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휴먼’ 그리고 ‘포스트휴먼’이라는 환상

The illusion: ‘Transhuman’ and ‘Posthuman’

서강대 사회학 석사 과정

정현

luyeana@naver.com

각각 닉 보스트롬과 캐서린 헤일스에 의해 촉발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는 인간과 과학기술에 관한 가장 시의성 있는 화제로 평가받는다. 생명공학, 나노기술, 인지신경공학 등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과 기후위기로 인한 인류종말론의 확산은 이러한 유행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다수의 문학 비평가는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를 사고실험의 영역에 한정하려 했지만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이 머지않은 미래에 탄생하리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 그리고 대중은 물론이고 생명공학, 나노기술, 인지신경공학 등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들 중 일부도 이러한 믿음에 동조하고 있다. 물론 그와 같은 믿음에 동조하는 과학자들의 수는 많지 않고 과학계에서 그들의 의견이 지배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들의 의견은 전문가의 진지한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과학기술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지식, 믿음과 태도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경향에 맞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의 탄생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지니는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려 한다. 본격적으로 이 작업을 수행하기에 앞서 우선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의 정의와 핵심 전제, 그리고 그 사상적 근원을 살펴보려 한다. 이어서 본고에서는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는 두 가지 사상적 조류(기술지상주의와 공리주의)를 염두에 둔 채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 담론을 비판하고자 한다.

들어가며

  닉 보스트롬과 캐서린 헤일스는 가장 최근에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를 가능하게 했으나, 최초로 그러한 논의를 촉발시킨 사람은 아니다. 그들 이전에도 유사한 논조의 주장은 존재했으며, 그 근원은 좁게는 줄리언 헉슬리부터, 넓게는 데카르트를 위시한 계몽주의 철학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본고는 이와 같은 논의의 범위를 줄리언 헉슬리로 한정시키려 하는데, 이는 계몽주의 철학자가 본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기술지상주의자들과는 다른 시대적, 공간적 맥락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초기의 과학 발전 수준은 현시점의 것과 비교했을 때 유의미한 차이가 있고(혹은 현시점에서 그렇다고 여겨진다), 당시에는 과학과 철학의 경계가 불분명했고, 과학의 다양한 하위 분과가 탄생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근대 초기에 유행했던 이성과 과학, 진보에 대한 믿음은 당시에 아직도 유효했던 종교 권력에 맞서는 반-담론의 성격을 지녔기에, 의도와 목적, 특히 사회 정치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그것이 현대의 기술지상주의와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반해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발생 이후인 18~19세기에 주로 활동한 줄리언 헉슬리는 현대 기술지상주의자의 것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시대적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줄리언 헉슬리는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이자 작가로,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다.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인류가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의하였고, 심지어 인간 종이 인간뿐 아니라 지구 내 다른 생물들의 진화 방향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했다. 사실 그러한 예측은 당시에는 매우 일반적인 관점이었는데, 당대에 활동한 많은 학자들은 과학이 생물학적 종으로서 인간의 생물학적 특질을 ‘개량’할 수 있으리라는 관점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질병과 죽음을 극복하고,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특질을 근절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과학이 인류를 혹은 특정 사회 집단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전환되었다. 인공자궁을 통해 여성의 해방을 꿈꾼 파이어스톤과 인간의 신체를 가진 상태로부터의 초월을 목표로 했던 해러웨이의 영향은 후에 캐서린 헤일스 같은 문화비평가가 등장하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주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두 인간 해방의 약속으로 전환되지는 않았는데, 맥스 모어는 그러한 흐름에 반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에 따르면, ‘트랜스휴머니즘’이란 “생명 증진의 원칙들과 가치들에 의해 인도되는 과학과 기술의 수단에 의해 현재 인간의 형태와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이라는) 지능 생명체의 진화의 지속과 가속을 추구하는 생명의 철학”이다. 이처럼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상대적으로 고전적인 정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닉 보스트롬은 주로 맥스 모어의 영향을, 캐서린 헤일스는 도나 해러웨이로부터 사상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닉 보스트롬과 캐서린 헤일스의 정의는 동시대의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 논의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

  닉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먼’을 “오늘날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보다 월등한 지적 능력, 질병에 걸리지 않고 늙지 않는 우월성, 무한한 젊음과 활력, 자신의 욕망, 정서, 심적 상태에 대한 압도적인 통제력, 오늘날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의식 상태에 대한 경험, 쾌락의 감정을 강화하고 불쾌의 감정을 제거하는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로 정의한다. 이처럼 그는 ‘트랜스휴먼’을 과학기술의 수혜를 받은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형태이며 미래 인류의 이상향이자 지향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트랜스휴먼’을 정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사조로 발전시키고자 했는데, 그에 따르면 ‘트랜스휴머니즘’은 “노화를 제거하고, 인간의 지성적/육체적/심리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개발하고 확대함으로써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의 가능성과 그 바람직함을 긍정하는 지적/문화적 운동”이다.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한 이상적 존재로서 ‘트랜스휴먼’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주목한 닉 보스트롬과 달리, 캐서린 헤일스는 인간의 유한성을 완전히 극복한 이상향보다는 미래 시점에 완성된 인간의 존재 상태로서 ‘포스트휴먼’을 사유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는 보철, 의식을 부수현상으로 신체를 지닌 존재와 컴퓨터 시뮬레이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 혹은 절대적인 경계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동시에 무의미하다. 많은 경우에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은 구분되지 않고, 이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이들도 드물지만, 적어도 닉 보스트롬과 캐서린 헤일스의 정의만을 염두에 둔다면 두 개념은 유의미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전자는 기능의 측면에서 월등히 향상되었다는 점을, 후자는 유한성이 주는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인간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만큼 결정적인 차이점은 아니나, ‘트랜스휴먼’은 어떠한 상태로 이행 중인 상태를 지시하는 반면, ‘포스트휴먼’은 이행이 완료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 또한 지적할 만하다. 그런데도 두 개념이 구분돼서 사용되지 않은 것은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가 몇 가지 핵심적인 가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휴먼’이든 ‘포스트휴먼’이든 간에 (1)플라톤부터 데카르트까지 이어지는 심신이원론, (2)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비관적 시각, (3)과학기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낙관적인 시각, (4)과학과 기술을 통한 인간 유한성 극복 및 사회 개혁이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사상적으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은 기술지상주의와 공리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는데, 기술지상주의와의 연관성은 비교적 명확해 보이는 반면, 공리주의와의 연관성은 상대적으로 모호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 내포된 기술지상주의 및 공리주의적 함의를 밝힌 후,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비판과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기술지상주의적 함의와 그에 대한 비판

  기술지상주의, 달리 말해서 ‘과학(만능)주의’는 “과학을 인간에 있어서 최고의 인식 형태로 간주하고, 원리적으로는 모든 문제가 과학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먼’은 (3)과학기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낙관적인 시각, (4)과학과 기술을 통한 인간 유한성 극복 및 사회 개혁이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술지상주의적 함의를 지닌다. 사실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기술지상주의를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앞서 언급했듯, 기술지상주의는 과학기술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지식, 잘못된 믿음과 태도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의 기술지상주의적 함의를 비판하려 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의 목적이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사회 개혁을 실현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닉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먼’을 늙지 않고, 죽지 않으면서 무한한 젊음과 활력을 가진 동시에 자신의 욕망과 정서 등 심적 상태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가능한, 현존 인류보다 지적으로 월등하게 우월한 존재로 정의하였다. 그런데 ‘트랜스휴먼’이 가진 특징은 오직 과학기술을 통해서만 성취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수단은 산전 유전자 편집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전 유전자 편집이 항상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결과만을 초래하는가? 혹은 언젠가 산후 유전자 편집이 가능해진다고 해서 유의미한 차이가 생길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가? 유전적으로 우월하고 완벽한 개체들만이 존재하는 ‘멋진 신세계’가 도래하면 사람들 간에 재능과 능력으로 인한 차이와 격차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통념과 달리, 재능과 능력은 유전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과 거리가 멀다. 무엇이 재능이고 무엇이 능력인지는 극히 자의적이며 사회적인 맥락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을 통해서 사람들 간에 자연적인, 혹은 유전적인 차이를 소멸시킬 수 있는 시점이 오면 재능과 능력의 정의 또한 변화할 것이다.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일찍이 위계를 재생산하고 권력관계를 정당화하는 문화의 역할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에 Swartz(1997)는 부르디외가 “문화의 내용이 아닌, 문화가 무엇을 하는지”에만 천착한 것을 비판했지만, 그의 비판은 부르디외의 지식사회학적 논의의 핵심 – 문화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지배의 수단으로서 문화의 역할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 을 빗겨난다. 일례로, 쁘띠 부르주아가 상징 노동을 통해 문화 자본을 축적하고, 문화 자본의 정의를 바꾸는 상징 투쟁에 가담함으로써 부르주아를 모방하는 데 성공하기도 전에 부르주아는 문화자본의 정의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분류체계를 서서히 바꿔나간다. 아무리 인간의 특성을 인위적으로 평준화한다고 해서 타인과 구분되려는 욕망, 좀 더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로 거듭나고자 하는 인간의 사회적 욕망을 근절할 수 있을까? 이는 위계가 없고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위적으로 인간의 인지적, 성격적, 육체적 특질을 결정하더라도 그것이 사물에 의미 부여를 하고자 하는 인간의 특성을 근절시킬 수 있는가?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의 옹호자들은 인간의 유전적인 특질을 평준화하는 것은 인간 종의 생존을 유리하게 할 것이라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근거는 매우 빈약하다. 그들은 인간 종이 유전적으로 우월한 개체로 거듭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진화’의 비유를 사용하지만, 실상 그들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이해도 하지 못한 상태다.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 선택과 적자생존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선택이다. 우연히 외부 환경 적응에 잘한 개체가 살아남는다. 따라서 어떤 개체가 살아남는지는 순전히 외부 환경과 이미 결정된 유전적 특질이라는 우연적인 요소에 달려있다. 어떤 종 중에서 돌연변이가 없다면 그 종은 환경 변화에 더욱 취약해지고, 종 전체의 생존도 위협을 받는다. 만약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적 진리라 가정한다면, 유전적인 차이를 줄이고 인위적으로 돌연변이를 제거하는 것만큼 종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은 그 원래의 목적인 인간의 유한성(이 경우에는 재능과 능력 면에서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비판받아야 한다. 캐서린 헤일스처럼 개인의 유한성 극복이 아닌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이는 잘못된 진단에 기반을 둔 잘못된 처방이다. 사회의 모든 문제가 개개인의 유전적 결함 때문에 비롯되는가? 오직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만 과학기술이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공리주의적 함의와 그에 대한 비판

 제러미 벤담에 따르면 공리주의의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옳은 행위란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 원칙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요약되기도 한다. 이때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일체의 고통을 막는 행위를 의미한다. 공리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정은 다음과 같다. (1)‘행복’이란 쾌락의 극대화와 고통의 최소화를 의미하고, (2)쾌락과 고통이 양화될 수 있기에 행복 또한 양화될 수 있으며, (3)개인 차원에서의 행복이 아닌,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의 행복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공리주의가 처음 논의된 시기에 (2)와 (3)은 공리주의를 가장 급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상으로 만드는 요소였으나, 현시점에 이는 공리주의를 가장 문제적인 – 반동적이거나 비윤리적인 것으로 평가받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는 공리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비판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현대의 많은 윤리학자, 혹은 정치철학자들은 설령 행복이 쾌락의 극대화와 고통의 최소화를 의미하더라도 그것이 양화될 수 있다는 관점에는 회의적이다. 많은 경우 행복은 항상 기본적인 인간 욕구의 충족(대표적으로는 의식주의 해결 등)만을 요구하지는 않고, 대체로 행복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며 다른 가치만큼이나 행복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회 전체적인 행복(쾌고감수)의 총량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가정은 소수의 권리 침해를 정당화하고, 그가 감수해야 할 고통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 인간의 존엄성 침해에 관한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가치로 여겨지던 인간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은 공리주의적 윤리관에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 사회 전체적인 쾌고감수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충돌될 때, 인간 생명의 가치는 어떻게 옹호될 수 있는가? 공리주의는 이러한 우려를 낳았고, 존 밀은 두 가치를 양립하게 하기 위해 쾌락의 양과 질 개념을 고안해냈지만, 이조차도 공리주의적 관점의 내재적인 한계를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트랜스휴먼’, ‘포스트휴먼’에 대한 옹호와 공리주의와의 연관성은 기술지상주의와의 연관성만큼은 아닐지라도 비교적 명확한 편에 속한다.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 대한 옹호가 성립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공리주의에 입각한 변론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옹호자들에 따르면, 현생인류를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으로 개량하는 것은 개인 차원에서 인간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증진하며, 양화할 수 없는 추상적인 가치를 희생시킴으로써 사회 전체적인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기에 정당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유효한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 반드시 개인 차원에서의 행복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과 양화할 수 없는 추상적인 가치가 결코 적지않은 대가라는 것, 사회 전체적인 행복의 추구가 항상 정당하지 않다는 문제 제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 대한 옹호는 공리주의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기에, 공리주의를 겨냥한 비판은 이 경우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비판은 그것이 개인, 특히 사회에서 소수를 차지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 침해를 정당화하고, 사회 정의에 위배되는 행위, 제도, 정책 등을 옹호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죽음과 질병,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유전적 조건의 근절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인간 종을 개량하려는 시도는 죽음에 임박한, 혹은 질병으로부터 고통받거나 장애가 있는, 그것도 아니면 유전적으로 열등한 형질(인지기능의 양화 가능한 측면이 유의미하게 떨어지거나, 신체가 허약하거나, 심지어는 여성이거나 유색인인 것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을 가진 이들을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할 위험이 있다. 이처럼 우생학적인 성격이 짙은 논의로부터 가장 많은 타격을 받는 집단은 사회적 약자 집단이나, 사회적 약자 집단만이 이로 인한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다면 인간의 가치는 그가 수행하는 기능으로 환원될 것이고, 인간이 지니는 가치는 기계나 부품과 질적으로 구분되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더 기능을 잘하는 존재에 의해 언제든지 대체당할 위험에 놓일 것이다. 또한 닉 보스트롬이 주장한 바와 같이 ‘트랜스휴먼’이 자신의 욕망, 정서, 심적 상태에 대한 압도적인 통제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인간이 감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으로부터 감정이 제거된 상태가 인간의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기에 바람직하다는 결론은 애초부터 성립 불가능하다. 인간의 감정 및 욕망에 관한 영역은 인간의 쾌고감수 능력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의 기획은 사회 정의에 위배된다. 이것이 사회 정의에 위배되는 방식은 공리주의가 그러한 것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일례로, 존 롤스는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적인 행복(쾌고감수)을 고려 대상에 포함시키는 반면, 누가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행복, 즉 쾌고감수의 분배, 누가 더 많이 고통 받고 누가 더 많은 쾌락을 누리고 있는지를 문제 삼았다. 이는 내가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에 대해 문제 제기하려는 바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만약 현 인류를 우생학적으로 우월한 종으로 개량할 수 있다면, 이는 누구의 쾌락을 가장 극대화하고, 누구의 고통을 가장 최소화하는 결과를 초래하는가? 개량을 당하는 이들일까, 아니면 개량을 통해서 유무형의 이득(그것이 소수의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이든 정부 관계자이든 초국가적 기업의 CEO이든 간에)을 얻는 자들일까? 그리고 인류 종 개량으로 인해 초래된 비용은 누가 지불하는가? 그를 통해 가장 많은 이득을 얻는 소수의 특권층인가, 아니면 다수를 차지하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인가? 분명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며 삶의 질 향상에 유의미하게 기여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공평한 방식으로 기여했는가? 이미 전 세계적으로 기아가 근절될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될 수 있으나, 제3세계의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은 여전히 기아와 영양실조로 인해 고통받는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의 핵심은 파이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분배하는 방식일 것이다. 파이의 크기, 즉 총생산량이 충분히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정의로운 배분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파이의 크기를 키울 수 있는 것은 과학기술일지라도 그것을 적용하고 관련 정책을 제정하거나 시행하며, 그것의 결과물을 배분하는 것은 좁게는 정부 부처와 관련 단체, 넓게는 사회 전체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가며

  지금까지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의 정의와 발전사, 그 핵심 전제와 배경이 되는 사상을 살펴보았다. 또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을 뒷받침하는 전제의 모순성과 그것의 사상적인 배경이 되는 기술지상주의와 공리주의가 지니는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요컨대,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 대한 옹호는 (1)플라톤부터 데카르트까지 이어지는 심신이원론, (2)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비관적 시각, (3)과학기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낙관적인 시각, (4)과학과 기술을 통한 인간 유한성 극복 및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은 기술지상주의와 공리주의의 영향 때문인데, 두 사상은 각각 목적론적인 관점,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 정의의 측면에서 제기되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목적론적인 관점에 따르면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은 (4)에서 언급된 목표를 달성할 수 없기에 옹호될 수 없고, 윤리학의 관점에 따르면 (2)와 (3)에서 드러나는 태도는 매우 위험다. 과학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와 낭만화는 실제로 과학이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보지 못하게 하며, 몇몇 유전적 특질에 대한 지나친 긍정은 우생학에 대한 옹호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하는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 열광하기에 앞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의 세계가 정말로 전 인류가 추구할 만 한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읽을거리

피에르 부르디외, 최종철 옮김, 『구별짓기』, 새물결, 2005

피에르 부르디외의 대표작이자, 가장 먼저 영어사용권역(Anglophone) 독자들에게 소개된 책입니다. 지식과 문화가 어떻게 위계와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는지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줍니다.

존 롤스, 황경식 옮김, 『정의론』, 이학사, 2003

정치철학자로서 존 롤스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그의 대표작입니다. 말 그대로 정의에 관한 기존의 철학적 논의를 집대성한 책입니다. 특히 공리주의를 겨냥한 비판과 그 근거가 인상적입니다.

참고문헌

“The Gardian”, 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18/may/06/no-death-and-an-enhanced-life-is-the-future-transhuman

박성원 외 (2016), 「트랜스휴머니즘 부상에 따른 과학기술 정책이슈의 탐색」, 『정책연구』, pp. 1-208, 과학기술정책연구원

Bostrom, “Transhumanist FAQ”, http://www.nickbostrom.com/

캐서린 헤일즈, 허진 번역 (2013),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 휴먼이 되었는가』, 플래닛

이상헌 (2011), 「칸트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포스트휴먼」, 『서강인문논총』, 32, pp. 125 – 155

피에르 부르디외, 최종철 번역 (2005), 『구별짓기』, 새물결.

Swartz, D. (1997), Culture&Power,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J. 벤담, 고정식 번역 (2011), 『도덕과 입법의 원리서설』, 파주: 나남.

존 롤스, 황경식 번역 (2003), 『정의론』, 이학사.

장 지글러, 유영미 번역 (2016),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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