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us Ex Cultura

윤기준, 조승희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infinityk@kaist.ac.kr, seungkey@kaist.ac.kr


과학기술정책의 즐겨찾기 메뉴, “과학문화”

우리는 “문화” 라는 말을 즐겨 찾는다. 정부출연연구기관 인사들이나 교수 등 과학계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시민들도 “문화”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과학 관련 토론회, 회의, 전문가 발표, 시민 공청회, 캠페인 등 어떤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리에 가면 “문화가 문제”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 문제들은 다 문화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회의장이나 토론장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토론을 벌이고 있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모두가 동의하고 동의할 수 밖에 없어 보이는 말. “이것은 모두 문화 때문이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본 글은 지난 호 [과학뒤켠]의 [문화]섹션에서부터 시작된 고민을 이어받아, 과학문화에 대해 또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에게 ‘문화’라는 단어가 익숙한 만큼, 문화는 오랜 시간 동안 연구되었던 대상이다. 여러 학문 분과가 문화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에 대해 해온 고민들을 바탕으로 “과학문화”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너무 손쉽게 사용되고 있음을 집중적으로 꼬집고자 한다. “과학문화”라는 말이 사용될 때 상상되는 경계들과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의 정치성에 주목하고, 그것을 통해 과학기술정책에서 이해하고 있는 과학문화의 의미에 대해 시사점을 던지고자 한다.

문화인류학자들이 비판하는 “문화”, 그리고 “과학문화”

우리나라 과학문화정책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창의재단이 작성한 “제 3차 과학기술문화창달 5개년(2013-2017) 계획 수립 정책 연구”는 과학문화를 “과학기술과 관련된 삶의 양식과 객관성, 합리성, 과학적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 및 과학친화적인 사회문화적 환경 등의 총칭”으로 정의한다.[1]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과 관련된 삶의 양식과 객관성, 합리성, 과학적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를 지녀 과학친화적인 사회문화적 환경이 수립된다면, 자연스레 국가 과학기술 혁신역량이 강화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얼핏 보면 설득력 있어 보이는 논리이다. 대다수의 시민이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과학기술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지니면, 과학기술이 발전할 것은 자명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과학문화에 대한 우리의 진단과 기대는 생각만큼 잘 작동할까?

문화 개념에 대해 고민한 문화인류학자들의 생각을 하나씩 짚어 나가다 보면 과학문화에 대한 우리의 가정과 기대가 생각만큼 간단하게 작동할 것 같지는 않다. “문화”라는 말을 쓰는 위험성에 대해 문화인류학에서는 여러 가지 비판들이 나왔었지만, 그 중에서도 이 글은 두 가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겠다.

첫번째로, 문화엔 지역적인 경계가 있다고 믿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특정 지역의 문화란 무엇일까?’는 문화인류학에서 답하고자 했던 오랜 질문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문화는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세계관과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2] ‘한국 문화’라고 했을 때 빨리빨리 정신이나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하나의 예이다. 한국 문화는 일본 문화와 다르고, 미국 문화는 아프리카 문화와 다르다는 식의 주장은 초등학교 사회시간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신문, 그리고 사람들과의 대화 등 일상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보면 문화에 경계선을 긋고 비교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한국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자. 한국 문화에 담긴 가정은 한국에 가면 ‘한국 문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 문화가 한국이라는 지역에 그릇에 담긴 물처럼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지역에 특정 문화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직업군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과학자에 대한 초기 인류학 연구는 이러한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80년대 미국과 일본의 물리학자들을 비교 연구한 샤론 트라윅은 이를 잘 보여준다. 마치 미지의 섬에 도착하여 원주민의 전통, 풍습, 의식이 무엇인지 탐구하던 전통적인 인류학자들처럼, 트라윅 또한 연구소에서 참여관찰을 진행하여 물리학자들의 커리어 주기, 농담, 말버릇 등을 통해 물리학자들의 행동 양식과 세계관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를테면 트라윅은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물리학자들의 문화를 “무문화의 문화”로 정의한다.[3] 과학적 발견을 문화와 같은 사회적 요인이 영향을 미친 구성물로 생각하기보다는, 절대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도출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본다면 문화가 특정 지역이나 직업군에 담겨있다는 가정에는 여러 구멍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한인 타운에 있는 사람들은 미국문화를 따르는가, 한국문화를 따르는가? 또,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영향을 역사적으로 받아온 한국의 경우, 다른 곳의 문화가 한국에 없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즉, 하나의 문화는 다른 문화와 영향을 주고 받지 않고 완전한 고립상태에서 형성되기 어려우며, 하나의 고립된 지역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며, 꼭 하나의 지역이라고 해서 균일한 문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직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리학자들에 대한 트라윅의 예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물리학자들의 문화를 알기 위해 연구소나 실험실만 관찰하는 것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만 활동하는 존재가 아니며, 실험실 외부의 사회적 요인에도 언제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모든 과학자들이 “무문화의 문화”를 동일하게 따르고 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마다 각기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에 처해있는 과학자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무문화의 문화”를 학습하고 해석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한 지역이나 사회의 대표적인 문화를 꼽는 정치적인 작업에 대한 비판이다. 과거 인류학자들은 문화는 만들어지기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 혹은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대상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살피기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문화의 전통적인 정의를 따라 각 문화권의 세계관과 행동 양식이 나타나는 음식, 집, 종교, 의식, 전통 등을 조사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문화를 물건 찾듯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하는 습성은 한국문화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다고 가정하자. 이 말을 들으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 속에는 다 익지 않은 고기를 불판 위에 누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한국의 빠른 인터넷 속도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 익숙한 상황을 조금 낯설게 바라본다면 어떨까? 모든 한국인이 빨리빨리 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또,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표현할 수 있는 말들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고 말한 사람은, 그 수많은 특색 중에서도 빨리빨리 습성을 한국인의 주요한 특성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여러 문화적 특징 중 단 한 가지, 빨리빨리를 골라낸 것엔 어떠한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빨리빨리 문화가 설득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는 반문해볼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비판은 20세기 말에 들어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여러 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는 각각 다른 그릇들에 따로따로 담겨있듯이 서로 유리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며, 문화의 구성에는 다른 지역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문화는 생각보다 한 지역 내에서 균일하지 않고, 한 문화권이라고 여겨지는 지역에도 다양한 생각이 공존한다고 지적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이제 문화를 고정되고 발견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문화의 구성 과정과 역동성, 정치성에 분석의 초점을 맞춘다. 특정 문화가 ‘A문화’라고 불리는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역사적, 사회적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 문화를 A문화라고 부르는 것에는 어떠한 정치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인류학자들은 단순히 “이 문화는 A문화이다”라는 진단을 내리기보다는, 누가 이 문화를 A문화라고 부르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그 정의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문화에 대한 경계성과 정치성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일반적인 예시로 “대덕 문화”, “카이스트 문화”와 같이, 지리나 기관이 문화의 경계를 만든다고 가정하는 경우들이 있다. 또한, 과학기술문화 진흥에 관한 보고서를 살펴보면 과학문화의 지리적 경계를 우리나라 안으로 한정짓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과학문화 창달을 위한 노력은 일반 대중에 대한 지식의 전달과 의식 전환 캠페인 등에 집중되어 있지,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과학과 관련된 여러 사건을 우리나라의 과학문화와 연결하려는 시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또, 각국의 과학문화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넓은 관점으로 분석하기보다는, 해외의 과학문화를 따로따로 수집하고 분석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창달”할 수 있는 과학문화가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세계 다른 나라의 과학문화와 다르며 연결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한편, 과학문화는 창조경제 혁신역량 강화를 위한 정치적 구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과학기술문화창달계획 5개년 정책 보고서를 살펴보면, “과학기술 문화활동의 범위” 중 “합리적 사고방식과 과학적 마인드 형성을 위한 계몽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그림 1).

Pic1

<그림1> 과학기술문화창달계획에서 설명하는 “과학기술 문화활동의 범위”[4]


합리적 사고방식과 과학적 마인드. 언뜻 보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밖에 없는 표어들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문화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이러한 표어 아래 어떠한 실천들이 자리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어떨까? 미래부, 한국과학창의재단 등 과학기술문화 진흥에 힘쓰는 여러 기관은 과학문화 창달을 통해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궁극적으로 국가 과학기술 혁신역량 강화를 꾀하고 있다. 각종 표어, 포스터 공모전, 퀴즈대회, SNS인증 이벤트 등 여러 종류의 캠페인을 진행하면 과학기술친화적인 삶의 방식을 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비로소 정부의 최종 목적인 ”창조경제 혁신역량 강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부는 문화를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향유하는 것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도를 벗어난 과학문화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문화가 정치성과 경계성을 가지는 것이 뭐가 그렇게 문제란 말인가?” 문화의 정치성과 경계성을 고려하지 않은 과학문화 함양 정책은 문화에 대한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출발하기에 위험하다. 과학은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초월하는 반면, 과학문화는 우리나라의 맥락에서 한정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과학문화가 세계의 다른 부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고려하지 않는다면, 과학문화 증진 정책은 과학문화 형성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단순 주입식 캠페인과 단발성 행사로만 남을 위험이 있다.

시민들이 원하는 과학문화가 배제될 수도 있다. 과학문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국 정부가 답을 제시하면, 과학문화에 대한 정부의 이해만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주입된다. 이는 과학문화가 무엇인지 시민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한다.

실제로 시민들은 과학문화에 대해 스스로 해석하길 좋아하며, 각자 즐기고 싶은 과학문화가 다양하다. 필자는 2016년 7월 14일, 대전 죽동문화센터의 별똥별도서관에서 열린 “과학문화 확산을 위한 공감토론회”에 참석했다. 이 날 토론회에서는 각 패널들이 각자 과학문화가 무엇인지,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할 것인지, 그리고 새롭게 개관한 별똥별도서관이 그것에 어떤 역할을 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발표와 발언이 이루어졌다. 주제발표와 패널 토론이 끝난 뒤, 그 토론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시민들은 “과학문화란 무엇인가”와 같은 큰 질문들보다는, 훨씬 구체적인 것들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하였다.

  • 신성동 주민: 시민들이 (무엇이 하고 싶다고 관청에) 요청을 드려도, 재정상 문제가 있다며 복잡하다며 아쉬운 소리만 한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과학 관련 기관들을 개방하면, 과학도 그만큼 시민들에게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정부가 원래 의도하고 있었던 대로).
  • 별밭 음악회 추진위원: 우리가 관심있는 걸 지원해달라. 그냥 별을 보고 살게 해달라. 너무 작은 도서관에서 너무 큰 주제들로 토론을 하는 것 같다.

과학문화 토론회에 온 시민들은 과학적 사고 방식이나 생활양식에 대해 토론하기 보다는 너도나도 각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은 SF 소설을 좋아했고, 어떤 사람은 아이와 함께 엎드려서 책을 보길 원했다. 어떤 사람은 그냥 별을 보는 것이 좋다고 했고, 그걸 계속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정부가 원하는 특정 과학문화가 강조되고 있는 반면, 자신들이 원하는 문화 활동에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정부에 아쉬움을 느끼는 듯했다.

우리는 시민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과학문화를 통해 정부가 추진하는 과학문화 창달의 정치성을 엿볼 수 있다. 과학문화 창달 계획은 과학문화 함양을 목표로 함과 동시에, ‘어떤 과학문화인지’ 또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토론회를 찾은 시민들은 다양한 요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민들의 관심사 중 많은 부분은 현실적으로 예산 지원도 필요하고, 장소를 개방하는 등 과학 기관들의 협조가 필요한 경우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모두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마인드를 가지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지는 않으며, 그러한 사고방식과 마음자세가 선행되어야만 관심 가질 수 있는 주제들도 아니다. 과학적 사고방식과 과학적 생활양식만이 과학자의 꿈을 꾸게 하거나 과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시민들의 이러한 관심을 정부가 “과학문화의 범위” 밖이라고 결론짓는다면, 과학문화 창달 계획은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 채 정부의 지도에만 머물게 될 것이다.


읽을거리

Pic2Gupta, Akhil, and James Ferguson (eds.). Anthropological Locations: Boundaries and Grounds of a Field Science. Univ. of California Press, 1997.

인류학에서 전통적으로 강조하던 “현장(field)”의 개념에 새로운 시각과 가능성을 제시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엮은이인 인류학자 아킬 굽타와 제임스 퍼거슨은, 현장의 개념은 인류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그 의미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전통적인 문화인류학에서 말하는 “현장”은 대부분 지리적 경계를 가정했다. 옛날 인류학자들도 ‘내가 정한 현장’과 ‘내가 연구하는 곳’을 구분하곤 했다(예컨대, 아프리카에서 연구하고 유럽에 돌아와서 논문을 쓰는 방식으로 생각해왔던 것). 세계화가 진행된 20세기 말, 그리고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현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때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Gupta, Akhil, and JamPic3es Ferguson (eds.). Culture, Power, Place: Explorations in Critical Anthropology. Duke University Press, 1997.

지리적 경계가 문화의 경계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힘의 논리와 가깝게 닿아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또한 굽타와 퍼거슨이 쓰고 엮은 책이다. 한 지역에는 대표적인 문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이며, 한 지역의 문화는 지리적 경계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가정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Geertz, Clifford. The Pic4Interpretation of Cultures: Selected Essays. Vol. 5019. Basic books, 1973.

“두꺼운 기술(thick description)”이라는 유명한 가르침을 남긴 책이다. 문화는 여러 천 조각들을 꿰 메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기어츠는 말한다. 예를 들어, 한 부족의 결혼 문화, 음식 문화, 의복 문화 등을 모두 모아 책으로 엮는다고 해서 그 부족의 문화를 설명한 것이 아닌 것이다. 기어츠는, 문화란 “분석의 대상”이며, “의미의 구조들을 분류하여 그것들의 사회적 근거와 중요성을 규정하는”일이 인류학자의 의무라고 이야기한다(이 유명한 구절은 책의 9쪽에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 설명하는 것이 바로 “두꺼운 기술”이라고 말한다.


[1] 한국과학창의재단(2012), 제 3차 과학기술문화창달 5개년(2013-2017) 계획 수립 정책 연구, 2.

[2] 과학문화의 정의와 매우 유사함을 주목하라.

[3] Sharon Traweek, Beamtimes and Lifetime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8).

[4] 한국과학창의재단(2012), 제 3차 과학기술문화창달 5개년(2013-2017) 계획 수립 정책 연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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