은 색향미를 차례대로 음미하며 시각, 후각, 미각으로 느껴지는 다양한 감각을 각 범주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골라내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와인의 특정 품종을 맞추거나, 그 와인의 품질을 평가한다. 예를 들어, 같은 레드 와인이라도 ‘루비(ruby)’ 범주에 들어가는 와인의 빈티지, 이에 따른 묵직한 정도와 스파이스(spice)하고 블랙 프루트(black fruit)한 향미를 내는 와이너리의 정보 등을 종합해 추론하면 대략이나마 해당 와인의 정체에 근접할 수 있다. “영혼의 계승”과 비교하자면, 이처럼 “루비, 스파이스, 블랙 프루트…”라는 단어로 와인을 품평하는 것이 그나마 수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똑같은 와인을 마셔보게 하고 색향미를 느낀 그대로 묘사해보라 하면 “루비, 스파이스, 블랙 프루트…”라는 단어를 쉽게 떠올리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적어도 와인 전문가로 훈련 받은 사람이라면 대체로 비슷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개개인의 구체적인 차이가 있긴 해도 와인 전문가라고 하면 스모키(smoky)한 향이 난다고 할 때 가죽, 모닥불, 토스트 등을 떠올리거나, 시트러스(citrus)한 맛이 난다고 할 때 라임, 레몬, 오렌지를 떠올리며 서로 소통할 수 있다. 요컨대 이들은 ‘시트러스’라는 범주 안에 ‘라임’, ‘레몬’, ‘오렌지’의 하위 항목을 공유하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신맛’이나 ‘상큼한 맛’ 정도로 표현하고 그칠 와인에 대해 ‘신맛’이 난다고 진지하게 평할 전문가는 거의 없다. 또한 나는 라임, 레몬, 오렌지 맛을 다 알고 있지만, 그들이 라임 맛이 난다는 와인에서 쉽사리 ‘라임’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이런 점에서 (가)와 (나)는 각자가 속한 영역에서 인정하는 표준적인 훈련을 거친 전문가이다. 그러나 둘의 전문성은 엄연히 다르다. (가)가 그 계급 내에서만 학습되고 통용되는 전문성이라면, (나)는 비교적 현대 사회에 일반적으로 보급된 전문성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쉽지 않지만 누구나 원한다면 일정 기간의 훈련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전문성이기도 하다. 이 두 전문성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또한 이들을 모두 전문가라 부른다면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이런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인간의 감각 판단을 과학화한다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감각의 표준화: 매개 언어의 정립

‘와인’은 일찍이 서구에서 표준화된 산업 중 하나이다. 오늘날 와인 소믈리에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와인 감정을 진행한다.[5] 여기서 표준화된 와인 감정에 결정적인 도구가 화학자 앤 노블(Ann C. Noble)이 만든 ‘아로마휠(Aroma Wheel)’이다. 아로마휠은 와인의 주요 후각 자극 물질을 세부적으로 분류하여 원형으로 배치한 도표로, 가장 안쪽의 대범주(예: 과일)가 바깥으로 갈수록 세분화된 항목(예: 자두)으로 나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와인 전문가 자격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우선 아로마휠을 습득하고, 아로마휠에 담긴 냄새로 만들어진 향 키트를 갖고 그 향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한다(그림 1). 와인을 평론하는 현대 전문가들의 후각 표현 언어 중 대부분은 이 아로마휠에 적힌 용어들이다. 물론 (가) 전문성에서 사용하는 어휘 역시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여 체화해야 한다는 점은 (나)와 유사하다. 그러나 아로마휠처럼 그 어휘를 습득하기 위한 표준 도구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가) 전문성의 어휘는 특정 계급의 문화 속에서 통용되는 암묵적 지식, 교양, 취미, 감성 등의 문화자본에 내재해 있고 바로 그런 이유로 ‘표준화’에 저항하는 속성을 띤다. 이렇게 볼 때 (나) 전문성은 초기에 고급 미식 문화를 독점하고 있던 계급이 체화한 권위 있는 어휘를 드러내 ‘객관적’ 도표로 만들고, 이로써 그 계급 장의 밖에 있던 사람들도 감각 판단을 표준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언어적 구성물이라 볼 수 있다. 

<그림 1> 1987년 제작된 아로마휠[6]

과학사학자 스티븐 셰이핀(Steven Shapin)은 20세기 말,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에서 만들어진 ‘아로마휠’을 둘러싼 역사를 추적하며 와인의 특성에 대한 주관적 판단이 어떻게 신뢰성 있고 의사소통 가능한 객관적인 설명으로 전환될 수 있었는지를 연구한 바 있다.[7] 이에 따르면 아로마휠이 만들어지는 역사는 ‘영혼의 계약’이라는 추상적 감각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 관행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셰이핀은 고래로 와인의 맛과 향이 문학, 예술 문헌을 통해 미학적 용어로 묘사되어 왔으나 19-20세기에 (유기)화학, 감각생리학이 발전하면서 감각 판단의 역사에 전환점이 발생했음에 주목한다. 

그 시작은 와인을 둘러싼 고래의 낭만적이나 주관적인 판단 대신, 와인의 실제 속성을 반영한 객관적 서술 ‘언어’의 기초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와인의 붉은 정도나 달콤하고 쓴맛의 강도, 점도나 질감, 지속력 등의 평가 범주가 이 과정에서 재규정되었다. 구체적으로 이런 언어들은, 진정한 감각(authentic sensations)에 대응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준과 의사소통 가능성을 갖춘 서술어여야 했다. 여기서 진정한 감각에 대응하는 서술어란 원칙적으로 와인에서 특정 감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표상해야 함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캬라멜’ 비슷한 향이 있다면 이를 버터 향(buttery)이라는 서술어로 표현하고 이 버터 향은 디아세틸(diacetyl)이라는 물질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와인의 향은 우리에게 익숙한 다양한 과일, 꽃, 허브에서부터, 각종 견과류, 향신료 뿐 아니라 고무나 나무 이끼, 말의 땀, 석유 냄새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으로 나누어져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듯 감각 판단의 표준화는 기준이 되는 판단 ‘언어’를 만들고 분류하는 작업과 다름없다. 『냄새』의 저자인 과학철학자 A.S.바위치(Ann-Sophie Barwich)는 훈련된 전문가들이 지각에 관여할 수 있게 하는 인지 조종술로서의 ‘언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인들과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감각 판단의 전문성을 획득한 사람들은 언어적 인지 조종술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다른 층위의 감각 인지적 활동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바위치는 총 세 단계로 이를 설명한다. 첫 번째는 개념적 지식 단계(표상)로, 현재의 경험을 과거의 경험과 비교함으로써 같거나, 비슷하거나, 친숙한 정도로 판단하는 개념적 틀을 형성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물질 단계(지시 대상)로, 주어진 자극을 이전에 접했던 냄새 근원의 대상과 분리하는 과정이다. 이는 자극이 거시적 대상이거나 정신적으로 동일 범주에 여러 냄새 물질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분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교함의 단계는 오렌지, 장미, 꽃과 같은 일반 표식과 범주뿐만 아니라 페닐에틸 알코올과 같은 화합물, 그리고 이런 성분들이 첨가된 특정 상품들을 연결하며 인식의 지평을 확대해나가는 단계를 가리킨다. [8]

요컨대, 감각의 전문가들이 특별한 이유는 그들이 소위 ‘슈퍼코’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특별함은 반복적 훈련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는 없는, 인지 조종술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를 체화하고, 이 언어로 특정 감각 대상을 명명할 수 있는 범주를 찾아갈 수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와인 전문가나 향수 전문가는 세상을 지각하는 범주가 다른 셈이다. 감각 전문가들은 오랜 기간 이런 목적 지향적인 훈련을 통해 감각 물질에 해당하는 물질 목록을 외우고, 이런 물질의 질적 특성을 더 상세하게 분류해 나감으로써 전문성을 발전시켜 간다. 즉, 와인의 감각에 대한 전문적 표준화는 과거 와인 감정가들에게 체화된 지식이 ‘객관적’이라 여겨지는 형태로 전환된 결과물이다. ‘아로마휠’은 그 대표적인 예로, 오늘날 와인 전문가들은 주관적일 수 있는 감각 판단을 표준화된 ‘아로마휠’에 적힌 언어를 매개로 공유한다. 더 나아가 비전문가인 사람들 역시 아로마휠을 참고함으로써 와인이 주는 감각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와인 라벨에 붙어 있는 “블랙 커런트의 향과 스파이시한 아로마”라는 표현을 보며 대략적으로나마 그 와인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감각의 과학화: 과학이 감정가를 대체하는가?

그러나 와인 감정가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아로마휠이라는 도구는 그에 앞서 과학자와의 만남을 수반해야 했다. 그리고 아로마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 전까지 감정적이고 낭만적이라 여겨졌던 감정가의 단어들, 예컨대 남성적(masculine), 여성적(feminine), 귀족적(noble), 훌륭한(finesse), 매끄러운(silky), 관능적인(voluptuous)과 같은 단어들은 사라져야 했다. 이런 단어들은 객관화하기 힘든 ‘비과학적’ 언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단어들이 ‘비과학적’이라 여겨졌던 이유 중 하나는 ‘관능적’이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주관적이거나 추상적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이 단어에 대응시킬 수 있는 화학성분이 부재하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피노누아(Pinot Noir) 와인의 보라색-라즈베리 향은 케톤 베타-다마세논(ketone β-damascenone)에, 쉬라즈(Shiraz)에서 나는 스파이시한 향은 페놀성 케톤 진게론(phenolic ketone zingerone)에 대응시킬 수 있지만 ‘관능적’이라는 표현은 이에 대응하는 화학 성분을 결합시킬 수 없었다. 즉, 와인의 향미를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구체적인 화학 성분들과 연결할 수 있는 품평 용어들만이 객관적이고, 분석적이며, 과학적인 기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몇 가지 과학의 발전을 살펴보자. 대표적으로 감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감각 생리학은 20세기 브랜드 식품과 음료 산업의 성장으로 품질 관리와 신제품 개발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발전했다. 이전까지 심리학이나 철학의 영역에서만 다루어졌던 제2성질(Secondary Quality), 즉 인간 주체의 감각으로 경험되는 성질들이 과학의 분석 대상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런 변화는 화학 분야에서 향미 성분을 정립하는 연구들의 발전과 함께했다. 감각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거나 감각 비교 수단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에도 많은 학자들이 20세기를 중요 전환점으로 꼽는 이유는 분석 기기의 발명과 무관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냄새 물질을 판별하는 분석 기법인 가스-액체 크로마토그래피(GC)의 등장으로 과학자들은 엄청나게 다양한 냄새 분자의 구조를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감각 수용체의 발견이 인간이 감각을 인지하는 기제를 총체적인 관점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길을 닦아주면서 20세기 말에 이르러 감각 생리학은 완전하게 과학계의 한 분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후각 수용체 연구로 200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은 린다 브라운 벅(Linda Brown Buck, 1947~)이나, 이를 가능하게 한 중합효소연쇄반응(PCR)을 이용한 DNA 증폭 기술을 발명하여 1993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캐리 뱅크스 멀리스(Kary Banks Mullis, 1944~2019)는 모두 후각 생리학 분야에 공헌한 대표적인 과학자이다.

그러나 아로마휠이 단순하게 와인의 향미를 화학 성분과 대응시키며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아로마휠이 만들어지던 초기의 모습을 보면 냄새 유발 분자가 입증된 몇 가지 최종 묘사 용어(terminal descriptive terms)만 적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셰이핀에 따르면 노블은 객관적 원인(예: 2-methoxy-3-isobutylpyrazine)에서 주관적 경험(예: 피망)을 입증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를 토대로 주관적 경험을 확장하고자 했다. 초반에 노블은 ‘분석적인, 그리고 쾌락이나 가치 판단을 함축하지 않는(analytic and free of hedonic or value-judgment connotation)’ 서술 용어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100명 이상의 전문가들에게 보내고 그들에게서 받은 의견들을 모아 정리하며 휠을 보완해 나갔다. 이는 휠의 제작 목적 자체가 냄새를 화학적으로 규명하고 화학 성분으로 환원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를 도구 삼아 와인 생산자, 마케터, 연구원, 소비자들 사이에 신뢰할 수 있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기준(physical standards)’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와인에 대한 감각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일반 소비자들까지 휠의 사용자에 포함됨으로써 휠의 언어에는 화학용어 대신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일상용어가 들어오게 된 셈이었다. 

현대의 전문적 와인 감정가들은 엄격한 훈련을 통해 와인을 더 정확하게 품평하고 그 의견을 같은 또는 다른 업계의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일반 소비자들도 아로마휠을 앞에 두고 와인이 주는 향미를 전문가와 유사하게 유추해보는 과정을 경험해볼 수 있다. 아로마휠을 시작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감각 경험을 제공하는 여러 상품은 모두 각 분야에서 물리적 기준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맥주, 커피, 차, 향수, 비누 등 수없이 많은 제품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 기준’의 존재가 감정 전문가의 역할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아로마휠을 통해 감각 판단의 표준적 전문가를 양성하는 과정은 결국 기존의 감정 전문가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와인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와인 제조기술의 발전과 함께 계속 다양해지고 있으며 시장에 따라 대중이 원하는 ‘취향’ 역시 계속 바뀌고 있으므로 판단 기준 역시 어떤 형태로든 계속 변화할 수밖에 없다. 물리적 기준을 확인하고 새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인간 감정가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요컨대 감정가의 감각적 판단을 감각의 과학을 통해 객관적 도구로 대체하려는 모든 과정은 최종적으로 감각 전문가의 또 다른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로마휠에 ‘인식적 권위’가 있다면 그 최종 근거는 애초에 주관적 감각 판단과 객관적 화학 분석의 대응 관계를 승인한 감정 전문가들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1] 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그림 (2014), 『신의 물방울 와이드판 44』, 학산문화사, 57-62쪽

[2] 아기 타다시, 오키모토 슈 그림 (2007), 『신의 물방울 와이드판 1』, 학산문화사, 110-111쪽

[3] 삐에르 부르디외, 최종철 옮김 (2006),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下』, 새물결, 511쪽. [Bourdieu, P. (1979), La Distinction: critique sociale du jugement, Les Editions de Minuit.]

[4] 삐에르 부르디외, 최종철 옮김 (2006),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下』, 새물결, 512쪽. [Bourdieu, P. (1979), La Distinction: critique sociale du jugement, Les Editions de Minuit.] (번역 일부 수정)

[5] 이 감정법은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의 부흥과 함께 발전했다. 그러나 신흥 와인 생산국인 미국에서 만들어진 기준법이 유럽, 특히 와인의 종주국인 프랑스의 와인 감정가들이 바로 수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6] 「Sparkling Wine Saga – Part 1 Witnessing Sparkling – Scintilla Special」, https://veritaswines.com/sparkling-wine-saga-part-1-witnessing-sparkling-scintilla-special/

[7] Shapin, S. (2016), “A taste of science: Making the subjective objective in the California wine world”, Social Studies of Science, Vol. 46(3), pp. 436-460.

[8] A. -S. 바위치, 김홍표 번역 (2020), 『냄새: 코가 뇌에게 전하는 말』, 세로, 397-398쪽. [Barwich, A. -S. (2020), SMELLOSOPHY: What the Nose Tells the Mind,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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