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참 여… 연구 대상이다…말하는 서발턴의 자문화기술지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졸업
백가을
gaeul@snu.kr

내가 직접 시작해야 한다

나는 학부에서 영어영문학과 사회심리학을 전공했다. 이 두 분야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구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사회 사이의 갈등관계를 다루는 분야다. 사회의 문제를 규명해 비판하며 문제의 원인과 개선 방식을 탐구해 누군가를 설득하려 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나는 내 전공들을 좋아했고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여성학이야 말로 나의 진정한 전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두 학과에 개설된 ‘여성’과 관련된 과목을 전부 수강했다. 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에 대해 배우고 여성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타자가 되는지 공부했다. 여성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고 이에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파악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여성학 동아리 방에 틀어박혀서 세미나를 하거나 여성학 책을 읽었다.

지금은 자타가 공인하는 ‘디지털 현장 중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다른 말로는 프로 키보드 워리어이지만, 내가 처음부터 메갈 쿵쾅이였던 것은 아니다. 스무 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성주의’가 ‘페미니즘’이랑 같은 말이라는 것도 몰랐다. 어쩌다가 1학년 1학기에 여성학을 필수교양 수업으로 들으면서, 학점도 잘 받고 대학 생활이라는 것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얼레벌레 여성학 동아리에 들어간 것이 내가 여성주의를 접한 계기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던 곳에서 정치적 정체성 각성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맞았다. 나는 이제까지 막연하기만 했던 두려움과 수치심을 소수자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고,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여성 보편의 차원에서 다시 성찰할 수 있었다. 불 보듯 뻔한 부당함과 착취를 이전까지 알아보지 못했던 스스로를 향한 안타까움이 지나간 자리엔 당장 서울에서부터 시작해 부정의한 이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분노가 차올랐다.

페미니즘은 정치적 개념으로 이론과 실천을 두 축으로 하는 운동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전인격적으로 자신을 재구성하고 나아가 사회를 변혁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여성이 식민화된 처지를 벗어나려면 성별을 둘러싼 감정과 욕망의 방식, 그리고 여기에 공명하는 추악한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 가장 개인적인 영역에서부터 가장 공식적인 영역까지의 총체적인 혁명이 필요하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나 자신의 안팎을 변화시키는 데에서부터 내가 몸담은 세계를 뒤엎는 작업의 첫 삽을 뜨리라. 여기서부터 시작해 이 사회를 싹 갈아엎어버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학부를 졸업하기 전에 이미 여성주의 활동가로서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굳힌 참이었다. 야망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마련. 나는 영향력 있는 변화를 이끌 사람으로서 지식과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문제는 저 계획을 실현하려면 대체 어느 분야로 진학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는 것이다. 

여성주의적인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주로 진학하는 여러 대학원을 살펴보았다. 모두 좋은 과정들이었지만 연구 내용과 목적 면에서 내 목표와는 미묘하게 어긋났다. 우선 나는 이런 사람들이 주로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에 자리잡고 있는 만큼, 전략적인 차원에서 비교적 여성주의자 인력이 적은 분야에 침투하고 싶었다. 또한 이론보다는 현장, 기왕이면 내가 직접 몸 담은 현장을 중점에 둔 연구를 하고 싶었다. ‘의미’는 있지만 사람들이 읽지 않을 연구보다는 졸업할 때 내 학위 논문을 들고 당장 정책 연구소에 취직할 수 있을 법한, 사회적 필요가 확실한 연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뜬구름 잡는 소리를 더는 하기도 싫었고 듣기도 싫었다. 나는 정치적인 주장에 근거를 대겠다고 픽션인 문학 작품 속의 사건이나 구절을 인용하는 문학 분과 특유의 문화에 염증을 느끼던 참이었다. 우리가 속한 이 시대, 이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대체 왜 수백, 수천 년 전 패권국에서 살던 기득권 식자층의 글을 인용해야 한다는 거지? ‘작품’을 읽은 인구 대비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대체 무슨 실질적인 기능을 할 수 있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현장으로부터 우리를 유리시킬 뿐이지 않나?

나는 여성 문제를 언어화 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징글징글한 문학적 언어와 철학적 전망이 아니라, 현실에 직접 개입하는 법과 제도라는 형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론을 둘러싼 논의나 예술은 사회 참여를 부르짖으면서도 현실 사회와 단절된 세계에 머물며 자기만족이나 추구하는 배부른 기만으로 보였다. 그렇게 나는 문학적 감수성이라고는 전혀 없고 따라서 연구자의 자기 기만도 덜할 것 같은 이공계 분야로까지 눈을 돌렸다. 그렇게 STS와 눈이 마주쳐서 ‘페미니스트 STSer’가 되기로 한 것이다.

사회운동가라는 정체성에서 시작했다 보니, 나의 연구 목적은 대학원 입학 시점부터 확고했다. 과학기술학을 전공하며 여성과 관련된 기술을 집중적으로 공부해 연구 결과물을 생산한다, 졸업 후에는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교육 자료를 만드는 자리에서 우리 팀원(?)들이 사회과학 및 인문학 분야를 맡을(?) 때 나는 과학기술 분야를 맡겠다는 게 그것이었다.

당시 내게 학위 논문이란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기에 고수하고 싶은 주제도 없었다. 그저 여성 관련 기술 중 가장 시의성 있고 실용적인, 달리 말해 국가 기관이나 연구소에서 날 데려가 줄 주제이기만 하다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회적 이슈가 된 여성 관련 기술 모두를 졸업 논문 주제의 물망에 올렸다. ‘독성 생리대’는 어떨까? ‘낙태죄 폐지’가 한창 이슈인데 임신중절을 연구해볼까? 하지만 연구 설계에 돌입할 때마다, 기업도 병원도 현장 연구 대상으로는 참 문턱이 높다는 것만을 확인했다. 나의 관심 분야인 여성 관련 기술 부분에서는 특히 그랬다. 소수자성에 관한 연구인 동시에 섹슈얼리티가 관련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현장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논쟁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볼까도 고민해봤지만 이건 영 재미가 없었다.

하고 싶은 연구는 제약 때문에 어렵고, 그렇다고 제약된 조건 하에서 타협하다 보면 내 처음 기획과는 한참 동떨어진 모양새가 되기 일쑤고… 게다가 연구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나 자신의 인간적 한계도 있었다. 좋게 말하면 신념이 강했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셌다. ‘내가 운동하려고 연구하지 연구하려고 연구하나?’ ‘공부는 온전한 인간으로 살기 위한 과정일 뿐이니 연구를 위한답시고 목적 전치를 감내하지 말자’. 그렇게 난 남들이 학위 논문을 쓸 때 집회에 다니고 전공과 별 관련도 없는 외부 원고를 썼다. 모두 익명 또는 준익명으로 했다. 돈이나 경력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흐름에 참여한다는 만족감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인간이 진짜 위험한 거다. 웬만한 유인책으로는 움직이지 않으니 나조차도 나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이런 성격이면서 시키는 건 다 하는 기관 소속 연구원을 목표로 삼았었다니… 여성이라는 이익집단의 대의를 위해 눈 앞의 이익에 따라 자의식 없이 움직이는 어용 연구자가 되고 싶다는 나의 꿈은 이렇게 좌절되었다. 

논문은 형식화된 글이니 형식적으로 작업하면 될 거라던 기대는 아는 게 없어서 용감했던 나의 착각이었다. 어떤 형식으로 어떤 주제를 다루든 연구는 단순한 절차나 정형화된 글쓰기를 뛰어넘는다. 연구자의 문제의식과 주장은 그 자체로도 연구자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한다. 또한 오랜 시간과 노고를 들이는 연구 과정은 곧 연구자 개인이 인간으로서 성숙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영혼이 담기는 것이다. 주제와 주장을 형식에 집어넣어 함수처럼 빼낼 있는 게 아니었다.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연구가 아닌 내가 원하는 연구가 뭘 지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활자나 데이터가 아닌, 연구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과 실존과 이해관계에 관해 알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료이자 자매로서 이들의 목소리를 연구에 담고 싶었다. 

2017년, 디지털 성폭력 근절 활동 단체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메르스 갤러리’와 ‘메갈리아’를 거치며 디지털 성폭력 대응 활동을 위해 모인 ‘메갈’들이 있었다. 스크린 너머에서 0과 1로만 짐작하다가 실제로 만나본 이들은 젊다 못해 어렸고, 특히 대표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 운동에 뛰어들어 대학 진학까지 미룬 사람이었다. 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위험하고 고된 데다가 남들이 알아 주지도 않는 일을, 돈을 벌 수도 있는 것도 아닌데, 자기 일처럼 한단 말인가? 그야말로 연구 대상이었지만, 당시의 내가 간과했던 게 있다. 이들은 자기 일이기 때문에 이 활동을 하는 거고 나 또한 내 일이기 때문에 이 연구를 하려 했다는 거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으나 같은 여성이었고, 문제의식,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 젊은 나잇대, 고집스러운 성격 등의 특징까지 공유하고 있었다. 

연구자로서 단체를 방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정식으로 단체 활동가가 되었다. 2017년 9월부터 단체가 해산한 2020년 2월까지, 자그마치 만 2년 6개월 동안 나는 핵심 활동가로서 디지털 성폭력 근절 시민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가입 당시만 해도 한국의 디지털 성폭력과 이를 근절하기 위한 시민 운동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단체가 해산할 무렵 돌아보니 우리가 생산한 자료가 제법 쌓여 있었다. 이 활동의 성격과 규범을 형성한 사람 또한 우리였다. 나는 관찰자가 아닌 일원으로서, 이미 존재하는 자료를 연구하는 대신 원 자료 자체가 된 것이다.  

할 수 있는 말, 하지 못했던 말, 해야 하는 말

한국에서 여성에 관해 연구하는 여성 연구자라는 나의 입장은 참 애매했다. 나는 온라인에서는 사회적으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어서 익명으로만 활동하는 ‘메갈’이었다. 동시에 오프라인에서는 공식적인 학적을 가지고 학위 논문이라는 권위 있는 연구를 생산할 연구자였다. 단체 활동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논문 집필에 돌입하면서, 연구자인 나는 나와 너무나 비슷한 연구대상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일반적인 연구가 그러하듯 연구자인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연구 대상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관찰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여성 연구자’로서 자매들의 의견과 이해관계를 대변할 것인가? 둘 다 껄끄러웠다. 내가 ‘바깥’에서 이들을 관찰하거나 ‘대변’하는 것이 부적절한 구도로 느껴졌다. 이건 연구를 위한 기술(technic)이나 취향이 아닌 ‘주제 파악’의 문제였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1988)에서 스스로 말할 권력을 가지지 못한 약자들의 정치적 주체성 내지 타자성에 관하여 이야기한다.[1] 이때 중요한 것은 서발턴이라는 개념의 정의에 천착하거나 ‘진정한 약자’를 선별해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전혀, 철저히 표현할 수 없어야만 약자의 ‘자격’이 갖춰진다는 이해는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아는 미치광이는 미치광이가 아니므로 제대할 수 없다’는 소설 <캐치-22>의 함정이 인물들을 죽는 순간까지 전쟁터에 붙잡아 두듯, 어쨌든 자신을 표현하는 순간 그는 더이상 약자가 아니게 된다는 개념의 장난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불쌍한 타자’와 ‘이들을 대변하는 식자층인 자신’ 사이에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만드는 것과 같다. 

처음 안토니오 그람시가 정의한 서발턴은 가진 것 없는 자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어떤 시스템에도 접근할 수 없고, 따라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다. 스피박은 <총파업(General Strikes)>(2011)에서 서발턴의 개념을 중산층까지 확장한다.[2] 핵심은 재산의 수준이 아니라 공적 권리, 자신의 주장과 요구를 공공에 전하여 수용 받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다. 나는 나아가서 지금 이 사회에서 서발턴을 단일한 기준이나 인격 단위로 정의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입으로도 어떤 것에 대해선 말할 수 있고 어떤 것에 대해선 할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는 서발턴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아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서발턴은 정체성보다는 상태에 가깝다. 나 또한 연구자로서 발화의 자격과 권위를 가졌지만 동시에 내가 여성으로서 하는 어떤 이야기는 아무리 말해도 세상에 가 닿지 못했다. 그리고 나조차도 차마 말할 수 없어 은폐하려 했던 말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다른 활동가들과 나 사이에 연구 주체와 관찰 대상이라는 선을 긋거나 이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대신, 익명 활동가이자 기명 연구자인 나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내 논문에 쓰기로 했다.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는 연구자가 연구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 되는 연구방법으로, 연구자에 따라서는 ‘자기민속지’나 ‘자기민족지’라고도 부른다. 연구자는 일인칭 시점에서 자신의 경험과 감정, 이에 대한 해설을 서술하며 개인의 경험과 사회의 경험이 한 인간의 삶에서 만나는 지점을 드러낸다. 연구자는 사회를 살아가는 한 명의 실존적 인간인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고 이에 관한 분석을 제시한다. 이때 연구자는 연구의 대상으로 설정한 기간 말고도 태어난 이후 사회화를 거치던 성장기와 해당 연구를 발표한 이후까지 통틀어 자신의 연구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그렇기에 자문화기술지 연구는 연구 대상에 대한 완결된 텍스트가 아닌, 끊임없이 첨삭되고, 편집되고, 입을 통해 발화되고, 때로는 왜곡된 채로 연구자가 손쓸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지 멋대로 돌아다니고, 그렇게 사회적 소통의 매개가 되기도 하는 과정으로서의 텍스트이다. 

처음부터 내가 자문화기술지를 연구방법론으로 채택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연구 초기에는 디지털 성범죄 근절 활동의 구체적 실행, 그 중에서도 기술적 실행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었다. 그런데 연구실에서 한참 동영상 필터링 기술에 대해 서술하다가도 현장만 나가면 이게 과연 맞는 방향인가 싶은 회의감에 빠졌다.

디지털 성폭력이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다뤄진 지 몇 년 안 된 탓에, 그리고 ‘디지털’과 ‘성’이 결합된 범죄 자체의 특징으로 인해 기성 세대 중에는 이 문제에 적절히 대응 전략을 짤 만한 인력이 충분치 않다. 소위 말하는 ‘과학기술계’와 법조계의 공공 기관에서 예산을 집행하고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인력은 주로 50대 남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적잖은 높으신 분들이 마우스 좌클릭을 한 번만 하면 될 때 더블클릭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에서 계정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분도 드물다. 알맞은 횟수만큼 클릭을 하고 SNS 사용 경험이 있으면서 피해자중심적 반성폭력 의식까지 갖춘 사람? 이쯤 되면 헤아리기가 민망하다. 

<그림 1>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참가자의 피켓

나는 기술만능주의에 사로잡힌 관료와 기술자들이 시간과 인력과 예산을 실효성 없는 디지털 성폭력 대응 ‘AI’, ‘자동화’, ‘프로그램’에 낭비하는 것을 허울만 좋은 자문위원, 멘토, 시민사회 발언자의 입장에서 허탈하게 지켜보았다. 디지털 성폭력 근절 운동은 실제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사회가 망가지는 전쟁터에서 여성 대상 폭력과 맞서 싸우는 처절하고 절실한 운동이다. 매일같이 성 착취를 목격하고, 불법 촬영 영상을 찍거나 보지 말라는 상식적인 요구를 하면서도 얼굴과 이름을 숨겨야 하는 게 이 활동이다. 그리고 난 민과 관을 잇는 연구활동가로서 “몇년 전 한줌의 재가 된 내 친구는 어째서 한국 남자들의 모니터 속에 XX대 XX녀라며 아직 살아있는가”라는 절규를 저들에게 전하고 대답을 받아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부서져라 일해왔다. 그렇게 얻어낸 예산과 기회가 이렇게 낭비된다고? 나의 분노는 꽃다운 여성들이 유니폼과 하이힐을 착용한 채 공손하게 중년 남성 관료들에게 마이크를 ‘의전’하던 과기정통부 주관 디지털 성폭력 근절 방안 공모전 시상식에서 폭발했다. 당장 무대로 난입해 행사를 박살내버리고 화려하게 신문을 장식하며 너도나도 토론회를 열고 한 마디씩 보태게 만들어 이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드는 미래를 3분 정도 상상해봤다. 하지만 사회적 인격의 자살테러를 감행하기엔 아직 내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이 치욕은 잊지 않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지면에 효수하리라… 그렇지만 더 급한 것은 이런 낭비가 반복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었다.

단체 해산 후로도 디지털 성폭력 근절 운동을 이어가며 이 범죄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이자 시민 운동가, 연구자라는 다층적인 당사자성을 지니게 된 나는 ‘디지털 성폭력 앞에 선 여성’을 당사자이자 연대자로서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특수한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런 내가 ‘연구 대상’과 거리를 둘 수 있다고 우긴다면 기만일 뿐만 아니라 낭비일 것이다. 공공기관이 주관하는 행사라는 것들이 봉창만 두드리는 중이기에 더더욱, 기술적인 내용에 중점을 둔 연구를 나까지 더하기보다는 이 특수한 지위를 활용한 연구를 해야겠다 싶었다. 디지털 성폭력과 관련된 기술적 대응에는 인간 행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과 이들이 기술을 작동시키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같은 낭비와 피해자들의 고통만 누적될 것이다.

돌아보면 존재조차 모르면서도 막연히 STS를 찾아 헤매던 때처럼 나는 계속 이런 방법론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점이라면 실천하기 위한 철학을 고안하기 위해 물리적 현실을 연구하고 싶었던 그때와는 달리 쓰이기 위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마음까지 고려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점이랄까. 결국 나는 내게 몇 남지 않은 가용 후보인 동시에 가장 매력적이고 윤리적인 후보가 되어버린 자문화기술지를 방법론으로 택하며 서사의 재구성과 심리 분석이라는, 내가 거의 진저리를 치며 떠났던 학부 시절의 도구를 다시 집어 들게 되었다.

망설이고 더듬으며 적어 넣는 일인칭 ‘나’의 이야기, 자문화기술지

자문화기술지 방법을 채택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주관적인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연구로 형식화하느냐는 문제이다. 주형일(2007)이 말하는 것과 같이, 이 방법론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고, 해석학적 현상학의 입장에서 분석보다는 기술을 앞세울 뿐만 아니라 글의 다양함과 혼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전통적 학계가 가진 지식생산물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사물이나 제도, 현상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기술하면서 일정한 자기성찰과 해석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아주 문학적인 서술에서부터 신뢰성과 타당성에 신경을 쓰는 사회과학논문까지 모두 자기민속지학의 결과물에 포함될 수 있다”.[3] 하지만 아무리 자기민족지의 텍스트 형식이 고정될 수 없다고 해도 연구는 연구. 학술 논문이라면 비밀일기와는 달라야 한다. 주형일은 같은 연구에서 이 방법론을 채택하는 연구자에게 논문의 신뢰성과 엄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객관적인 자료들을 제공할 것, 그리고 일반론적인 평가 속에 자신을 숨기는 대신 주관적 판단과 감정을 드러내고 학습과 상호 비판을 통해 자기성찰의 진정성을 끝까지 추구할 것을 주문한다.

나는 활동가이자 STS 연구자로서 인간 행위자가 디지털 성범죄라는 기술 기반 성폭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터놓고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내가 동원한 ‘객관적’ 지표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Fifth Edition), 약칭 ‘DSM-5’이다. 디지털 성폭력 근절 활동가들 사이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약칭 ‘PTSD’)는 아주 흔하게 나타난다. PTSD는 디지털 성폭력 근절 활동이 고통받는 인간을 지켜보는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에, 그리고 피해자와 연대자의 인구 집단이 겹치기 때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고유하고 핵심적인 특징이다. 게다가 DSM-5는 학부 시절 임상심리학을 공부하며 달달 외웠던 친숙한 도구이기도 했다. 활동을 시작한 이후 꾸준히 내원 중인 상담 기관과 신경정신과에서 연구와 관련된 상의를 하거나, 연구 중 내게 발생할 수 있는 정신적 부담에 대응하기에도 수월할 것 같았다. 내 일기에서 증상과 관련된 내용도 인용하고 동료 활동가의 활동 회고록도 인용해야지. 이걸 통해서 디지털 성폭력의 기술적 대응이라는 게 실제로는 어떤 행위인지 블랙박스를 열어 보이겠어. 나는 연구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에 신나게 DSM-5를 펴고 진단기준들을 나열한 뒤 각각의 항목에 맞춰 나의 경험을 기술하기로 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차마 다 적기도 전에 눈물을 터뜨렸다.

떠올리기 싫어서 치워 뒀던 생각들을 끄집어내야 했다. 병원에서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들을 써야 했다. 그래서 다시는 안 읽을 생각으로 일기 속에 묻어버렸던 경험들을 파 올렸다. 책장 사이에 남아 있던 나와의 재회는 낯설고 처참했다. 진정제를 처음 처방 받았던 날의 일기엔 너무 좋다고, 이 약을 평생 먹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 저 날 처방 용량 먹고서 어지러워서 카페에서 쓰러졌었는데. 잠을 못 자겠다는 말도 많았다. ‘무섭다’, ‘외롭다’는 말도 거의 매일 적혀 있었다. 저 세 글자가 묶여 쓰인 부분이 너무 많아서 다이어리 내지 디자인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PTSD의 대표적인 증상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대상을 피하는 것이다. 그 회피가 직업 활동이나 인간관계, 생활에 문제를 일으켜도 환자는 자기 의지로 회피를 극복하기 어렵다. 나는 연구를 피했다. 의지로 마주할 수 없어서 약물의 도움을 받았다. 오전을 식사나 공과금 처리 등 ‘꼭 해야 하는 일’로 보내다가, 결국 잡무가 떨어지고 연구와 나 둘만 남으면 ‘논문 쓰기 한 시간 전에 먹으라’고 병원에서 처방 받은 안정제를 먹고 각오가 설 때까지 기나긴 일기를 썼다. 작업이 힘들면 진통제를 먹었다. 취침 전에는 수면제를 먹었다. 심하게 불안하고 무기력했다. 활동 시기에 쓴 일기와 다른 활동가의 회고록을 읽는 내내 울면서 인용할 부분을 추렸다. 그러다 탈진해서 작업을 접고 다음날을 맞으면, 전날 추려 둔 자료를 논문에 배치할 엄두가 안 나서 하루 종일 그대로 누워 있기도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루에 네 시간 반 이상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미치겠는데 진도가 안 나가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일기는 평생 썼고 상담도 200회 넘게 받았는데. 내가 한 여성주의 세미나가 몇 번인데. 내 경험을 언어화 하는 데에 능숙하다고 생각했지만, 학위논문이 될 글에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적어 넣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안전 지대에 두었던 경험을 불특정 다수에게 읽히며 공공 영역에서 소임을 하도록 풀어놓아야 한다니. 엄청난 막막함이 엄습했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나도 참 연구 대상이다… 그 힘든 일을 별 꼴을 다 봐가면서 하더니 또 이걸로 논문까지 쓰고 있네… 하지만 어떻게든 졸업은 해야 하니까 화이팅… 

문제의 일기들을 썼던 때엔 내가 그렇게 극한에 몰려 있다는 걸 몰랐다. 힘들긴 해도 이런 일에 고생이 따르는 건 당연하고 이 부담을 잘 관리하는 것도 이 분야에서의 소양 내지 전문성이겠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나의 일기는 항상 그럼에도 이 활동과 연구가 가치 있고, 내가 선택한 일이며,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나의 일이니까 힘을 내자는 자기 독려로 끝나고 있다. 그러나 다시 보니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독려라기보다는 도망쳐선 안된다는 다짐, 또는 채찍질처럼 보였다. 일기 속의 나는 강박적으로 느껴지리만치 절망을 경계하고 있었다. 마치 이 활동이 결국엔 좋아야만 한다는 것처럼, 이 활동이 주는 고통이 보람으로 전부 상쇄될 수 있으며 나의 심층을 결코 훼손시킬 수 없다는 것처럼.

나는 내가 PTSD 환자인 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절한 의료적 치료를 받고 있었고, 이를 공공연히 밝히는 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디지털 성범죄 대응 운동에 정신적 외상이 따르는 건 당연하다. 공익적인 활동 중 입은 상해이니 만큼 사회적 인정이 따르리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PTSD는 나를 취약한 사람보다는 헌신적이고 능력 있는 활동가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요컨대 PTSD는 떳떳하게 드러낼 만한 장애였던 것이다.

PTSD 치료에는 외상의 내용을 안전하게 재구조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자신이 신뢰하는 가까운 사람에게 구체적인 장면을 설명하고 그때의 내 반응과 감정, 이를 떠올리고 말하는 지금 내 심정에 대해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반성폭력 활동 중 내가 입은 상처에 대해 가까운 친구들이나 의사, 상담사와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PTSD’라는 개념은 그저 개념일 뿐이며 구체적인 외상 장면이나 그를 경험하는 인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진단 기준과 처방전, 상대의 상상력과 배려심이 내 고통에 대해 대신 말하게 해왔다. 본인을 자기 성찰에 능숙하고 사회성도 좋으며 치료 절차의 정석을 따르는 모범적인 환자라고 생각해왔던 나는 내가 나의 고통을 무시해왔으며 그래서 고통 호소가 피상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걸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충분히 인정하고 표현한다고 생각했던 게 전혀 충분한 게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햇수로 4년 째 매주 만나온 상담 선생님의 이름을 모른다는 걸 연구를 목적으로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야 깨달았다. 이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그제야 처음으로 했다.

나는 날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멘탈이 강해서’ 이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고통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나의 상처를 마주했다가 스스로를 약한 사람처럼 느끼게 될까 봐, 이 운동의 당위성이 훼손될까 봐 ‘정당해보이는’ 고통만을 선별적으로 인정하고 교묘히 노출해왔던 거였다. 고통은 당연히 사람을 취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연구를 통해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활동에 따르는 부담’의 핵심이다. 연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던 나의 고통을 인정해야 했다. 상처받는다는 것이 곧 약함을 의미한다는 역기능적 신념에 휘둘려 왔다는 걸 인정하고 이를 교정해야 했다. 나는 학위를 취득하려다가 졸지에 논문 심사 일정을 고려해가며 전인격적인 성장을 이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몸에 익은 버릇이라서 가벼운 어조로 쓰고 있지만, “일반론적인 평가 속에 자신을 숨기는 대신 주관적 판단과 감정을 드러내고 학습과 상호 비판을 통해 자기성찰의 진정성을 끝까지 추구”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자문화기술지 방법론이 연구자 본인에게 전인격적인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 연구가 연구자와 특히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방법론이라는 것, 이렇게 생산되는 논문이 과정으로서의 텍스트라는 것, 그리고 취약함을 감내해야 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을 그렇게 모든 문장을 망설이고 더듬으면서 쓰던 매 순간 실감했다.

학술 공동체는 자문화기술지 연구자의 취약함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 

자기 개방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은 자문화기술지 방법론을 채택한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정서이다. 이는 사적인 경험을 공개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일 때도 있고(주형일, 2007), 연구로 인해 몸 담은 사회에서 배제당하거나 법적 시비에 연루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두려움일 때도 있다(정희성, 조규혜, 2020).[4] 

남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경험을 공개하는 것이지만 나는 사실상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마치 치부가 드러나는 느낌이랄까? 남의 이야기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것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만 내 사적 경험을 공개하는 것은 아주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내 경험을 숨기게 된다면 결과물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형일, 2007) 

학계라는 좁은 관계의 연결망 속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극심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이 두려움은 지나친 우려가 아니라 명예훼손과 같은 법적 대응에서부터 뒷담화나 따돌림과 같은 일상적 차원의 보복 가능성까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실질적 두려움이다. 바로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학계 안에서 작동하는 미시적 젠더 권력의 작동 방식을 포착해 보이는 것이다.

우리 역시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본 논문에서 우리의 경험 속에 연루되어 있는 개인들이 실제로 법적 대응을 해오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정희성, 조규혜, 2020) 

나도 부담스럽고 두려웠다. 자신을 공개하는 행위 자체가 취약함을 내포하고 있는데, 심지어 나의 경우에는 나의 상처를 공개했다. 아무리 이게 공익적인 의도로 행하는 ‘연구’라지만 집필 내내 거부감을 느꼈다. ‘내가 이 활동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았고 약해졌다, 이 정도를 감당했다’는 말을 진단이라는 객관적인 척도만이 아닌 일기장까지 인용해가면서 한다는 게 묘하게 자존심 상하고 구차하게 느껴졌다. 알아 봐 달라는 애원처럼 보일까 봐 걱정됐고 누군가가 날 동정한다면 짜증도 날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생산해온 사람이다. 발화의 사회적 기능에 민감하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평소에도 넘버링까지 해가며 정해둔 원칙에 따라 말할 정도다.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안 할만한 이야기를 할지 말지, 한다면 어디까지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처방 받았던 약의 종류와 용량을 써야 할까? 어떤 무모하거나 자기파괴적인 행위를 했는지 적어야 할까? 외상 내용과 마주하길 피하기 위해 어떤 중독적 행위에 몰두했는지 구구절절 적어야 하나? 밥도 안 먹고 하루에 16시간씩 게임을 했었다고? 웹소설과 웹툰에 몇 백만 원을 결제했다고? 악몽과 플래시백의 내용은? ‘투 머치 인포메이션’ 아닌가? 자의식 과잉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이런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이 나의 연구자로서, 활동가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나의 약점이 되는 건 아닐까? 

외상 경험을 들여다보고 글로 재현하는 고통 때문에 논문을 수도 없이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 순간이면 ‘연구자가 연구로 인해 상해를 입는다면 그 연구를 지속하는 것은 윤리적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곤 했다. 자문화기술지의 연구 주제가 연구자 본인의 치명적이지 않은 경험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자신이 속했던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면 연구를 막는 게 더 큰 문제의 소지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연구자가 다루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고통 그 자체라면? 연구로 인해 실제로 연구자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된다면? 연구 과정이 연구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면? 이런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정당한 일일까? 나에게 좋을까? 내가 속한 전공 분야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학계는 이런 경우에 대한 공식적인 안전책을 마련해야 할까? 그 안전책은 강제성을 가져야 할까? 

연구가 학계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정치적으로, 또 콘텐츠로도 읽히는 오늘날 연구자의 취약성은 더욱 심해진다. 특히 자문화기술지 방법론으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주제를 다루는 경우, 불특정 다수가 연구자를 공격할 의도로 해당 연구를 악용할 가능성도 있다. 이 또한 평생 연구자와 유기적 관계가 지속되는 자문화기술지 연구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지만, 학문 공동체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소속 연구자와 함께 마주할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지식 생산의 과정에서 연구자와 함께 하는 것이 학술 공동체의 당연한 역할인 이상 자문화기술지를 쓰는 연구자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감당하게 되는 실존적 취약함에 따르는 위험에도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연구 결과물은 비밀 일기가 아니니 말이다. 


[1] Spivak, G. C. (1988). Can the Subaltern Speak? In C. Nelson & L. Grossberg (Eds.),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pp. 271–313).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 Spivak, G. C. (2011). “General strike”, Tidal: Occupy Theory, Occupy Strategy, 1(December): 9. [https://docs.google.com/file/d/0B8k8g5Bb3BxdZmwzX1pDSW1UMjJaX29tVTdzVk9sQQ/edit?resourcekey=0-jxPsh9BvpNNkFyqaAzAOIg].

[3] 주형일 (2007), 「왜 나는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는가 : 자기민속지학 방법의 모색」. 『언론과 사회』, 15(3), 2-36

[4] 정희성, 조규혜 (2020), 「지리학계에 보내는 편지: 지리학과를 떠나는 두 여성 연구자의 이야기」. 『공간과 사회』, 30(2), 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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