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된 상상력: SCP 재단과 대중의 상상력에 대하여

성두현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석사과정)

dhsung91@kaist.ac.kr


 

공상과학(SF)의 한 특징은 상상력에 과학적 가능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비록 어느 공상과학 작품이 모두에게 “현실적”이거나 “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공상과학 작품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존하지 않는 존재내지 현상을 과학상식 수준에서 납득하거나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로 나타낸다. 이러한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특이한 사례를 하나 떠올릴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SCP 재단(SCP Founda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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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SCP 재단의 상징[1]

SCP 재단은 2008년부터 이어져온 웹 기반 공동 창작 프로젝트이며 위키 사이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장르는 흔히 공상과학, 도시전설(urban fantasy) 혹은 공포물로 분류되며 2017년 기준으로 3000편이 넘는 글들로 구성된 거대 프로젝트이다. SCP 재단 위키 사이트의 회원으로 등록된 창작자들은 자신들의 상상력, SCP 재단의 세계관 설정과 엄격한 작성 원칙에 바탕을 둔 글을(보통 “보고서”라고 불린다) 올리며, 등재된 보고서들은회원들의 피드백과 평점을 받는 방식으로 관리된다. 현재 SCP 재단은 상당한 대중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으며 ‘SCP 격리실패(SCP – Containment Breach)’와 같이 상당한 작품성을 지닌 스핀오프 인디 게임도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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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만일 세계가 재단의 존재를 안다면…[2]

SCP 재단 위키 사이트의 설정에 의하면 SCP 재단은 각종 괴물들이나 초자연적인 특징을 가진 생물, 물체 혹은 현상을 확보 및 격리하는 가상의 비밀 기관이며 “SCP”라는 명칭은 “확보, 격리와 보호(Secure, Contain, and Protect)” 혹은 “특수격리절차(Special Containment Procedures)”의 약자이다. SCP 재단은 인류를 위협할 수 있거나 인류의 이해를 뛰어넘는 모든 존재 및 현상들을 격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전세계의 거의 모든 정부들의 지지 및 지원을 받으며, SCP 재단이 누리는 지위와 권한은 모든 국가들의 통제권을 초월한다. 그러한 지위를 가진 기관답게 SCP 재단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금력, 인력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부 격리 대상들의 방어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ICBM을 동원하는 등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격리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더불어 SCP 재단은 “인류의 보호”라는 명분 아래에 온갖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그것의 좋은 예가 인간 실험 대상의 활용이다 (인간 실험 대상들은 “D계급”으로 분류되며 보통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모집한다. D계급 인원들은 규정상 한 달 동안 재단 소속으로 각종 위험한 일들을 맡으며 계약이 만료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처분”된다). 하지만 그러한 비인도적인 수단들은 SCP 세계관 내에서 필요악으로서 정당화되며 극단적인 조치들이 무분별하게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재단 윤리위원회가 존재한다(심지어 재단 위키에 새로운 위원의 임명 과정을 묘사한 문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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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어느 SCP 재단 격리 시설의 내부 모습[3]

재단 보고서에서 언급되는 대다수의 격리대상(SCP)들은 매우 기이하거나 극도로 위험한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카메라 오작동”이라고 불리는 SCP-895는 주변에 위치한 촬영 혹은 감시 장비에 나타나는 환영을 통해 인간에게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일으키며 격리대상들 중 가장 위험하고 공격적인 존재로 자주 거론되는 SCP-682는 경이로운 수준의 신체능력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습능력을 통해(어느 제거 시도가 실패하면 그 수단에 완벽히 “적응”하기 때문에 한번 실패한 수단은 영구히 무용지물이 된다) 지속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일으키고 있다. 그 외에 SCP-055와 같이 유의미한 조사나 이해가 사실상 불가능한 대상도 존재하며(애초에 해당 SCP의 별명은 “Unknown”이다) 놀랍게도 한국 민간설화의 구미호 또한 SCP 재단에 의해 격리되어 있다(“Polymorphic Humanoid”로 불리며, 일련번호는 SCP-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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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Data expunged (데이터 말소)][4]

물론, 유해하지 않으면서도 흥미로운 격리대상들도 있다. “끝이 없는 피자 박스(SCP-458)”라고 불리는 SCP는 외관상 평범한 피자 상자인데 지능을 갖춘 존재가 물리적으로 접촉했을 때 접촉한 대상의 취향에 맞는 피자를 제약 없이 생성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특성 때문에 SCP 재단은 이 “격리대상”을 직원 구내식당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지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인간형 SCP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심리 실험에 활용한 사례도 있다(한번 어느 흉포한 SCP와 접촉시켰더니 육류 토핑만 붙어있는 피자가 나왔다고 한다). 더불어 대상의 동기내지 욕망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진 “욕망 카메라”(SCP-978) 또한 재단이 타 SCP들을 연구할 때 자주 활용되며, SCP-978의 문서에 첨부된 다양한 실험 보고서들은 독자들의 상상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지금까지 SCP 재단의 방대한 세계를 어느 정도 소개했으며 여기서부터 창작물로서의 SCP재단이 가지는 두 가지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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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계단통”으로 불리는 SCP-087의 탐사 스냅샷[5]

SCP 재단 프로젝트의 첫 번째 특징은 등재된 문서들이 실험과 같이 과학적 활동의 결과물로 볼 수 있는 관찰 혹은 탐구의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창작 커뮤니티가 마련한 가이드라인에 의해 관리된다는 점이다. SCP 재단 보고서들은 일련번호, 격리등급, 격리 절차의 묘사, 특성에 대한 설명과 격리 절차의 실행과 개선 등을 위한 건의사항, 그리고 각종 참고 자료들이 첨부된 형식으로 작성된다. 그렇게 작성된 문서들은 SCP재단 창작 커뮤니티의 평가 과정을 거치며, 평점이 극히 낮거나 가이드라인에 어긋나는 보고서들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창작 방식은 매우 다양한 상상 속의 존재나 소재를 “과학적 연구와 격리 프로토콜”라는 틀 속에 담음으로써 그것을 SCP 세계관 내부로 끌어오는 동시에 창작물의 수준을 유지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이는 논문이 일련의 평가 과정(peer review)을 통해 어느 과학 저널에 등재되는 과정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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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케테르 등급으로 분류된 SCP-017(“그림자 인간”)[6]

SCP 재단 프로젝트의 다른 특징은 등재된 보고서들이 묘사하는 존재 혹은 현상들이 재단이 마련한 객체 등급을 통해 분류되고 해석된다는 것이다. SCP 재단은 현재 총 6가지의 등급을 쓰며, 등급을 매기는 방식은 실제 격리대상의 위험도 자체보다 격리의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안전(safe) 등급은 확실한 격리가 가능하거나 대응 프로토콜이 이미 준비된 대상에게 주어지나 안전 등급으로 분류된 대상들 중에서도 SCP-517과 같이(“할미는 안단다”라는 별명을 가진 어느 점술 기계) 극도로 위험한 격리 대상들이 있다. 반면에 SCP 재단 분류 등급들 중 일종의 최상위 등급으로 흔히 거론되는 케테르(Keter.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왕관을 뜻한다) 등급은 포획 및 격리가 불가능하거나 격리에 있어서 극도로 광범위하고 복잡한 절차가 요구되는 대상에게 주어진다. 케테르로 분류된 대상들 중의 대다수가 단독적으로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위험하지만 SCP-990처럼(“꿈 속의 사나이”로 불리며 꿈 속에서 미래에 일어날 재앙에 대해 경고한다) 명확한 위험성을 지니지 않음에도 확실한 격리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케테르 등급으로 분류되는 대상들도 있다. 이러한 등급 체계는 도시전설이나 괴담에 등장하는 다양하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나 소재들을 ‘위험한 대상의 격리 및 분류 절차’라는 테마를 가지는 세계관에 담는 SCP 재단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세계관에 어울릴 법한 이질적인 존재들을 일관적인 서사 안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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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불리는 SCP-2000[7]

SCP 재단은 상상력이 “과학적 프로세스와 격리”라는 테마와 공동 창작 절차를 통해 발현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SCP 재단의 개성은 과학 이론에 기반을 둔 세계관을 확장하는 SF의 모습이 아닌, 문화 속에 분포된 상상들을 “확보”하고, “격리”하고,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SCP 재단은 주제나 소재의 과학적 가능성으로 정의되는 SF가 아닌, 이질적일 수 있는 소재들을 ‘활동으로서의 과학’의 색채를 부여하는 틀에 담는 집단 창작물이다. 어찌 보면 유사 공상과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SCP 재단은 ‘설명하는 과학’이 아닌, ‘수집하는 과학’을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읽을거리

Screen Shot 2017-10-05 at 7.11.41 PMSCP 재단의 격리 대상 보고서들

SCP 재단 위키 사이트에 등재된 보고서들. 격리 대상으로 지정된 다양한 존재 및 현상과 SCP 재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보고서 대부분이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열람 시 주의할 필요가 있다. SCP 세계관에 한국 지부가 존재한다는 설정이 있기 때문에 한국어 위키도 있다.

 

Screen Shot 2017-10-05 at 7.11.47 PMSCP Containment Breach(SCP 격리 실패), Joonas Rikkonen(개발자), 2012

어느 실험 대상으로 지정된 D 계급의 주인공이 시설 관리 시스템 실패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격리 실패에서 살아남으면서 SCP 재단의 시설을 탐험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공포 게임. SCP 재단 시뮬레이터라고 봐도 좋다. 무료로 배포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Screen Shot 2017-10-05 at 7.11.53 PM

The Cabin in the Woods, Drew Goddard(감독), 2012

세계멸망을 막기 위해 활동하는 어느 극비 기관이 등장하는 공포 영화. 등장하는 기관의 모습이 SCP 재단과 흡사하고, 영화가 공포 영화라는 장르 전반에 대한 풍자이기 때문에 추천한다. 유명한 영화 비평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92% 신선”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1] SCP Foundation, http://knowyourmeme.com/memes/sites/scp-foundation

[2] A TIME magazine cover if the foundation was revealed, http://imgur.com/dblkDHP

[3] Made an image of how I imagine the bowels of an SCP facility would look like, https://www.reddit.com/r/SCP/comments/3jcls3/made_an_image_of_how_i_imagine_the_bowels_of_an/

[4] SCP – Blue Hall, https://600v.deviantart.com/art/SCP-Blue-Hall-326009556

[5] SCP-087, http://www.scp-wiki.net/scp-087

[6] SCP-017, http://www.scp-wiki.net/scp-017

[7] SCP – 2000, http://www.scp-wiki.net/scp-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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