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드랙 (Technodrag)

스터프스터프(Stuffstuff) 이규원 & 최살구

스터프스터프(Stuffstuff)는 지난 4월 포킹룸(Forking Room)에서 주최한 전시 “레프트 테크(Left Tech)”에 렉쳐퍼포먼스로 참여하며 만들어진 팀이다. 전시, 워크숍, 강연, 토크, 리서치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물을 통해 사회, 기술, 예술이 교차하는 주제를 다루는 플랫폼인 포킹룸은 2025년 “Left Tech”라는 주제로 기술의 정치화를 고민했다. 자본의 증식과 발전주의에 결탁한 기술을 ‘왼쪽으로’ 되찾아오는 방법과 기술의 돌연변이화에 대하여 말하는 포킹룸을 무대로 스터프스터프는 “테크노드랙(Technodrag)”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테크노드랙은 우리가 기술을 사용할 때, 그것이 지정성별이든 정체성이든 ‘자기 자신의 성별’과는 상관 없이 ‘기술이 상정한 젠더’를 수행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규범적인 남성 표준 신체를 기준 삼아 만들어진 기술을 사용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남성성에 몸을 끼워 맞추게 된다. 스터프스터프는 바로 그 ‘몸을 끼워 맞추는 경험’에 주목하여 기술과 몸의 변형 가능성을 탐색했다. 성별이분법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서 이미 젠더화된 기술을 사용하는 과정을 ‘드랙 수행’으로 인식하여 그 이분법적 구조를 교란하고자 하였다. 테크노드랙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고정적인 젠더 이분법에서 벗어나 기술과 함께 젠더를 입고 벗을 수 있다는 변화무쌍한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젠더의 탈-부착 가능성에 주목하여 스터프스터프는 신체와 기술이 만나는 현장을 퀴어한 실험의 장으로 만들기를 제안했다. 

렉처 퍼포먼스로 개념을 정립한 테크노드랙 프로젝트는 현재 ‘스터프 일지 쓰기’의 형태로 발전되고 있다. 이는 젠더화된 기술(스터프) 하나를 정해 그것과 나의 관계를 성찰하여 그 스터프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보고, 그 시도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스터프스터프의 팀원들은 머리핀, 가방, 바리깡, 샤워기, 가위, 문 등의 일상적 사물들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탐색하고, 스터프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또한 이 일지쓰기 작업을 공개 워크샵으로 확장하여 여러 스터프와 관련한 참여자들의 일상적 경험을 나누고, 그것이 테크노드랙이라는 개념과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본 과학뒤켠 지면에서는 스터프스터프의 두 팀원 최살구와 이규원이 지난 테크노드랙 활동에 대해 회고한다. 팀 스터프스터프는 ‘테크노드랙’ 개념을 통해 젠더화된 기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바로 그 기술을 경유해 유동성을 만끽하고, 다른 존재 방식을 탐색하는 시도를 했다. 그 유동성만큼이나 ‘테크노드랙’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각 팀원들의 입장이 다양했다. 본 글은 ‘테크노드랙’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을 따라가며 최살구와 이규원이 ‘테크노드랙’적 사고를 통해 마주한 변화를 담는다.

Stuffstuff(스터프스터프) is a team formed through a lecture-performance at “Left Tech”, an exhibition organized by Forking Room in April 2025. Forking Room is a platform that explores the intersections of society, technology, and art through exhibitions, workshops, talks, and research. Under the 2025 theme “Left Tech”, it examined ways to reclaim technology from its entanglement with capital accumulation and developmentalism and to consider its potential for mutation. Within this context, Stuffstuff introduced the concept of “Technodrag”.

“Technodrag” suggests that whenever we use technology, we perform the gender that the technology presupposes, regardless of our own gender identity. For instance, when we adapt our bodies to technologies designed around a normative male standard, we unconsciously enact a particular masculinity. Focusing on this embodied adjustment, Stuffstuff explored how bodies and technologies might be reconfigured. By framing the use of gendered technologies as a form of “drag performance”, the project seeks to disrupt the binary and heteronormative structures embedded in everyday technological practices. The notion of technodrag highlights the fluid potential to “wear” and “remove” gender through technology, proposing experimental spaces where bodies and technologies meet in queer ways.

Originally developed as a lecture-performance, the technodrag project has evolved into a practice called “Writing the Stuff Diary.” In this work, participants select a gendered technological “stuff,” reflect on their relationship with it, experiment with alternative uses, and document their attempts. Team members investigate their interactions with everyday objects, such as hairpins, bags, clippers, showers, scissors, and doors, while exploring new ways of relating to them. This diary-writing practice has expanded into public workshops, where participants share their daily experiences with different “stuffs” and trace moments when these encounters intersect with the concept of technodrag.

In this article, Stuffstuff members Choi salgoo and Lee gyuwon reflect on their past technodrag activities. Through the technodrag concept, the collective not only critiques the gendered nature of technology but also experiments with fluidity and alternative modes of being through technology itself. Their diverse perspectives illustrate how technodrag thinking has reshaped their understandings and practices throughout the project’s development.



테크노드랙 선언 (Technodrag Manifesto)

우리는 모두 테크노드랙임을 선언한다.

이 세상의 많은 기술은 성 이분법을 전제한 채 만들어졌다.
그 기술들은 다시 성 이분법을 강화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언제나 그것을 넘어선다.
우리는 이미 모두 테크노드랙이다.

우리는 테크노드랙으로 기술과 몸의 부조화를 인식한다.
우리는 테크노드랙으로 배제와 손상이 부조화로 인한 것임을 인식한다.
우리는 테크노드랙으로 기술과 부조화하는 몸을 탓하지 않는다.
우리는 테크노드랙으로 그 기술을 주도하는 권력 구조를 응시한다.

우리는 기술을 우리 몸에 맞게 수선한다.
우리는 기술이 덧대어지는 몸을 적극적으로 상상한다.
우리는 기술과 함께 퀴어하게 변화한다.

우리는 모두 테크노드랙이다.
우리는 테크노드랙으로 (                     )

그림1. 올해 4월, 탈영역우정국에서 진행된 <테크노드랙> 렉처 퍼포먼스 중 사진. 포킹룸 제공.

팀 스터프스터프(Stuffstuff)는 포킹룸(Forking Room)이 주최한 전시 “레프트 테크(Left Tech)”1에서 테크노드랙(Technodrag)을 소개하는 렉쳐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테크노드랙이라는 발상은 우리의 몸을 기술에 맞추기 위해 변형해야 했던 공유된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평균 남성의 신장에 맞게 제작된 의자에 발 받침을 덧대거나, 평균 여성의 신장에 맞게 설계된 조리대에 맞추기 위해 몸을 굽히는 경험들 말이다. 여성 손 크기에 맞춘 고무장갑, 남성 운전자를 기준으로 설계된 에어백, 여성 교사를 위한 유치원 의자, 남성 노동자를 위한 안전화 등 특정 성별 규범에 깊게 의존하는 기술들을 나열하다 보니, 우리는 모두가 주변 환경에 맞추기 위해 일종의 ‘연기(performance)’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술과 몸 사이의 불일치를 더 깊이 파고들자, 그것이 단순히 성별 간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 내부에서도 우리를 특정 ‘규범’ 안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레이스 달린 옷이나 몸에 꽉 끼는 옷을 피할 수 있는가? 논바이너리의 몸은 ‘남성용’ 혹은 ‘여성용’ 옷 어디에 맞출 수 있는가? 우리가 가진 선택지가 명확히 둘로 나뉘어져 있을 때, 개인의 취향은 어디로 갈 수 있는가? 규범적 성별 이미지는 다양한 몸과 취향으로 이루어진 대다수를 배제한다. 이것이 드랙(drag) 퍼포먼스와 얼마나 다른가? 이미 우리는 기술이 제시하는 성별 이분법 속에 몸을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드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터프스터프는 기술을 사용할 때, 의식하지 않아도 그 기술이 상정한 특정 성별에 몸을 맞추게 되는 일상적 경험과 그러한 경험을 하는 개인의 정체성을 ‘테크노드랙’으로 명명하고, 기술을 사용하는 모두가 드랙 수행을 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드랙 퍼포먼스는 특정 성별 이미지를 과장함으로써, 그 고정관념들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드랙’에 기술을 의미하는 ‘테크노’를 더한 용어 ‘테크노드랙’은 기술이 성별 이분법 위에서 만들어졌기에, 우리가 기술을 사용할 때 특정 성별을 ‘연기’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렉쳐퍼포먼스를 진행한 지난 봄에서 약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테크노드랙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고 랙쳐퍼포먼스를 만들어냈던 과정을 Stuffstuff의 팀원 규원과 최살구의 관점에서 되짚는다. 이 글이 테크노드랙이라는 단어의 복잡성과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림2. 렉처 퍼포먼스 <테크노드랙>의 홍보 이미지. 이규원 제공.

<최살구의 글>

1. 테크노드랙을 떠올린 순간

‘테크노드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화상회의 화면 너머로 ‘이거다!’ 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요즈음 힙한 사람들 사이에서 트랜드로 떠오르고 있는 ‘테크노’와 미디어를 통해 하나의 대중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는 퀴어 컬쳐 ‘드랙’의 합성어라는 점에서 감각이 있는 단어라는 느낌도 있었지만, 이 단어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걸 직관적으로 설명해 준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혹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명확히 잡히지 않았었다. 우리 중 넷은 FSTS(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을 공부하는 6주짜리 세미나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는데, 그 중 규원이 left tech를 주제로 열리는 포킹룸 전시에서 무언가 해보자고 제안해 왔다. 넷이서 무엇을 할지 구상하는 와중에 여기에 관심이 있을 법한 친구 둘을 더 불러 모아 여섯이 의기투합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전시에서 ‘무언가’를 하자고 모이기는 했으나, 그런데 과연 그 ‘무엇’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합의하지 못했다. 무언가 페미니즘적인 것, 무언가 퀴어적인것, 그리고 무언가 기술에 관한 것. 그것들 사이에서 정리되지 않는 대화를 나누며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늘어놓았다.

당시 우리 팀의 이름은 젠더 미꾸라지였는데, (미꾸라지를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팀명은 ‘스터프스터프’이다.) 성별이라는 건 구성된 것이고 기술은 그것에 일조하고 있으며, 우리는 기술을 역 이용하여 그 구성된 성별을 이리저리 교란하고자 한다는 의미를 담았었다. 여성과 남성으로 공간을 나누는 인프라스트럭쳐, 의사에 의해 출생 시 성별이 지정되는 의료 권력, 성별 이분법에 기반해 만들어져 그것을 강화하는 각종 도구를 예시로 성별 이분법과 기술이 어떻게 영합하는지 드러내고, 기술을 역 이용하여 성별이분법적인 구조를 교란하는 ‘무언가’를 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1) 성별 이분법적인 기술은 ‘나쁜’가? 여성의 평균적인 신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기술 시스템은 여성의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데, 이때 여성 신체의 다름은 오히려 강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2) 성별은 구성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수행한다는 식의 논의는 이미 익숙한 이야기인데, 우리는 그저 기술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논의를 반복할 뿐인 것이 아닌가? 3) 성별 이분법적인 구조를 교란하는 그 ‘무언가’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가능은 한가? 무엇을 얼마큼 바꾸어야 구조를 교란하는 것인가? 4) 개인적으로 – 내가 이것을 하고 싶은가? (정확히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 이것인가? 또는, – 무엇이지?)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이어가는 과정 속에서 기술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기술이 상정하는 표준화된 신체가 문제라는 이야기, 하지만 표준화는 기술에 필연적이라는 이야기, 기술과 표준화를 ‘나쁘다’는 표현으로 일축하면 안된다는 이야기, 페미니즘과 퀴어 페미니즘의 교차점에 대한 논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혹은 가능은 한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여섯 명이 모인 만큼 각자의 입장과 정치적 의사가 미묘하게 어긋났고, 각자가 생각하는 ‘구조를 교란하는 무언가’가 무엇인지도 달랐다. 여섯 개 혹은 그 이상의 생각을 매끄럽고 일관된 하나의 주장으로 모으기는 불가능했다. 아주 어려웠던 수 번의 대화를 거친 후에, 우리는 공연을 위해 억지로 하나의 주장을 구성해 내기보다는 우리가 합의한 최소한의 언어를 전달하되, 각기 다른 입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단어 ‘테크노드랙’이 가진 울퉁불퉁함과 변용 가능성을 내버려두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에는 각자의 위치에 따라 각자가 생각하는 중요한 문제가 다르고, 그것을 다루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해가 있었다. 그 이해에 도달하기까지, 누군가 말한 A라는 주장 이면에 있는 그가 겪은 B라는 경험, 그것을 통해 갖게 된 C라는 생각을 발굴해 내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내 머릿속에 스치듯 떠오른 단어 ‘테크노드랙’은 여섯 명이 쌓은 두터운 대화를 양분으로 넓고 깊게 자라났다.

나는 이 지면을 빌려 내가 렉쳐퍼포먼스를 준비하던 당시 ‘테크노드랙’을 사용한 방식과 그 이면에 있는 내가 겪은 경험, 그것을 통해 갖게 된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나머지 다섯 명의 생각과도, 심지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도 다를 수 있다. 다섯의 팀원과 대화를 나누며 당연히 나의 생각도 변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나머지 다섯의 생각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어쩌면 그 당시의 나의 생각이 지금의 나머지 다섯의 생각과는 꽤 가까워졌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함께 글을 쓰게 된 규원이 규원의 시각에서 나름의 균형을 잡아주기를 바라며,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테크노드랙을 설명해 보겠다.

2. 의심해 보세요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혹시 만약 시스젠더가 있다면,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자신의 성별을 한번 의심해 보세요.” 

테크노드랙이라는 말을 제안했던 순간부터 사실 이 문장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굳건히 자기가 여자 혹은 남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서 계속해서 살아가는지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왜 여/남자인지 고민해 본 적이 정말로 없단 말인가? 단 한 번도 동성 집단에 적응하기 어려워 자신의 여성성/남성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단 말인가? 단 한 번도 나의 몸이 지금의 것과는 다르게 생겼으면 하고 바란 적이 없단 말인가? 단 한 번도 사회가 제시하는 성별 기준에 나의 몸이 들어맞지 않는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단 말인가? 나는 끝없이 떠오르는 의문들을 거쳐 논바이너리라는 단어에 나를 안착시켰는데, 돌이켜보면 이는 내가 페미니스트임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문화인류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저절로 우러나는 생각들 때문이기도 했다. 

페미니즘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 역할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전복하기 위한 학문이자 실천이자 라이프스타일로, 사회가 여성과 남성에게 기대하고 강요해 왔던 역할 수행을 지적하고 변화시킨다. 여기서 굳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지는 않겠지만, 페미니즘을 적절한 방식으로 접해본 사람이라면 페미니즘으로 인해 어떤 현상 이면의 사회구조를 인식하는 비판 의식이 생긴다는 점에 공감할 것이다. 한편, 문화인류학은 나에게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문장을 아주 깊이 새겨넣었다. 이 문장에는 문화의 모양새는 정말로 다양하고, 어떠한 문화가 어떤 모양새가 된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의 모습을 바꿀 수도 있다는 함의가 들어있다. 나는 페미니즘을 통해 두 성별에 기대되는 성 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키웠고, 문화인류학을 통해 그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으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깊이 이해했다. 그 과정을 거친 이후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단어를 다시 들여다보자, 성별에 관한 전혀 다른 상상이 가능해졌다.

나는 어릴 때 치마와 분홍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어린이이기는 했지만, 대단히 젠더 디스포리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나의 진짜 성별과는 다른 잘못된 신체를 가진 채 태어났다고 생각하며 불편감을 느끼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의 몸은 한국의 여성 프리 사이즈 옷을 입기에 적절하지 않았고, 나의 미감은 흔히 여성스럽다 여겨지는 옷차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ZARA에 옷 구경을 가서 평소처럼 Man’s 코너를 기웃거리며 옷을 입어보다가, 문득, 내가 이곳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사이즈의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는 오히려 너무 커서 옷을 접어 올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옷이 상정하고 있는 신체 이미지와 미적인 기호들이 내 몸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 꽤 마음에 든 것이다. 널찍한 어깨와 소매, 어둡고 푸른 색깔은 나의 일부였다.2 나는 그때 내가 겉에서부터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젠더에 대한 감각이 저절로 우러나와서 나의 겉모습을 그것과 일치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겉모습을 이리저리 바꾸어보며 나의 속(이라고 생각되는)모습을 재구성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갓난아기는 이 세계에 태어나 그 자리에 놓여있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특정 문화 속에서 자라나며 그것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 스스로를 그 일원으로써 구성해 낸다. 어느 곳에 위치하여 어떤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성(별)일지라도 말이다.

심지어 자신이 스스로를 여자/남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타인이 자신을 여자/남자라고 인식하는 것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머리를 짧게 잘라 본 여성이나 머리를 길게 길러본 남성이라면 화장실에서 자신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사람과 마주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머리가 긴 지정 남성인3 내 친구는 집게 핀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기만 하면 처음 보는 모두에게 여성으로 패싱되며, 키가 크고 어두운색 옷을 즐겨 입는 내 다른 친구는 수영장에서 자꾸만 남자 탈의실로 안내된다. 하물며 온라인 세상에서는 그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누군가의 말투나 표현 방식, 특정 정보만으로 성별을 쉽게 상상해 버리기도 한다. 몸을 성별 이분법에 기반해 독해해내는 사회는 내가 나의 성별을 의식하지 않을 때도 타인의 눈에 나를 여자 혹은 남자로 패싱되게 만들며, 이는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나는 이 문장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내가 나의 성별을 의식하지 않을 때도 타인의 눈에 나는 여자 혹은 남자이며, 이는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내가 성별을 의식하지 않을 때도 나는 여자 혹은 남자이며, 이는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의식하지 않을 때 나는 여자 혹은 남자이며, 의도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나는 여자 혹은 남자이며, 전혀 다를 수 있다. 나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러자 다음 문장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타인의 눈에 다른 성별로 패싱되는 순간을 쌓아서 나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겉을 의심해서 속까지도 퀴어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짧게 말하면 “너도 논바이너리 할 수 있어!” 나는 ‘테크노드랙’이라는 단어를 통해 바로 이 변화를 제안하고 싶었다. 특정 기술이 특정 성별을 상정한 채 만들어졌다면, 그것을 사용하는 나는 일시적으로 그 성별에 기대되는 틀에 끼워 맞춰진다. 테크노드랙은 바로 그 지점을 가시화한다. 우리는 특정 성별을 상정한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이미 자신의 지정 성별과는 다른 성별을 무의식중에 수행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이미’ 테크노드랙하고 있다”는 선언은 당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다른 성별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만약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그 상황을 정체성과 연결 지어 고민해 볼 수 있다면, 성별은 변화무쌍한 무언가가 된다. 그 감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다 젠더퀴어로 만들고 싶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ZARA의 성별 구분쯤은 우스워질 것이었다. 자. 당신은 상황에 따라 여자일 수도 남자일 수도 그 둘 중 무엇도 아닌 존재일 수도 있다. 그것을 인식한다면, 당신은 이미 퀴어다.

3. 우려와 대화

여섯 명은 ‘우리는 이미 테크노드랙 하고 있다’는 문장에 동의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선언이 테크노드랙적인 상황(기술에 상정된 성별과 나의 몸이 어긋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에도 동의했다. 테크노드랙적인 상황에 심각한 부정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은 그것이 가진 퀴어한 함의만큼이나 중요하다. 나의 신체를 고려하지 않고 지어진 상황에 몸을 끼워 맞추는 순간은 불편하고 위험하다. 몸에 맞지 않는 장비는 안전사고를 불러일으키고, 특정 신체 조건을 배제하고 세워진 안전 기준은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 ‘안전하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려 기준과 다른 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4 여섯 명은 테크노드랙이라는 단어를 이러한 상황 속에서 꺼내 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차별과 배제가 실재하는 위험으로 이어지는 현장에서 그것을 개인의 생각의 전복으로 다루라는 제안은 적절하지 않았다. 대화는 “나의 몸과 기술적 조건이 불화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M은 기술을 나의 몸에 맞게 수선하는 전략을 강조했고, S는 차별적인 구조에 저항하는 정치적 에너지를 상상했다. 나는 그 둘과 개인의 퀴어한 변화가 어떻게 같이 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서두에 삽입한 ‘테크노드랙 선언’의 각 항목들은 그러한 고민을 담아 만들어졌다. 성별이분법적 기술을 역이용하여 퀴어한 시도를 하면서도 그것으로 인한 손상과 배제를 잊지 않는 것, 기술 이면의 권력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내 앞에 놓인 기술의 물질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수선하여 변화를 도모하는 것. 테크노드랙을 통해 두터운 비판 위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고 싶었다. 짧은 공연과 함께 테크노드랙의 의미, 그것을 떠올리게 된 배경, 우려되는 지점을 그러모은 지난봄의 렉쳐 퍼포먼스는 긴 고민의 결과였지만 아주 작은 시작이기도 하다. 지금 여섯 명은 이것을 어떻게 더 정교하게 빚어낼지 고민하는 중이다. 이 개념과 기존의 학술적 논의가 연결되는 지점을 찾고, 다른 사람들과 보다 깊이 대화하고 나눌 수 있는 워크샵 자리를 기획하고 있다. 이 단어가 어떻게 자라나고 변화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의심과 더 많은 퀴어가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림3. 렉처 퍼포먼스 <테크노 드랙>의 홍보 이미지. 이규원 제공.

<규원의 글>

4. 우리는 이미 모두

처음 살구가 ‘테크노드랙’이라는 용어를 제시해 주었을 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부분은 ‘우리는 이미 모두 테크노드랙이다’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5 보통 퀴어 서사 속에서 ‘우리’는 퀴어 당사자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퀴어라는 광범위한 범주 안에서도 세세하게 갈라지는 여러 정체성 각각의 경험은 서로 너무 달라 ‘우리’로 함께 묶이기 어려운 순간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퀴어 서사는 사회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는 소수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의 일상적 맥락에서 퀴어는 여전히 ‘우리’가 아닌 타인(the other)으로 쉽게 분리되곤 한다. 

나는 2023년에 <Partial>이라는 오브제 시리즈로 한국에서 성소수자로서 외면받은 경험을 다루었다. 사회에서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런 경험을 안고서는 불완전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을 담았다. 가족에게 파트너를 소개하지 못한 이야기, 연애나 결혼에 대해 계속 강요받는 이야기 등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상황들을 선별하였고, 각 오브제는 그 이야기에 맞는 퀴어 플래그의 색깔을 칠했다. 

그림4. <Partial> 이규원, 2023

크리틱에서는 작업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논쟁이 길게 벌어졌다. 전시에는 각 이야기의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거의 담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각 이야기에 얼굴과 퍼스널리티를 넣어야 더 공감이 간다는 비퀴어들의 입장과 아웃팅6은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 예민한 문제이고, 플래그의 색깔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한 정보가 전달된다는 퀴어 관람자들의 입장이 갈렸다. 이 전시가 사회적으로 퀴어들이 아주 엄격하게 억압되는 중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미국 대학이라 퀴어성이 공공연하게 논의된다는 특수한 상황 안에서 평가됐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퀴어에 대해 잘 모르지만, 교내 분위기에 따라 이를 대충 열린 마음으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과, 퀴어에 대한 이야기가 터부시되는 사회 안에서 숨통 트이는 분출구를 찾은 사람들 간의 이해도에 큰 차이가 있었다. 아마 퀴어단체에서 크리틱을 해줬다면 전달 방식에 대해서 길게 논의하기보다는 내용이 너무 전반적이고 심심하다는 평을 받았으리라 확신한다. 아주 전형적인 대표성 만들을 모아 ‘순한 맛’으로 구성된 입문적 내용에 대해서도 개인적이고 감정적으로 전달해야 이런 경험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공감할 수 있다는 의견을 들으며 얼마나 더 구구절절해야 하는가의 의문이 들었다. 

퀴어성을 어떻게 작업에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예술계에서 페미니즘적 시각과 퀴어적 이야기는 지원사업에서 우대되는 주제 중 하나이다.7 그러나 여성혐오와 퀴어혐오가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일부 용인되는 사회에서 대중에게 공개하는 전시의 형태로 페미니즘적, 퀴어적 작업을 낸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제는 종종 ‘너무 공격적’이라는 이유로 예술계 내의 보수적인 곳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나는 최소한 몇 번의 공모에서는 관련된 내용을 빼는 게 나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 작업에 대한 설명을 듣고 “페미니즘, 퀴어, 그런거 나는 잘 몰라서/관심이 없어서”라며 얼렁뚱땅 넘어가는 작가들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펼쳐지는 퀴어 전시를 둘러보는 다양한 연령대와 차림새의 관람객들을 보면서, 퀴어성이 구경거리 혹은 그저 흥미로운 진보적 주제 중 하나가 된다는 느낌도 들었다. 내 작업을 내가 직접 설명하는 순간에도 정체성으로서의 퀴어보다 작업 주제로서의 퀴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 느낌은 항상 어떠한 죄책감을 함께 유발했다. 이것은 내가 범성애와 무성애 사이 그 어딘가에서, ‘정상성’에도 ‘퀴어성’에도 일부 포함되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로 떠다닌다는 감각 때문에 더 강렬하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선택하면 ‘정상인’인 것처럼 살 수 있긴 한데, 그렇다면 내가 ‘퀴어성’을 편리할 때 ‘선택’하고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살구가 제시해 준 ‘테크노드랙’은 퀴어성 밖에 있는 타인들을 전부 그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우리는 이미 모두 테크노드랙이다.’  

너도 몰랐지만, 너도 이미 테크노드랙이야! 이건 네가 구경하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기술 앞에 모두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경험에 대한 거니까 몰랐다면 고민해 보렴! ‘테크노드랙’은 내가 계속 고민하던 퀴어라는 선 안팎의 ‘너’와 ‘나’의 경계를 완전히 흐려버리는, 내가 너무 찾아 헤매던 이야기였다. 이 경험에서 나뉘는 ‘너’와 ‘나’는 없고, 기술에 맞지 않는 몸을 낑낑대며 구겨 넣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우리’들의 경험들이 있을 뿐이었다. 

5. 그래서 테크노드랙이 뭔데?

그러나 스터프스터프 팀원끼리 ‘테크노드랙’이라는 개념에 대해 토론하며, 나는 내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전혀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포킹룸 공모를 소개하며 함께할 팀원을 구했고, 같이 어떤 이야기를 다룰지 상의했지만, 실은 팀원들이 제시해 주는 아이디어와 방향성으로 나는 계속 배우고 설득당하는 관객의 입장이었다. 

‘테크노드랙’은 의자에 맞기 위해 발 받침대를 사용하는 일상적인 경험이나 의료 시스템이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구조적 문제 등 각자가 경험해온 몸과 기술의 불일치에 대해서 공유하며 시작됐다. 물론 팀원 각자가 생각하는 ‘테크노드랙’은 전부 달랐지만, 그렇기에 서로 토론하고 설득해가며 ‘테크노드랙’이라는 개념이 견고해졌다. 물론 많은 의견들을 나누며 ‘테크노드랙’의 선명도를 잃을 때도 있었지만, 다행히 포킹룸이라는 무대와 1시간짜리 렉처 퍼포먼스라는 형식이 주어져 토론한 내용들을 정리하고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테크노드랙의 정의를 찾아가며 스터프스터프는 표준 성별 기술에 맞지 않는 몸의 경험으로서의 테크노드랙과, 인공적인 기술로서의 섹스와 젠더가 미치는 영향에서의 테크노드랙이라는 두 가지 층위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두 상황에서 ‘테크노’의 의미와 ‘드랙’의 필요성, 각 층위에서 ‘테크노드랙’의 역할과 정치적 메시지, 젠더와 기술이 닭과 달걀처럼 서로의 인과관계임을 설명하는 순서 등에 대해서 치열하게 의견이 오가는 와중 나는 모든 의견이 타당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두가 이미 ‘테크노드랙’이라면 ‘테크노드랙’이 왜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테크노드랙’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존재하던 몸과 기술의 부조화를 인식하게 해준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내가 막연하게 느끼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느낌이 기술과 맞지 않는 몸의 수행에 대한 ‘인식 틀로서의 테크노드랙’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몇 시간을 회의해도 의견이 모이지 않은 “궁극적으로 ‘테크노드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것은 젠더 교란의 무기인가?” 같은 질문들은 우리의 견해차를 공유하며 관객에게 생각할 질문거리로 던져주기로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렉처 퍼포먼스의 시작과 끝을 장식해 줄 ‘테크노드랙’ 매니페스토를 쓰며 우리가 토론한 주요 주제들과 각자 ‘테크노드랙’을 활용하고 싶은 방식을 담았다.

‘테크노드랙’으로 렉처 퍼포먼스를 성공적(공연 매진!)으로 했음에도 내가 ‘테크노드랙’을 정말 실감한 건 그 이후에 이어진 워크샵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끼리 치열하게 토론해서 ‘테크노드랙’이란 개념을 선보였지만, 렉처 퍼포먼스라는 일방적인 방식으로 이게 어떻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것인가를 알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는 팀 외의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도록 워크샵을 진행하기로 했다. 렉처 퍼포먼스에서 관객에게 받았던 질문인 ‘일상에서 테크노드랙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는 우리도 의견이 분분했던 부분이기 때문에 워크샵에서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워크샵에서는 각자 혹은 다 같이 정한 한 개의 ‘스터프’에 대해서 일지를 작성하기로 했다. 한 개의 물건이 가진 기술과의 관계에 대해서 적고, 서로 일지를 공유하며 ‘스터프 일지’를 적을 수 있는 가이드 질문들도 추려 나가게 되었다. 



규원의 ‘가위’ 스터프 일지 중 발췌:

공구용 가위가 할 수 있는 일을 기본 가위도 똑같이 할 수 있는데, 대체 공구용 가위는 왜 존재하는가? 공구용 가위를 마주칠 때마다 의아했다. 심지어 많은 공구용 가위들은 나의 손에 딱 맞는 사이즈이다. 나는 ‘보통의 여성’ 신체 사이즈를 가져 주로 이런 공구를 많이 써온 남성들에 비해 손이 작은데도 왜 나에게 딱 맞을 만한 사이즈의 가위가 ‘공구용’으로서 통용되고 있는가가 궁금했다.8 그리고 나는 그 필요성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전문가 같아 보이기’ 위해서 공구용 가위를 사야 하는가?



왜 내가 ‘공구’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골몰해 보다가 설치 현장으로 돌아가 홍일점 막내가 되어 그 이유가 상기가 되었다. 현장에서 대부분의 ‘전문가’는 중년의 남성이고 그 안에서 젊은 여성인 나는 꽤 튀는 조각이라, 그들의 작업 복장, 용어, 방식에 녹아들어 가는 게 중요하고 그래서 ‘공구’는 나에게 남성 현장에 포함되기 위한 하나의 요건처럼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공구를 쓰는 행위와 공구가 필요한 상황’을 남성적이라고 느끼지, 공구 자체를 남성적이라고 느끼는 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여성’으로서 공구를 사용하는 ‘남성적’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테크노드랙적 침투라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내가 준전문가로서 공구가 필요한 작업 행위를 일임하고, ‘남성’ 동료에게 간단한 보조 혹은 사무 업무를 지시하게 된다. 이렇게 전통적 이분법의 작업 분배가 전복되는 상황들이 벌어지며 ‘공구를 쓰는 행위’의 남성성이 흐려지는데, 흥미로운 점은 그래도 내 안에서 공구와 공구에 대한 지식이 전문성의 요건처럼 느껴지고, 그 전문성은 아직도 꽤 강력하게 남성성과 결탁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신체적 노동이 필요한 작업 현장이기 때문에 남성이 더 전문적이라는 인식이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도 있다. 그렇다면 나의 근력, 신장 등의 신체적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는 순간에 어떻게 남성성과 전문성의 연결성을 테크노드랙으로 흩뜨릴 수 있을까?

렉처 퍼포먼스까지만 해도 나에게 ‘테크노드랙’은 작업으로서의 개념처럼 거리감 있게 느껴졌는데, 나의 일상에서 ‘테크노드랙’적 순간이 무엇인지 ‘스터프 일지’를 통해 포착해 나가며 이 개념을 제대로 체화하게 되었다. 내가 ‘테크노드랙’적으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이 순간들을 그러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어떻게 바꾸거나 바꾸지 않을 것인가가 자연스레 다음 질문으로 다가온다. 앞으로의 나의 ‘테크노드랙’ 작업은 이렇게 확장되지 않을까 싶다.

‘테크노드랙’을 만들어가면서 가장 좋은 점은 이것이 나 한 명이 할 수 있는 생각과 표현을 훌쩍 뛰어넘는 일이라는 것이다. 스터프스터프가 “팀플 희망편”이라고 여러 번 말했던 것처럼, 단순한 여섯 명의 합보다 더 멋진 결과를 안겨주는 협동을 하게 된 건 정말 벅찬 일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뚝딱뚝딱 완성되어 나가는 안도감과 든든함만 좋은 게 아니라, 여섯이나 되는 시각과 의견을 서로 설득하고 맞춰나가는 과정 자체가 너무 즐겁다. 앞으로 우리가 ‘테크노드랙’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지 나 자신도 기대가 된다.


읽을거리

  • 이나래 외, 『일하다 아픈 여자들』, 빨간소금 (2023)

젠더 불평등은 어떻게 재해로 이어지는가? 저자들은 여성, 장애여성, 성소수자 노동자와 산재 피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통계자료를 분석하여 소수자가 경험하는 산업재해를 설명한다.  테크노드랙의 의미와 한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 폴 B. 프레시아도, 『대항성 선언 (Countersexual Manifesto)』, 포이에시스 (2022)

성별 체계를 완전히 전복하는 책. 한 문장만 옮기자면, “딜도는 음경에 선행한다. 딜도는 음경의 기원이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 문학동네 (2024)

테크노드랙에서 수행으로서의 드랙의 개념에 대해 토의하며 활용되었다.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성별과 젠더 간의 연결을 해체하고, 젠더 교란의 가능성에 대하여 논의한다.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젠더에 대해 이해하기 위한 기본서.


미주

  1. 포킹룸의 2025년 전시 Left Tech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놀라셨죠? 놀라움의 연속! 더 이상 왼쪽과 오른쪽은 없습니다. 중도라는 것도 없습니다. 가장 우파적이라고 믿었던 가치는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좌파와 동일해집니다. 좌파 또한 폐쇄적으로 자신을 가두고 더 이상의 진보를 거부합니다. 기술을 소유한 대기업은 어느샌가 이 모든 추출주의는 결국 우리의 기초 소득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신자유주의인지 신사회주의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시민 사회에게 평등이 아직도 가장 중요한 추구 가치일지도 의문입니다. (…중략…) 이번 포킹룸은 <레프트 테크>라는 제목에 걸맞게 오른쪽에 빼앗긴 기술을 다시 찾아오는 방법, 그리고 왼쪽이 기형적으로 변형시킨 기술을 다시 돌연변이화 시키는 방법을 소개하고 고민합니다. 프랑스 왕을 죽이네 마네로 시작된 왼쪽과 오른쪽의 방향은 더이상 우리에게 무의미하지만, 그렇게 라벨 붙여진 개념을 우리가 계속 사용해야만 한다면, 왼쪽은 오른쪽으로 보이고, 오른쪽은 왼쪽으로 보이는 거울 효과를 이용해, 꼬리가 머리를 물고, 머리가 꼬리를 물게 하여, 그 원형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후략)
    출처: 포킹룸 홈페이지 https://www.forkingroom.kr/forkingroom2025/statement ↩︎
  2. 물론 ZARA의 성별 구분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빨강과 파랑으로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유치한 관행에 5살 때부터 저항해 왔다. 한때는 그 5살의 내가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에 그랬는지, 젠더퀴어였기 때문에 그랬던 거였는지 깊이 고민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현재의 나에게 그 둘은 분리되지 않으며, 그 당시의 나는 그 둘 모두인 동시에 그 둘 중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3. ‘지정’남성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검색하는 노력 정도는 기울여 보시길. ↩︎
  4. 불평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산업재해와 관련해서는 「일하다 아픈 여자들」 (빨간소금, 이나래 외) 참고. ↩︎
  5. 타자화의 개념에 대해서는 Simone de Beauvoir, H.M.Parshley 번역 (1989), 『The Second Sex』, Vintage 참고. ↩︎
  6. 작금의 한국에서 ‘커밍아웃’은 비밀을 밝히는 행위 정도로 퀴어적 맥락이 배제된 채 흔히 오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
  7. 2023년, 한 비평 웹진에 공개된 대담에서 “예술계 필드만 전체로 놓고 본다면 퀴어가 많은 토큰을 쥐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전 다음 생엔 퀴어로 태어나고 싶기도 해요. 이런 말, 해도 되는 거지?”라는 발언이 올라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해당 발언은 퀴어가 겪는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퀴어를 낭만화 한다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
  8. 공구용 가위는 벌어져 있는 것이 기본 상태이므로 닫기 위해서는 반대편 손잡이에 와이어를 걸어야한다. 여러 재료 등을 들고 있거나 가위만을 잡고 있지 않을 경우에도, 아니면 그냥 여닫는 수고를 줄여 한정적인 나의 힘을 필요한데에 쓰는데에도 공구용 가위가 훨씬 편리함을 깨닫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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