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옥포만, 조선소 노동자들의 기록

신현아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rei1318@naver.com

골리앗 크레인이 보이는 풍경

<그림 1> 차창 밖으로 보이는 대우조선의 골리앗 크레인 (필자 촬영)

경상남도 거제시의 고현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능포동 방향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면 대부분은 대우조선을 빙 둘러서 가게 된다. 대우조선 서문, 대우조선 남문, 대우조선 정문, 대우조선 동문과 같이 외지인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버스 정류소 이름을 한참 거쳐 가면서 차로 수십 분을 달리는 동안 창밖에 계속해서 따라오는 풍경이 있다. 조선소에 있는 골리앗 크레인이다. 너무 거대하여서 버스가 한참을 달리는 동안에도 계속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아니, 반대로 내가 아무리 달려도 골리앗 크레인의 시야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에 가깝겠다.

어디서든 보일 정도로 거대한 이 900톤급 골리앗 크레인은 1981년에 조선소의 건설과 함께 세워졌다. 대형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할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거대 크레인은 당시로써는 매우 최신 시설이었으며, 특히 대우조선의 골리앗 크레인은 세계 최대 규모였다. 당시 수많은 신문 기사들은 이 ‘세계 최대’의 골리앗 크레인이 얼마나 거대한지,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지를 부산스럽게 보도하였다.

“8t 트럭 1백 25대를 한꺼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괴력을 가진 9백t짜리 초대형 골리아스 크레인이 대우조선의 옥포 조선소에 설치되고 있다. 높이가 1백 3.5m로 3.1로 빌딩높이와 맞먹고 폭은 2백 6m로…”[1]

“단일 도크로는 세계최대 도크(길이 5백 30m, 너비 1백 31m, 깊이 14.5m. 서울운동장 축구장의 7.5배)와 세계최대의 골리아스 크레인(7.5톤트럭 1백 25대를 91m 높이까지 들어올림) 등 최신 조선시설을 구비하여 선박은 물론…”[2]

이 골리앗 크레인은 단지 일개 회사에 설치된 기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을 발표하며, 한국의 공간적 구조는 완전히 재개편되었다. 이 계획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전국을 여덟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각각을 일종의 ‘생산 시설’로 정비하고 수도권에 물자를 공급하는 임무를 배분하기 위해 수립되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수도권이라는 ‘중핵’을 중심으로 하여, 태백(강원) 권역은 원료 공급, 충청·전주·광주 권역은 식량 공급, 대구 권역은 농업과 공업, 부산 권역은 상업과 공업, 제주 권역은 관광이라는 역할을 할당받게 되었다.

그렇게 국가가 지역에 부여한 새로운 생산 기지로서의 임무는 대자본을 통해 실행에 옮겨졌다. 영남권 일대에 대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공룡처럼 거대한 중화학 공업 단지들이 앞다투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 한 해에만 포항 제철이 완공되고, 울산 현대조선소가 착공되고, 창원 기계공업기지 건설 계획이 확정되었다. 바야흐로 ‘중화학 공업 시대의 선언’이 제창되던 시기였다. 그 극적인 변화의 한가운데 있는 구조물이 바로 ‘골리앗 크레인’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어업을 중심으로 하던 경상남도의 작은 도시였던 울산과 거제는 어촌 마을에서 순식간에 ‘중공업 기지’로 재탄생한다. 울산은 조선소 건설 후 인구가 약 10배가 증가하였으며, 거제는 1978년까지도 주민의 80%가 어업이나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1980년에는 12%에 불과하게 줄어든다.[3] 그렇게 어촌 마을이 중공업 기지로 재탄생되고, 중공업 노동자들이 모이게 되면서 지역의 구조도 골리앗 크레인이 있는 거대한 국가산업단지를 상업 단지가 둘러싸고, 그 상업 단지를 다시 수 천 세대의 사원 아파트와 학교, 병원이 둘러싼 형태로 재개편되었다.

이러한 지역적 구조는 중공업 자본이 노동자의 가족을 통해 중공업 기지에서 일할 노동력을 계속해서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대우조선’ 노동자의 자식으로 ‘대우 병원’에서 태어나 ‘대우 아파트’에 살면서 ‘대우 국민학교’를 다니고, 대우 재단에서 운영하는 거제 중학교, 거제 고등학교, 거제 대학교를 거쳐, 대우조선(또는 협력 업체)의 노동자가 될 수 있는 컨베이어 벨트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공간적 구조 외에도 자본은 다양한 형태로 기업과 노동자를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내고자 하였다. 대우 조선 내의 잔디 구장에서는 매년 어린이날 행사가 열려 조선소 노동자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회사’를 둘러보았고, 주기적으로 부녀 교양 강좌를 열어 ‘힘들게 일하는 남편’을 어떻게 잘 내조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4] 그렇게 지역-자본-노동자는 분리 불가능한 ‘중공업 가족’의 형태를 이루게 된다.

‘골리앗 전사’에서 ‘귀족 노조’로?

한편 지역의 재개편과 대자본을 상징하는 골리앗 크레인은 동시에 노동자들의 투쟁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결성된 노조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압박이 심해지자 1991년에 51명의 노동자가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한다.

白 위원장 등 노조간부 50명의 투쟁결사대는 7일 밤 5~6개월분의 비상식량과 식수, 취사도구, 신나 등을 준비, 높이 1백4m의 사내B안벽 골리앗 크레인 위로 올라가 이틀째 철야 점거농성을 벌였다.[5]

어디서든 대자본의 골리앗 크레인이 굽어보고 있는 지역에서, 그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골리앗 크레인 바로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게 노동자들은 ‘세계 최대’의 크레인이라는 고공 위로 올라갔고, 그 해 104일이나 이어지던 단체교섭은 골리앗 결사항쟁 8일을 끝으로 타결되었다. 그리고 조선소 노동자들은 ‘골리앗 전사’ 또는 ‘골리앗 노동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림 2> 출근 중인 조선소 노동자들[6]

그렇게 골리앗 크레인에 지역과 대자본과 투쟁이라는 다양한 의미가 겹쳐져 있는 것처럼, 중공업 노동자들에게도 다양한 의미들이 덧씌워졌다. 오늘도 여전히 퇴근 시간이 되면 조선소의 동문 서문 북문 남문에서 회색 회사복을 입은 노동자 수만 명이 자전거, 스쿠터, 승용차, 통근버스 등을 타고 도로와 시내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온다. 조선소가 매일 삼켰다가 토해내듯 아침저녁으로 들어갔다 쏟아져 나오는 회색 노동자들의 물결은 시대를 따라 다르게 불려 왔다. 이들을 가리켜 87년과 90년대에는 ‘골리앗 전사’로 불렀고, 2000년대 초 이후 조선업이 활황이던 시기에는 ‘귀족 노조’니, ‘중공업 중산층’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런 호명들을 증명하듯이 2002년에는 현대중공업이 스웨덴의 말뫼(Malmö)에 있던 1,500톤급 골리앗 크레인을 단돈 1달러에 인수하면서, 세계 조선업의 중심이 한국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2010년 중반 이후 조선업이 쇠퇴하고 ‘수주 절벽’의 상태에 놓이게 되면서 거제는 ‘암흑의 도시’가 되었고, 조선소는 공적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누군가는 냉정하게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진단하고, 누군가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니던’ 호황기를 누릴 동안 무엇을 했느냐며 조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정리 해고를 통해 노동자들은 지역-자본-노동자가 착종된 ‘중공업 가족’의 품에서 한순간에 추방되었다. 국가가 지역에 할당한 삶의 방식이었음에도, 그들이 ‘대우 가족’에서 추방될 때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대를 바꾸며 이어져 온 담론 속에서 조선소 노동자들은 ‘골리앗 전사’로 일어났다가, 결국 자본이 이끄는 대로 ‘중공업 중산층’이 되어 부르주아적 삶을 흉내 내며 살다가, 결국 시대에 뒤처져 몰락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골리앗 전사’에서 ‘중공업 중산층’까지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조선소 노동자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그들을 가리켜 만들어낸 것들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또 노동자의 삶을 분석한 연구는 수많은 청중이 귀 기울이지만, 노동자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듣는 사람이 없다. 하여 중공업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어떤 언어로 어떻게 증언하고 있는지를 다시 읽어나가 보고자 한다.

대우조선 조동조합 노보 자료 현황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과 삶에 대해 남긴 중요한 기록 중 하나가 노동조합 회보인 노보이다. 성공회대학교 노동사 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 노동사 자료 총서』 중 『한국 노동사 자료 총서: 노조사업 및 활동: 노보, 소식지』는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을 비롯해 전국의 여러 노조에 흩어져 있던 노보들을 모아 56권의 책으로 영인하였다. 대우조선 노동조합에서 지금까지도 약 30년 이상 발간 중인 노보인 『옥포노보』 (1990년 이후 『새벽을 여는 함성』으로 개칭) 중 1988년에서 1990년에 발간된 일부가 『한국 노동사 자료 총서: 노조사업 및 활동 [4] – 노보, 소식지』 5-7권에 영인되어 있다. 그러나 1991년 이후 발간된 분량은 현재 ‘노동자역사 한내’ ‘울산노동역사관1987’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등 전국의 여러 노동사 자료실에 흩어져 보관되어 있으며, 전체를 제대로 목록화하지 못하고 있다. 규모가 큰 노조의 노보도 이렇다면, 보다 작은 규모의 노조의 노보는 정말 손쓸 수 없이 소실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보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게 보존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남겨진 목소리 중 하나를 다시 발굴해내기 위해, 먼저 1988년부터 1989년까지 발간된 『옥포노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의 노보는 특히 노조 결성 직후부터 90년 직전까지 어떻게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만들어가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어떻게 부딪히고 찢겨지며 처절하게 하나하나 언어를 쌓아나갔는지 함께 읽어보자.

노동자도 생소한 노조 언어

대우조선 노동조합 회보인 『옥포노보』는 1987년에 노조가 결성된 이후 1988년에 창간된다. 한 달에 두 번 발간되는 『옥포노보』 의 제1호는 영인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제2호부터 보면, 노동조합 위원장의 인사나 노조 간부들의 활동부터 사내의 시위 상황과 다른 계열사 및 인근의 노조들이 어떻게 투쟁하고 있는지의 상황을 전하였다. (혹시 『옥포노보』 제1호를 갖고 계신 분은 제보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체 협약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안건을 가졌는지를 하나하나 설명하였고, 또 조선소 노동자들의 임금이 4인 가족 기준 최저 생계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표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노보는 당장 생계가 걸린 임금 문제와 복지 문제에서부터,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과 회사 상황에 대한 노동자들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 『옥포노보』 제2호(1988.01.15.)는 노조를 결성한 직후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언어를 하나씩 배워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단체교섭 강화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린다.

지난날 노사분규 이전 우리들은 단체협약이란 말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너무나 생소한 단어들이었읍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사용자가 내어놓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취업규칙에 얽메여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에는 이로서, 귀에는 귀로서” 대등한 우리의 권익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7]

여기서는 ‘단체협약’을 할 수 있는가 이전에 ‘단체협약’ 이라는 말 자체를 “듣지도 보지도 못한 너무나 생소한 단어”였다고 말하며, 단체협약이라는 단어의 뜻부터 설명한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의 언어를 하나씩 배우고 만들어갔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것은 87년의 투쟁을 ‘지난날의 노사분규’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1987년 8월, 옥포 관광 호텔에 있는 김우중 회장을 만나기 위해 오리걸음으로 기어가는 대우조선 노동자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쏘았고, 이를 오른쪽 가슴에 정통으로 맞은 이석규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8] 이 투쟁에서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발간된 『옥포노보』 에서는 이를 ‘노사분규’로 지칭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노사분규’ 지양하고 성숙한 투쟁으로 노사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등장한다.

이제는 무분별한 언동과 난폭으로 노동조합을 이끌어갈 수는 없읍니다. 구시대적인 모순에 탈피 방탕의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하고 각자 자기 위치에서 새로운 세계를 설계해야할 시기입니다.[9]

앞서 말한 ‘성숙한 투쟁’은 ‘무분별한 언동과 난폭’을 지양하고 ‘방탕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터져 나오다시피 했던 1987년 직후인 88년이지만 자본의 언어를 빌려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노사분규’를 중단하고 ‘노사 화합’을 기대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들이 등장하였다.

<그림 3> 『옥포노보』 표지

빌려 온 언어와 입에 발린 소리

노동자가 자본의 언어를 빌려서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노사 화합’에 관한 담론에 국한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은 ‘생산성 향상’이다. 초기 노보에는 ‘생산성 향상’을 강조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지난 4월 29일 서문쪽에서 일기 시작한 생산성 향상 궐기대회가 서풍을 타고 전 야드를 휩쓸고 있다. 과거 임투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조합원과 부서 관리자들의 대토론회를 거쳐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시키겠다는 것이 당면 과제임을 서로 인식하고, 목공장에서 시작한 이 궐기대회는 조합원의 입과 입을 통해 상호 전달되어 5월 6일 전기의장부까지 도착했다. (중략) 우리 근로자가 대우조선을 내집같이 생각함으로서 앞으로의 노•사 간의 전망은 무척 밝을 것으로 확신한다.[10]

생산성 향상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서 “자기일을 스스로 찾아서 할 때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고 먼저 일에 대한 잡념이 없어야 될 것이다” 라고 말하며, “회사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부심할 때이고 우리들은 이에 발맞추어 생산성 향상에 매진할 때라고” 본단다.[11]

1988년 4월에는 부서별 생산성 향상 궐기대회가 개최되기 시작한다. 당시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에게도 회사의 경영진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부심”하고 노동자들은 “발맞추어 생산성 향상”에 매진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즉 노동자들은 “임투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대우조선을 내집같이 생각”하여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시키는 것이 “당면 과제”이며, 그래야만 노사가 상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앞서 ‘노사분규’를 끝내고 ‘노사화합’으로 나아가자는 목소리와도 겹쳐진다. 이 ‘생산성 향상’은 사측이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이윤이 늘어야 임금을 인상해줄 수 있기 때문에, 일단은 생산성 향상에 매진해야 한다고 한 바를 받아들인 것이다. 87년의 대투쟁이 끝난 직후, 노동자들은 한 편으로 이제 노사가 함께 보다 나은 노동 현장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하여 1988년의 노보에는 ‘생산성 향상’과 ‘노사 화합’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목소리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자본의 언어를 가져와서 이야기하는 ‘생산성 향상’은 노보 안의 다른 기사들과도 충돌한다.

임원 및 각 부서장이 끝없는 말로 ‘생산성을 향상 시키자’ ‘안전은 당신들의 목숨이다’라고 설득력있게 입이 닳도록 이야기해도 ‘X발 말많은 X 빨갱이다.’라는 조합원들의 의견만 무성할 뿐이다.[12] 

한마디로 어용신문이다. 생산성 향상 궐기대회는 부서에서 부서장이 시켜서 한 것이지,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혹, 자발적인 운동이라고 해도 조합신문에 까지 대대적 톱 뉴스로 다룰것이 무엇이냐(?) 회사는 회사고, 노조는 노조로서 대 투쟁일변도로 편집하라.[13]

매일 입에 발린 소리로 생산성 향상을 반복 주입시키는 것보다 인간적인 격려와 인간관계 회복이 곧 생산성 향상의 길이며, 부장이 현장에 내려와 담배 한개피 건네며, 좀 쉬었다 하라 해 보십시오. 더 열심히 않할 사람 어디 있겠소.[14]

노보의 기사에서는 “조합원의 입과 입을 통해서” 전 야드로 확산되었다고 하는 “생산성 궐기 대회”에 대해 독자는 “부서장이 시켜서 한 것이지,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노보의 표지에 생산성 궐기 대회의 피켓을 들고 있는 사진이 실린 것을 지적하며 “투쟁일변도로 편집하라”고 요청한다.

그 외에도 생산성 향상에 대하여 “X발 말많은 X 빨갱이”로 응수하거나, 오히려 “좀 쉬었다 하라”고 해야 생산이 는다거나 또는 그것이 다 “입에 발린 소리”라고 응대한다. 현장의 안전이나 노동 환경을 만들지 않고 회사 이윤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행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장의 노동자들은 “회사는 회사고, 노조는 노조로서” 노동자의 언어를 만들어 지면을 채워갈 것을 요구한다.

회사가 잘되어야 지불능력이 생겨서 임금을 올릴수 있다는 주장의 뒤에는 임금이란 회사를 운영하여 생긴 수입중에서 적당한 몫의 이윤을 떼고 난 나머지를 가지고 주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읍니다. 그러나 임금은 결코 수입중에서 일부를 떼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 즉 생계비를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노동력을 사 들이는 기업주의 지불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지금까지는 생산이 오른만큼 임금이 오르지 않았는데 각 회사에서 주장하는 생산이 오르면, 임금도 오른다고 하는 것을 믿어 보면서 우리도 열심히 생산활동에 모두가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노사간의 혼연일체가 되어, 어려운 난황에 처해있는 대우조선을 흑자체제로 바꾸는데 앞장서야 겠읍니다.[15]

노보의 기사에서도 노동력에는 이윤과 관계없이 정당한 값이 치뤄져야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회사를 “믿어보면서” 생산 활동에 앞장설 것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생산성 향상과 노사 화합에 대한 담론은 90년대 이후 회사에 대한 주인 의식과 함께 지역-자본-노동자가 하나의 가족이라는 자본 주도의 담론으로 확장된다.

사무직은 사원이고 현장은 노동자냐

노보를 노동자의 언어로 채우기 위해서는 새로 만들어내어야 할 단어들이 너무나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사원’과 ‘노동자’라는 단어를 어떻게 바꾸느냐이다. 대우조선 노동조합은 현장 노동자들로 이뤄져 있었고, 사무직 노동자들은 당시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같은 노동자이지만 ‘조합원’과 ‘사원’으로 나뉘어 부르거나, 또는 ‘노동자’와 ‘사원’, ‘기능 사원’과 ‘사무직 사원’ 등으로 나뉘어 불렀다.

그리고 이건 옥포노보를 (노조) 비롯 회사 내 4단체- 3개단체는 불법단체인 사원연합회 반장연합회 직장협의체- 공동명의의 성명서 호소문 등의 유인물을 보면 조합원을 노동자라 칭하고 사원을 사원이라 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모순이고 자기비하가 아닌가?[16]

사측 단체였던 사원연합회 등에서 사무직 노동자만을 사원이라 칭한 데 비해 노동조합 조합원인 현장 노동자들은 조합원이라 칭하였고, 실제로 사측은 노동자를 관리할 때도 ‘사무직’과 ‘현장직’을 구분한 것이 나타난다.

1989년 8월 16일의 『옥포노보』 제25호에서는 현장 노동자들의 기숙사 이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장 노동자들은 사내 기숙사를 사용하는데 세면장과 화장실이 공동이며 한 칸에 3.6평짜리 방을 여럿이 사용하였고, 사무직 노동자들은 사외의 옥포 기숙사를 사용하였는데 여기는 개별 세면장과 화장실이 딸린 6평짜리 방을 2명이 사용해왔다. 이러한 차별적 조치를 완화하기 위해 노동조합에서는 현장직 노동자들의 의견을 조사하여 76% 비율의 찬성 의견을 내어 현장직 노동자들도 옥포 기숙사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중 소수 반대의견을 전하며 “(현장직 노동자가) 옥포 기숙사로 이동 시 사원과의 생활 방식이 맞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열등의식이 작용하고 있다.”[17]고 말한다. 즉 당시 현장직과 사무직이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할 경우 ‘생활 방식이 맞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할 정도로 격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새롭게 언어를 발명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똑같은 사원인데 육체적 노동자는 노동자이고 정신적 노동자는 사원이란 말인가? 공동 명의의 성명서 호소문 등의 유인물을 제작할 때 평등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협조하시기 바랍니다. 정 적당한 이름이 없다면 육체적 노동자 정신적 노동자로 구분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18]

『옥포노보』의 독자는 사무직도 현장직도 “똑같은 사원”이기 때문에, “평등하고 대등한” 언어로 지칭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육체적 노동자’와 ‘정신적 노동자’로 구분하는 것 등을 제안하면서, 노동자를 구별하는 언어들 내의 격차를 없애고 “평등하고 대등한 위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를 만들고자 한다. 

국가, 자본, 언론의 압박과 개밥 먹는 노동자의 죽음

<그림 4> 옥포노보(1989.08.16)에 실린 언론사들의 헤드라인

그리고 1989년이 되면 『옥포노보』의 분위기는 보다 절박하게 바뀌면서 ‘노사 화합’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지게 된다. 대우조선의 적자를 메꾸기 위해 정부에서 자금을 출자하는 대신 흑자 경영으로 돌아설 때까지 향후 5년간 임금을 동결시키고 어떠한 노동쟁의도 금지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19] 이에 대해 언론사들은 월급 인상만을 요구하는 조선소 노동자들과 방만한 적자 경영을 해온 조선소에 세금을 투여할 수 없다고 하며 맹비난을 한다.

지금 우리 산업의 ‘미운 오리’는 누가 봐도 造船業이다. 경영정상화를 위해 8천 5백억원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大宇조선 지원문제는 더 이상 不實기업에 몇천억원씩 정부돈을 지원할 수 없다는 世論에 밀려 조속 타결이 어렵고 (…) 한 두 造船 공장은 廢業과 스크랩化가 불가피할 것이다. (…) 차라리 문을 닫더라도.[20]

이는 1만 조합원과 그 가족, 나아가 조선업계의 전 노동자와 가족의 자존심과 생존권을 짓밟은 공정성이 결여된 무책임한 언론의 폭행이요, 역사의 흐름을 거역하는 빈민주, 반노동자적 작태이다. (…) 이미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노동단체 등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노동조합 조직분과 등 12명의 항의팀을 구성하여 동아일보사에 파견하였다. (…) 21, 22일 양일간에 걸쳐, “일개 언론사가 사실성이 결여된 사설을 통하여 5만여 대우가족과 17만 거제 군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느냐, 이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엄중항의 및 우리의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다.[21]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12명의 항의팀을 구성하여 동아일보사 본사에 항의 방문을 하면서, “일개 언론사가 5만여 대우가족과 17만 거제군민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지 따져 묻는다. 한편으로 이는 당시 노동자들이 느끼던 생존권의 위협이 심각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중노동의 대가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자 했을 뿐인데, 자본과 국가와 언론이 모두 산업 초기에 발생하는 적자의 부담과 책임을 노동자에게 지우고 비난을 퍼붓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대우조선의 88년도 평균 임금은 1인 8시간 노동기준 210,300원으로 4인 가족 최저생계비인 577,835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22] ‘노사 화합’을 기대하며 단지 생존권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은 87년의 대투쟁을 거친지 1년 반 만에 말 그대로 국가적 ‘미운 오리’가 되어버렸다. 노동자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개’로 묘사한다.

작년에 468원하던 중식비가 단체 협약이 체결되어 100원 인상이 되어 568원으로 인상되었으나 아직도 싸구려 짜장면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 수준이며 인상폭은 물가인상폭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러고도 종업원에게 양질의 식사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기업인의 양심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작년에 김우중 회장과 대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모 대의원이 김회장에게 “회장님 우리는 지금 개밥 먹고 있습니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산직이고 사무직이고 가릴 것 없이 만 3천여 식구 중에서 건강한 체격을 가진 사람은 셀 수 있을 정도이고 대부분이 앙상한 얼굴과 체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비참한 얘기일 수밖에 없다.[23]

앙상한 얼굴의 노동자들이 김우중 회장의 면전에서 “회장님 우리는 지금 개밥 먹고 있습니다.”라고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는 다른 곳으로 전해지지 못한 채, 자본과 국가와 언론은 모두 조선소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압박하였다. 그렇게 노동자들의 고립감과 위기감이 심각해지면서 약 두 달 뒤인 5월 29일, 박진석(23)이 분신하여 사망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이상모(20)가 잇달아 분신하였다. 이들의 장례는 노동 열사 전국 노동자장으로 치러졌으며, 뒤이어 발간된 노보에서는 노동자장의 풍경을 전하며 이것이 “이 땅의 마지막 주검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남긴다.[24] 그러나 노보에 쓰인 소망이 널리 읽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김우중 회장의 자서전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다.[25] 물론 그 책에는 어디에도 자기가 ‘세계 경영’을 한 회사에서 일어난 ‘적자’의 책임을 전가하고, 노동쟁의를 금지당해 분신한 개밥 먹는 노동자들에 대해 쓰여있지 않았다.

노동자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쓰고 읽기

<그림 5> 고공농성 중인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26]

그렇게 동지들의 죽음이 “이 땅의 마지막 주검이 되기를 소망”하였지만, 조선업이 적자라던 90년대에도, 호황이라는 2000년대에도, 그리고 다시 ‘절벽’이 되어버린 지금에도, 노동 현장에서는 계속해서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2010년대에도 2020년대에도 크레인에, 굴뚝에, 조명탑에 올라가 고공에서 외친다. 그러나 그 죽음들은 대부분 ‘개밥 먹는 개’의 죽음처럼 여겨지고, 다음날의 ‘생산력 향상’을 위해 빠르게 치워진 채로 기록되지 않고 잊혀져왔다. 그렇게 고공에서 외치는 말은 땅에 가닿지 못한 채로 약하게 흩어져버린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 노동자들을 ‘떼를 쓰는 미운 오리’로 여기는 언어들은 질기게도 오늘까지도 여전히 노동자를 옥죄고 있다. 또는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자임하며 노동자들을 분석하고 해부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노동자 자신들의 목소리를 뒤덮고 압도해버리기도 한다. 비난과 대변의 사이에서 노동자 자신들의 목소리와 기록은 너무 쉽게 사라지고 묻혀버린다. 그래서 누군가는 죽어간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남겨놓기도 한다. 노동자들의 죽음을 기록하는 트위터 계정인 “오늘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laborhell_korea)”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세요. 매일매일 노동자가 죽습니다. 노동자의 죽음을 주변에 알려주세요. 언론 기자분들, 기사를 써 주세요. 매일매일 죽는 노동자의 기사를 써 주세요. 어떻게 많이 죽어? 오늘도 죽었어? 또 죽었어? 이렇게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매일매일 죽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써주세요. 항의해주세요. 매일매일 노동자를 죽이는 기업에 항의해주세요.[27]

매일매일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기사를 쓰듯이, 또 우리는 살아서 전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흩어져 사라지기 전에 매일매일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그렇게 노동자들을 옥죄는 질긴 언어들에 맞서서 노동자들의 이름과 언어와 기록을 다시 찾아낼 것이다. 대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노동자들 바로 자신들의 목소리가 바로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하나의 힘있는 포지션이 되도록, 우리는 그 기록들을 다시 읽고, 함께 읽고, 크게 읽어야 한다.


[1] 조선일보(1981.04.22), 「玉浦造船에 백m크레인」.

[2] 매일경제(1981.10.15), 「착공8년만에 大宇 玉浦造船所 준공」.

[3] 뿌리깊은나무 (1988), 『한국의 발견- 경상남도』, 뿌리깊은나무.

[4] 조주은 (2004), 『현대가족 이야기』, 이가서.

[5] 조선일보(1991.02.09), 「大宇 50명 ‘골리앗’ 徹夜 농성」.

[6] 연합뉴스(2017.03.23), 「[대우조선 추가지원] “열심히 해 빚 갚아야”…거제지역 반색(종합)」.

[7] 옥포노보(1988.01.15), 「단체교섭 강화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

[8] 「오픈아카이브 사료컬렉션 1980년대 대우조선노조결성과 이석규장례투쟁」, https://archives.kdemo.or.kr/collections/view/10000080

[9] 옥포노보(1988.01.15), 「단체교섭 강화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

[10] 옥포노보(1988.06.01), 「기획 취재: 생산성 향상 그 현장을 찾아서 [전기의장부편]」.

[11] 옥포노보(1988.05.06), 「탐방: 일등 임투에서 일등 생산성으로- 선수미부 소○○ 조합원을 찾아서」.

[12] 옥포노보(1988.03.15), 「옥포 논단- 사용자가 마음을 비울 때가 왔다」.

[13] 옥포노보(1988.05.15), 「사외소식 및 현장소리- 제 8호 옥포노보 표지사건」.

[14] 옥포노보(1988.06.01), 「탐방: 자신에게 충실하는 것이 우리모두를 위하는 것이다- 기계가공부 송○○ 조합원을 찾아서」.

[15] 옥포노보(1988.06.01), 「특별기획: 임금과 생산성과의 함수관계 그 베일을 벗겨본다」.

[16] 옥포노보(1988.12.30), 「이런 노보면 좋겠읍니다」.

[17] 옥포노보(1989.08.16), 「기숙사 이전」.

[18] 옥포노보(1988.12.30), 「이런 노보면 좋겠읍니다」.

[19] 옥포노보(1989.03.02), 「위기 의식과 근로자의 자세」.

[20] 동아일보(1989.02.14), 「造船業 지원말라」.

[21] 옥포노보(1989.03.02), 「미운오리들의 항의」.

[22] 옥포노보(1988.01.15), 「옥포논단- 봉급 이대로 좋은가」.

[23] 옥포노보(1989.04.01), 「개밥과 주인 의식」.

[24] 옥포노보(1989.08.16), 「고 이상모 박진석 노동열사 전국 노동자장」.

[25] 김우중 (1989),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영사.

[26] 거제중앙신문(2020.06.02), 「다시 올라간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27] 오마이뉴스(2021.05.25), 「’오늘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을 기억하는 사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46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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