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불안한 초상

슥삭슥삭


 

작가 소개

위대한 공학자가 되고자 수련에 정진하였으나 현재는 주화입마하여 공력을 잃은 채 교정을 배회한다. 커다랗고 근사한 주제는 잘 삼키질 못하며, 아담하고 심심한 주제들로 글을 쓰길 좋아한다. 만성 소화불량을 앓고 있다. 다이아나 코퍼와이트의 그림을 좋아해 현대미술을 공부했다. 필명처럼 글을 쓰는 것이 오랜 꿈이다.


 

1

첫 번째 발작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룸메이트의 전화를 받고 상기된 채 응급실에 찾아온 애인을, 마비가 덜 풀려 축 늘어진 사지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뒤이어 의사가 커튼을 젖히며 들어왔다. 공황장애라는 단어를 마주하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TV에 나와 괴로움을 호소했던 연예인들이 떠올랐다. 의사는 당장 여기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손에 들린 여러 장의 환자기록이 나에게 할당된 그의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몸을 추스르고 응급실을 나섰다. 치료비를 지불하고 나온 애인이 내 손에 영수증을 쥐여주었다. 십 몇만 원의 가격이 찍혀 있었다.

 

[이미지 1]

<그림 1> 무력하게 응급실에 실려 가는 순간은 썩 유쾌하지 않다.

 

더 이상 학교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질병 휴학은 일정 규모 이상의 의원에 근무하는 의사의 진단서가 필요한 과정이어서 모든 활동을 중단한 채 본가에 머물렀다. 몇 주간 간헐적인 발작이 지속되었다. 불안감이 불현듯 마음속의 불씨를 지피면, 삽시간에 온몸으로 불길이 번져 호흡곤란과 사지가 마비되는 과호흡 증상이 뒤따라온다. 증세가 심한 날엔 응급실에 실려 갔다. 그렇게 신체를 태운 불길이 힘을 다해 꺼지면 그제서야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주변의 염려와는 달리 공황장애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매스컴에 등장한 유명인들이 늘 강조하던 구호를 되뇌며 마음을 굳게 먹으면 될 일이었다. 정신과에 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훈련이 잘 된 덕분이었을까, 서두르듯 완치를 위한 계획을 머릿속에 세워 실행에 옮겼다. 허나 곧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혔다. 공황장애를 세상에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어느 부모가 정신병이라는 자녀의 말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까. 불안감의 불길이 나를 태울 동안 부모의 심장 역시 타들어 갔다.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녀와 애써 고개를 가로젓는 부모 간의 애처로운 실랑이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두 번째로 응급실에 실려 간 그 날 오후, 마침내 부모 역시 마음을 먹은 듯했다. 다음날 어머니와 한 종합병원의 정신과를 찾았다. 얼마간의 시간을 기다린 후 진료실에 들어섰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분주해 보이던 의사가 입을 열었다.

“공황장애는 아닌 것 같은데.”

말문이 막힌 나를 대신해 언성을 높인 건 옆에 앉은 어머니였다. 날카로운 하소연이 끝나자 의사는 이비인후과에 예약을 잡아주는 것으로 진료를 마무리하였다. 어지러움은 이비인후과적 증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허망한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오자 곧이어 의사가 뒤따라 나왔다. 서둘러 병원 밖을 나서는 의사의 뒷모습을 끝으로 그를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른 오후의 점심시간이었다.

의사의 조언대로 이비인후과를 찾아가 전정기관 검사를 받았다. 이비인후과적 증상이 아니라는 소견이 나왔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조심스레 정신과적 문제일 가능성을 거론했다. 정신과에서 넘어왔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도 말문을 연 사람은 옆에 앉은 어머니였다. 손가락을 탁자에 가볍게 두드리던 의사는 심장의학과 예약을 잡아주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은 심혈관적 문제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번에는 신경안정제가 한 알 처방되었다.

이비인후과에서 심장의학과를 거쳐 소화기내과로 넘어간 것을 끝으로 종합병원과 결별하였다. 진료과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다른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았다. 세 번째로 응급실을 다녀간 날 집 근처의 개인병원으로 향했다.

규정되지 않은 고통에 지쳐있던 내게 종합병원에서 기대할 수 없었던 환대는 고맙게 느껴졌다. 의사는 진찰 결과 자율신경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며 몇 가지 검사를 실시했다. 부교감신경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견에 따라 신경마사지를 비롯한 다양한 치료 과정이 진료 목록에 추가되었다. 새로운 종류의 신경안정제가 배합된 처방전을 끝으로 기나긴 진료가 마무리되었다. 환한 미소를 지닌 세 명의 간호사가 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몇십 만원의 진료비가 찍힌 영수증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병원을 나섰다.

증세가 점점 호전되는가 싶더니 다시 찾아온 과호흡 증상이 잠을 깨웠다. 늦은 새벽 자녀의 호출에 온 가족이 모여 거실에 둘러앉았다. 분노와 허탈감으로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굴렀고 바닥에 앉은 아버지는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공황장애가 맞을까. 혹시 처음 진료한 의사가 오진한 것은 아닐까. 행정상의 어디에도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는 기록은 없었다. 공황장애 검색결과가 쌓여가는 인터넷 방문기록만이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보통이 아닌’ 시민으로서 사회 속에 포섭되기를 희망하는 건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식탁에는 심장이나 신경에 좋다는 각종 식재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미지 2]

<그림 2> 도움의 손길은 도처에 널렸다. 내어준 손을 붙잡으러 가는 길이 멀고 험할 뿐이다.

 

2

의사 선생님의 동그란 눈이 더욱 커졌다. 수십 번은 다녀간 진료실에서 나의 동료와 친구, 애인과 가족, 그리고 나를 보여주기 위해 우린 날마다 수많은 벽을 함께 무너뜨렸다. 그리고 오늘 의사라는 존재에 대한 나의 고백으로 우리 사이의 마지막 경계가 허물어졌다. 혹시 모를 그의 궁색한 변명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도에서 느낀 문제점들을 열거했다. 공황장애를 확진 받기 전의 모든 의무 기록은 보험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과, 학적 처리와 기숙사 문제로 전전긍긍했던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그는 정신의학과 관련된 제도가 여러모로 미흡함을 시인하였다. 그럼에도 이른 기간에 잘 이겨냈음을 잊지 않고 격려해주었다. 새로운 처방전이 나왔다. 인데놀은 처방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파록스 몇 알이 든 간소한 봉투를 들고 병원을 나선다.

진료를 받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푹신한 인형들이 놓여있는 기다란 카우치 의자가 보인다. 맞은편에는 의사 선생님이 앉아 있다. 흰색 의사 가운이 책상 의자에 걸쳐있지만, 선생님이 입고 있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정적을 깨기 전까진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뿌연 수증기만이 시선을 붙잡는다. 이날은 기초검사가 끝난 뒤 첫 진료였다. 휴대폰의 녹음기능을 켜고 들어섰다. 만일 그가 ‘환자는 시한부입니다.’라는 선고를 하더라도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략)

의사: 음… 저희가 검사를 해봤는데…

나: 네

의사: 00 씨는 글쎄요…이건…뭔가 뚜렷한 이유가 없네요…

나: (침묵)

의사: 가족 관계도 이만하면…아버님이랑의 관계가 좀 어려웠나 보죠?

나: 아, 그렇게 막 심한 건 아니고…그냥 좀 성격이 좀 안 맞았던 거 같아요. 지금은 잘 지내고….

의사: 네…여기에도 그렇게 적혀있네요. 그런데 저희가 성격검사를 해봤는데, 굉장히 다운되어있거든요. 무언가 억눌린 것도 많은 것 같고. 그런데 또 최근에 힘들었던 건 없다고 하니까.

나: (침묵)

의사: 그래서 저희 생각은, 좀 크로니클(Chronicle) 한 문제인 것 같거든요. 갑자기 발생한 건 아닌 것 같고. 그런데 딱히 가정폭력이나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고… 애인하고는 어때요?

나: 음 잘 지내요(웃음)

의사: 음 그럼 이건 좀 퍼스널(Personal)한 이슈이긴 한데…애인하고 섹슈얼(Sexual)한 건 어때요?

나: 아…네…글쎄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중략)

의사: 계속 말씀드리는 거긴 하지만, 00 씨는 사실 굉장히 상황이 주변 환경이 좋거든요. 공부 잘해서 카이스트도 갔고, 집안 환경도 괜찮고, 그리고 일단 외모도 좋잖아요. (서로 웃음) 사실 비슷한 증상으로 오시는 분들 중에는 정말 어려우신 분들도 많거든요. 그러니까 음…빨리 괜찮아질 거라 생각해요. (후략)

나의 첫 정신과 진료는 이렇게 끝났다. 우려했던 시한부 선고는 없었고, 눈물 펑펑 쏟아내는 자기 고백의 시간도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영화에서 볼 법한, 기다란 침대에 누워 뒤에 앉은 의사에게 구구절절 속내를 털어놓는  치료과정은 일반 정신과 진료에서는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이후의 진료도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방에 들어와 선생님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체크하고, 때로는 선생님의 근황을 들으며 함께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증상의 경과를 확인하고 그 날의 처방을 지어주었다.

지어준 약은 언제나 이러했다. 아침 한 포, 저녁 한 포, 그리고 다른 처방전에서는 보기 힘든 한 가지, 필요 시 한 알. 공황장애 치료를 위한 경구 투약제는 크게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로 구성된다. 항불안제는 투약 후 빠른 시간에 작용하기 시작하며 즉각적인 불안 증상을 완화하는 용도로 쓰인다. 항우울제는 항불안제에 비해 체내에서 다소 느리게 작용하지만 지속시간이 더욱 길며 정신질환의 근본적인 치료목적으로 쓰인다. 일련의 심리검사와 체외검사를 통해 환자의 개별 상태에 대한 진단이 내려지면 의사는 그에 맞게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혼용하여 처방해준다. 신경안정제는 그 자체로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환자 임의로 투약하는 행위는 삼가야 하며 의사의 처방 없이 투약을 중단하는 것 또한 재발가능성을 높이기에 권하지 않는다. 그러니 철저한 투약 스케줄 속에 환자에게 주어진 자유란 필요 시 한 알, 이뿐이었다.

환자는 버티기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환자가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불안한 생각만으로도 자율신경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여 과호흡과 같은 신체 증상을 동반한다는 것인데, 주머니에 상비약이 있다는 작은 안도감만으로도 불안이 줄어 신체 증상을 효과적으로 억누를 수 있다. 달리 말해 의사 입장에선 어느 정도의 위약효과(플라시보)를 기대하고 처방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신체 증상이 많이 좋아진 요즘도 주머니에 늘 상비약을 넣어두고 다닌다. 투약을 시작한 이후 몇 주가 지나자 발작 전의 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나 둘 미뤄두었던 일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페르소나는 매끄럽게 동작하였고 공황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주변 사람들은 나를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주었다. 내 불운을 알고 있던 가까운 사람들도 하나둘 그 사실을 잊어갔다. 나의 공황장애는 점점 가족과 애인과 의사 선생님만이 간직한 조그만 비밀이 되어갔다.

약이 감정을 잡아주었기 때문이지만(나는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의사 선생님은 약이 감정을 잡는다는 표현을 자주 쓰셨다.) 그럼에도 가끔은 작은 알약이 한 사람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나흘씩 약을 끊고 스스로의 의지로 증세를 이겨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곤 다시 약을 집어 들었다. 그땐 감정이나 정신 같은 것들조차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이 싫었다. 그러다 누군가로부터 조언을 들은 이후론 자기통제에 대한 강박을 조금이나마 버릴 수 있었다. 감정은 머리카락 같은 것이라고, 분명 내 것이지만 자라나는 걸 멈출 순 없는 거라고. 그렇다면 항정신제는 탈모방지샴푸 같은 것일까. 그렇게 매일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는 것처럼, 꼬박꼬박 약을 삼켰다.

불안의 안개가 걷힌 자리에선 우울이 드러났다. 공황장애와 같은 불안 증상은 우울증이 기저 원인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울증이 치료되지 않으면 공황장애 완치를 기대하기 어렵다. 공황장애의 재발 가능성이 높은 이유 역시 기저의 우울증이 채 고쳐지기 전에 치료가 중단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환자의 페르소나가 잘 동작하는 경우에 우울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울증 치료는 험난하고 외로운 투쟁이다. 때론 우울증을 빌미로 병역 비리를 시도했다는 한 청년의 뉴스를 한심하듯 바라보는 가족과 부딪혀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주변의 오해와는 달리 꼭 급작스러운 비극만이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울증은 오랜 시간 마음속에 퇴적된 경험들의 총체이다. 자각하지 못하는 동안 침체된 정신이 마음을 잠식하면, 환희에 찬 순간에서조차 무력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불행히도 아직 많은 이들이 주변 상황을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지 못한다. 불안증세 이후 발견된 우울증은 내게도 역시 예상 밖의 일이었다. 밝고 명랑한 사회적 자아가 곧 나 자신이라 믿어왔었기 때문이다.

 

[이미지 3]

<그림 3> 매일 먹어야 하는 알약을 쌓아 올리면 머리끝까지 차오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기분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흔히 상상하듯 사람마다 일종의 기분 게이지가 존재하여 치료를 받을수록 게이지가 차오르는, 그런 종류의 고양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나에겐 엉켜버린 실타래의 끝 단을 살짝 잡아 엉킨 매듭을 풀어나가는, 어떤 종류의 후련함에 더 가까웠다. 상담치료를 받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내 안에 꼬여 있던 많은 것들을 직시하게 된다. 나의 친구, 나의 애인, 나의 가족, 어릴 적의 나. 그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나 자신이다. 너는 너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가. 가장 마지막에 맞닥뜨린 물음이었다. 우울의 반대편에 서 있던 것은 기쁨이 아니었다. 우울의 대립 항에는 해방이 있다.

 

에필로그

의사라는 명사와 ‘나’라는 소유격은 퍽 어울리지 않았다. 의사란 그저 몸살이 무척 심한 날에 찾아가면 다소 심드렁한 표정으로 삼 일치 알약이 나열된 처방전을 지어주는 대상이었을 뿐. 벌겋게 부어오른 편도에 분무 되는 비말형 약품보다 나와 의사의 관계를 적절히 설명해주는 수식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의사라는 공허한 기표에 의미를 채워 넣기까지, 두 낱말의 거리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병원을 나서 2층 외부계단을 내려온다. 화장품가게를 왼편으로 둔 채 교차로를 돌면 번화가가 보인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길목을 채웠다. 그들을 속으로 세어본다. 대한민국에서 공황장애로 고통받는 환자가 십만 명을 넘어섰다는 뉴스를 보았다.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화두이지만 지금 이곳에선 오직 나 혼자 짊어진 무게처럼 느껴졌다. 서둘러 지하철 입구로 들어간다. 오늘은 나의 의사 선생님과 이별하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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