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태양을 죽였을까: 중국 SF영화 리뷰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한혜정, 권주영

hhj29@kaist.ac.kr


 

그림1

<그림 1> <유랑지구 (2019)> 포스터[1]

태양이 죽었다. 다행히도, 인류는 남았다.”[2] 

광활한 우주를 상상할 때 우리는 흔히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나서는 장면을 떠올리고는 한다. 영화 <인터스텔라(2014)>에서 쿠퍼가 인류의 새로운 거주 행성을 찾아 우주 탐사를 떠났듯이, 영화 <마션(2015)>에서 화성에 남겨진 마크가 감자밭을 일구었듯이, 상상 속 인류는 마치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을 발견하고 새롭게 차지해버리고는 한다. 하지만 최근 개봉한 중국 SF영화 <유랑지구流浪地球 (2019)>의 인류는 다른 선택을 한다. 태양의 급격한 소멸 때문에 더 이상 살기 어려워진 지구에서, 인류는 이 지구를 통째로 옮겨 아예 태양계 바깥으로 이동시킨다.

휴고상 수상자 류츠신(劉慈欣)의 2011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지구를 통째로 태양계 밖으로 이동시킨다는 참신한 발상과 더불어, 중국에서 만든 우주 SF영화라는 점에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주목했다. 필자들 역시 그들 중 일부로, 우리가 특히 궁금해했던 것은 원작 소설이 중국에서 영화화되면서 무엇이 강조되고 생략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상상을 구체화하는 것에는 많은 힘과 질서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중국이 ‘우주굴기’를 외치는 지금, 그들은 어떤 우주를 그리고 있으며 또 어떤 우주를 보이고 싶어 하는가.

본고는 영화에 대한 리뷰이자 동시에 영화 뒤켠의 상상에 대한 탐구이다. 필자들은 궈판(郭帆) 감독의 영화 <유랑지구 (2019)>와, 원작 소설을 홀거 남(Holger Nahm) 작가가 영문으로 번역한  <유랑지구 (2012)>를 비교하며 그 차이가 함축하는 바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영화와 소설 모두 ‘태양의 죽음’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는 인류를 그리고 있지만, 두 매체에서 이를 그리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지금부터 그중 몇 개의 테마를 중심으로 ‘태양의 죽음’을 상상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인간을 이루는 것

이야기는 태양의 적색 거성화로부터 시작된다. 태양이 급격히 팽창하여 적색거성으로 소멸한다는 예측에 따라 인류는 멸종을 고민한다.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태양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알파 센타우리로의 이주를 시도한다. 이것은 우주선을 타고 가는 이주가 아니다. 지구를 통째로 옮기는 이주이다. 영화는 이주를 시작한 지구가 태양계를 벗어날 무렵의 며칠 동안의 일화를 짧고 강렬하게 보여준다. 태양계를 벗어나던 중 지구가 목성과 충돌할 위험에 놓이게 되는데,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비로소 본격적인 유랑에 나서는 것이 영화의 핵심 스토리다. 반면 소설은 훨씬 광범위한 시간대를 다룬다. 태양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구의 회전을 멈추는 ‘통제 시기’부터 태양계 밖으로 완전히 벗어나 우주를 떠도는 ‘유랑 시기’까지, 이 긴 시간대를 통해 소설은 새로운 양식의 삶을 차근히 묘사해 보인다.

무엇의 본질을 알아볼 때 흔히 쓰이는 방법 중 하나는 그것을 다른 환경에 놓아보는 것일 테다. 소설은 ‘태양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한 후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충실히 풀어나간다. 태양계를 탈출해 떠도는 인류는 생존과 직접 관련된 것 외에는 태양계에서 살던 시절의 감정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예술과 철학은 거의 가르치지 않으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떠나는 것에도, 아내가 그런 남편과 작별하는 것에도 분노나 주저함이 없다. 이처럼 소설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특한 생활 양식과 사회관계들을 선보이며 ‘이것도 충분히 ‘인간다운’ 삶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끔 우리를 유도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삶의 모습을 태초의 동굴에서의 삶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오늘날의 사회관계들이 되레 증폭되어 나타난다. 그 대비를 잘 보여주는 것이 ‘희망’이라는 키워드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의 아내와 주인공에게 “태양계 시대에는 고결함이란 부나 권력, 재능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희망을 가져야만 고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벗겨내고 인간을 참된 인간이게 하는 요소로서 희망을 내세운 것이다. 반면에 영화에서 희망은 어여쁜 소녀가 다수의 장정에 호소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위기 상황에서 소녀가 울먹거리며 ‘희망은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다운 것이니 우리 희망을 버리지 말아요’라며 지구 곳곳에 방송을 내보내자, 남성 장정들이 소녀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모여든 것이다. 소녀의 호소에 의해 추진력을 얻어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엔진을 밀어 올리는 만국의 장정들의 모습에서, 필자들은 강렬한 이념적, 젠더적 상징을 읽을 수 있었다.

많은 평자가 이 영화를 중국에서 만든 미국식 아버지 중심 가족 드라마라고 묘사했다. 필자들은 여기에 더해,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중국식 가부장적 영웅 서사의 우주 버전이라고 이 영화를 칭하고 싶다. 소설은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주인공의 일생을 1인칭 시점에서 담담하게 묘사하는 반면, 영화는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격정적으로 그려낸다. 이들은 가족과 인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대범한 아버지와 서툴고 저돌적이지만 결국 지구를 구하고 영웅이 된 아들이다. 태양의 죽음은 이들 인류의 영웅을 탄생시켰고 이 새로운 영웅은 기존의 질서를 답습하며 등장했다. 소설에서 태양의 죽음이 인간의 원초적 조건을 묻는 장치였다면, 영화에서는 인간 사회의 질서 강화와 재편성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던 셈이다.

 

인간 너머의 풍경, 인간이 허무는 풍경

소설과 영화 <유랑지구> 모두 지구의 새로워진 풍경에 몰두한다. 하지만 두 매체는 풍경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소설이 변화하는 지구의 풍경을 기행문처럼 한 걸음씩 쫓아간다면, 영화는 오히려 지구의 어떤 순간을 노골적으로 전시한다. 영화는 왜 소설과 다른 방식으로 풍경을 구성할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왜 <유랑지구>의 풍경에 주목해야 하는가? 풍경은 흔히 ‘배경(background)’, 혹은 ‘자연’으로 전시된다. 풍경은 흔히 정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지며, 서사/인물 등과 다르게 메시지를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풍경이 중립적이라거나, 그것에 메시지가 없지는 않다. 모든 풍경은 말한다. 풍경에는 메시지가 숨어있으며, 그렇기에 서사/인물 같은 전경(foreground)보다 더 노골적인 효과를 주기도 하다. 영화 <유랑지구>는 원작의 풍경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구성했는데, 여기에는 영화만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유랑지구>의 풍경은 인간이 창조했다. 이는 멸종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다. 이 선택은 행성 엔진이란 기술을 통해 지구를 움직여 생존하는 것인데, 여기서 생존은 오차 범위 내에서 달성 가능한 임무로 제시된다. 초기 변수와 그 계산과정이 완벽하다면 도달할 수밖에 없는 임무인 것이다. 영화의 풍경에는 생존에 대한 이런 관점이 녹아있다. 영화는 <2012(2009)>와 같은 재난 영화의 문법을 빌려와 풍경을 거대한 스펙터클로 제시한다. 즉 풍경은 살아남기 위해 극복할 문제이자, 선택만 잘하면 해결 가능한 요소로 드러난다. 영화는 거대한 성벽 같은 존재로서 풍경을 전시한다. 생존을 위해 이 성벽을 어떻게 뛰어넘거나 허물어버릴지 고민하며 영화의 서사는 전개되고 완성된다. 실제로 풍경은 인간을 몸소 위협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상하이의 거대한 빙벽은 대도시를 그대로 흡수한 채 주인공을 둘러싸는데, 이는 말 그대로 압도적인 육체이다. 빙벽은 움직이고 인물을 직접 해친다. 생존을 위해서 인물들은 빙벽을 뚫고 들어가 내부에서 사투를 벌인다.

그림2

<그림 2> 영화 속 상하이의 풍경. 빙벽이 초고층빌딩을 감싸며 솟아있다.[3]

그러나, SF영화의 풍경은 <유랑지구>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그려져 왔다. 일례로 허문영 평론가는 SF영화의 우주 풍경이 고전 서부극의 풍경과 맞닿아있으며, 그것은 초시간적이고 초월적인 풍경이라고 지적한다.[4] 요컨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의 검고 아득한 우주 공간은 서부 사나이가 유래하고 돌아가는 미국 중서부의 비경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초월적 풍경은 인물이 직접 몸을 부대끼며 상호작용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원근감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서사를 초과하며 작동하는 존재에 가깝다.

흥미롭게도 이런 풍경은 영화보다는 원작 소설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변하는 지구에 적응하지 못한 채 풍경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반면에 영화는 같은 할아버지를 능숙한 트럭 운전사이자 정신적 지주로 그리는데, 그는 상하이에서 빙벽(풍경!)과 사투하다 동료를 위해 빙벽에 몸을 던지며 최후를 맞는다. 이에 비하면 소설의 풍경은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위 없이 그르 흡수해버렸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또한, 소설은 풍경을 유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는데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다. 여기서도 풍경은 변화한 지구를 멀리서 드러낼 뿐이다. 소설의 풍경은 관찰 가능할지라도 도달 가능한 요소가 아니다.

이러한 대비에 대해 허문영 평론가의 이어지는 코멘트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고전 서부극의 풍경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이후 불가능해졌다고 그는 단언한다.[5] 인간이 달을 걷는 장면이 생중계된 1969년에 모든 초월적인 풍경은 도달 가능한 영역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영화 <유랑지구>에서 그런 변화를 읽어낸다면, 나아가 그 각색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어떤 종류의 해석이나 해법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유랑지구>의 풍경은 거대하고 위협적이지만, 예측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요소이다. 영화가 구축한 풍경에는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기술적인 해결(technological fix)을 확신하는 태도가 숨어있다. 영화가 보여준 여러 풍경은 대부분 얌전해지며, 궁극적으로는 해결된다. 영화가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을 위협했던 극한의 설원을 안전한 공간으로 묘사하는 방식이 그렇다. 여기서 풍경은 재난적이지도 않으며, 성찰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언젠가 제어가 가능해질 투쟁의 공간인 것이다.

 

선지자들과 로봇 사이의 합리성

메시지 전달에서 중요한 것 하나를 감히 꼽자면 ‘갈등’이다. 갈등은 이를테면 안내표다. 갈등은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이 방향 저 방향 흐르던 질서들을 눈앞으로 확 끌어올린다. 그런 점에서, 소설과 영화가 갈등을 다루는 방식에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먼저, 소설의 갈등은 복잡하다. 지구가 태양계를 한참 벗어나 불안정하게 유랑할 무렵. 태양의 흑점이 그대로라는 관측 결과가 널리 퍼지는데, 이는 태양이 적색 거성으로 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 관측으로 태양이 폭발할 것이라는 전문가의 예측이 의심받고, 유랑지구 계획을 수립·실행한 세계정부는 통치의 위기에 처한다. 세계정부를 힘겹게 태양계를 떠났는데 애초에 태양이 그대로였다니! 인류 다수는 세계정부에 반기를 들고, 전투 끝에 세계정부의 통치자와 전문가들은 생명 유지를 위한 우주복을 빼앗기며 처형당한다. 그리고 그들이 혹한의 지표면에서 얼어버린 순간. 태양이 정말로 ‘펑’ 폭발해버렸다는 전개로 소설은 독자에게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영화에는 이러한 반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새로운 적대자를 창조한다. 바로 중국어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인물 사이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사용하는’ 우주정거장의 관리자 로봇이다. 지구가 목성에 충돌하려 할 때, 이 로봇은 지구의 생존 가능성을 0으로 계산하고 자기가 속해있는 우주정거장을 지구에서 분리하려고 한다. 우주정거장을 분리한다는 것은 그곳에 저장된 유전자 정보를 보존하는 대신 지구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인간들은 죽게 내버려 둠을 뜻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비정하고 합리적인’ 로봇은 틀리기 위해 창조되었다. 앞 장에서 언급한 해결 가능한 풍경이 말하듯, 영화 유랑지구의 인류는 문제를 조작하고 고쳐나가며 생존해야 한다. 영화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로봇의 계산과정에 없던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내며 지구를 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변수란 아들과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합리적인’ 변수다.

이렇듯 소설과 영화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확연히 그 양상을 달리한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소설과 다르게 영화의 관객들은 확실한 구도와 전개를 좋아하기에 각색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 또한, 엘리트 통치집단이 의심받고 죽임당한다는 원작의 설정이 영화 제작 시 중국 공산당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할 테다. 하지만 이는 결국 과학과 사회를 상상하는 두 가지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기에 더욱더 흥미롭다.

소설은 과학적 합리성이 의심받으며 통치가 무너지는 전개를 통해, 과학과 정치가 서로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영화는 로봇과 인간의 대립구도를 통해 누가 더 정교한지, 누가 더 합리적인지를 드러낸다. 이는 마치 잘 정의된 펜싱 코트와 같다. 좁게 뻗친 공간에서 같은 합리성을 두고 정교함으로 싸우는 것이다. 소설의 갈등은 복잡하다. ‘태양의 죽음’이란 대전제가 무너지며, 절대적인 합리성이 존재할 수 없는 혼란스럽고 역동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결말을 비트는 뒤늦은 태양의 폭발이 상징하듯, 이곳엔 옳은 해결책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영화가 받아들이기 힘든 결말이었을 것이다. 해결 가능한 갈등을 위해 영화는 ‘영어를 사용하는 로봇이’ 해결책을 잘못 계산한 것으로 설정한다. 주인공과 아버지는 이를 ‘고치고’ 지구의 운명을 통제한다. 로봇으로 오류가 난 합리성을 상징하고 이것을 인간이 고친다는 설정은 클리셰 덩어리이다. 그렇기에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메시지는 뻔한 클리셰를 파고든다. 영화는 그렇게, 태양의 죽음을 자신들이 통제할 기회로 만든다.

 

그림3

<그림 3> 주인공의 아버지는 유능한 우주비행사로 로봇의 계산을 바로잡고 지구를 구한다. 어깨에는 세계정부기와 오성홍기가 달려있다.[6]

 

마치며: 유랑하는 세계에서

영화가 흥행한 직후 중국 관영 매체는 영화가 시진핑 사상을 어떻게 스크린에 담아냈는지 분석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중국이 SF“마저” 정치선전의 도구로 사용한다며 비판적인 논조로 이를 보도했다.[7]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양쪽 모두 SF를 정치와 무관한 어떤 투명한 도화지처럼 바라본다는 점이다. 예컨대 관영 매체에서는 영화가 인류 보편의 “깊고 원대한 역사적 명제”를 보여준다고 극찬한다. 그리고 반대쪽에서는 SF를 ‘도구’로 해석하며, 중국 당국에 의해 오용되었지만, 영화가 정치적이지 않게 읽힐 수 있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정치적이지 않은 SF는 없다. 오히려 SF는 그 과학성을 가면 삼아 가장 정치적인 발언을 해온 역사가 있다. 최근 과학사학회지 Osiris에 실린 한 논문은 중국의 SF가 중국 전통과학과 서양과학 사이의 갈등, 마오주의의 영향 등을 고민하고 풀어내어 왔음을 강조한 바 있다.[8] 모든 상상은 무에서 탄생하지 않듯 과학적 상상 역시 특정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SF가 중국의 사회정치적 맥락을 담고 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이 ‘정치적인’ SF를 소설과 영화 사이의 차이를 중심으로 분석해보았다. 영화 유랑지구는 ‘상하이’처럼 단지 몇 개의 단어로만 존재했던 소설 속 도시들을 실제 상하이의 색채와 음성을 지니는 특정 실체로 살아나게 했다. 또한, 영화는 어떤 모습이어도 좋았을 소설 속 우주복을 중국의 붉은 국기를 또렷이 새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의복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토록 실재하는 영화 속 세계에서, 지구의 유랑은 어떠한 생생한 의미를 지녔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한 중국인을 선두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안녕, 태양계”라고 나직하게 속삭이며 지구의 유랑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에는 슬픔이나 절망은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산뜻한 음색으로부터, 또 화려한 영상으로부터, 필자들은 마치 이들이 지구의 유랑을 내심 기대하고 바라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요즈음에는 중국과 관련된 뉴스가 하루가 멀다고 들려온다. 특히 중국과 미국 등 다른 나라와의 국제관계에 관한 뉴스가 쏟아질 때는 중국이 변동하면서 함께 세계의 풍경도 변화하고 있는 것만 같은 감상이 든다. 영화 유랑지구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이것은 ‘종말’의 이야기이다. 무섭게 타오르다 폭발해버린 태양과 그로 인한 태양계와의 작별이라는 종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종말은 곧 ‘질서의 재편성’ 혹은 ‘재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동치는 세계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역사가 어디로 향할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필자들은 알지 못한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은, 중국은 “유랑지구”라는 생생한 답변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1] Daum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8869

[2] Liu Cixin, trans. Holger Nahm (2012), Wandering Earth (e-book), Beijing: Guomi Digital Technology, loc. 721.

[3] Daum 영화, 같은 링크.

[4] 허문영(2010),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강, 20쪽.

[5] 위의 글, 21쪽.

[6] INVERSE (2019. 05. 09), “Could ‘The Wandering Earth’ Actually Happen? Here’s What a NASA Engineer Says,” https://www.inverse.com/article/54103-could-the-wandering-earth-movie-plot-actually-happen

[7] 동아일보 (2019. 02. 12), “中, 첫 SF영화 인기 끌자 “시진핑 사상 구현” 칭송”

[8] Lisa Raphals (2019), “Chinese Science Fiction: Imported and Indigenous,” Osiris 34, pp.8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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