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달 연대기’와 마법, 미신, 그리고 과학

하버드대학교 과학사학과 박사과정
이종식
joy377@g.harvard.edu


과학이라는 울타리

인류학자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Bronislaw Malinowski)는 그의 1925년 논문 「마법, 과학, 그리고 종교」에서 “아무리 원시적이라고 할지라도 과학적 태도 혹은 과학을 결여한 사람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자연 현상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 및 그 규칙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는, 추론(reasoning)의 힘이 없이는, 그리고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 없이는, 다시 말해, 과학의 토대 없이는” 이른바 “원시 공동체”에서 생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말리노프스키는 기존 인류학계가 “원시인들의 정신(primitive mentality)”은 “전-논리적(pre-logical)”이며 “가장 기초적인 자연의 법칙”조차 이해할 수 없다고 평가절하하며 “원시인들의 지식(primitive knowledge)”을 일관되게 무시해온 점을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원시인들”의 지식 또한 마땅히 ‘과학’의 이름으로 포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i]

非서구적(non-Western)이고 非근대적(non-modern)인 지식에 주목하는 말리노프스키의 문제의식은 20세기 내내, 특히 1970년대 이후에 인류학자 및 역사학자에 의해 문화기술적 역사(ethno-history) 연구로 계승되어왔다. 그들 중 일부는 말리노프스키의 문제의식을 보다 구체화시켜 근대적 지식과 ‘원시적’ 지식, 과학과 미신 혹은 마법 사이의 경계를 의문에 붙였다.[ii] 그 경계 또한 특정한 관점이나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맥락에 결부된 역사적 구성물일 수 있다는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특히 ‘과학적’ 지식의 경계 만들기를 서구 식민주의라는 역사적 맥락과 긴밀하게 연관 지으면서, 서구 근대 ‘과학’과 비서구·비근대 ‘지식들’ 사이의 ‘신뢰성의 위계들(hierarchies of credibility)’을 삐딱하게 보려는 경향을 우리는 포스트식민주의 연구(postcolonial studies) 혹은 포스트식민주의 과학사(postcolonial history of science)라고 부르곤 한다. 학제적 다양성과 지역적 맥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과학적’·‘근대적’·‘서구적’ 지식 너머에 상이한 지식체계들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이 양자를 방법론적으로 동등하게 탐구하는 ‘포스트식민주의적 대칭성(postcolonial symmetry)’을 견지한다. 본고는 이러한 포스트식민주의적 대칭성을 염두에 두고 2019년작 tvN 드라마 <아스달연대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아스달연대기> 위한 변명

고대국가가 성립하기 이전 상고시대 역사 판타지를 표방한 18부작 드라마 <아스달연대기>는 한국 드라마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제작비를 쓰고도 시청률 4.8%에서 8.9% 사이를 맴도는 상대적으로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다.[iii] 특히 많은 비판을 받았던 문제로 미국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표절했다는 논란, 상고사에 대한 고증 실패 문제, 제작과정에서 불거진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 측의 근로기준법 및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의혹 등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평론가들과 시청자들의 미움을 단단히 샀던 것 같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혹한 드라마 제작 환경이라는 구조적이고 명백한 문제를 제외하면, 드라마의 텍스트 내적인 문제로서 표절 논란 및 고증 시비는 다소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고 여겨진다.

우선 <아스달연대기>가 <왕좌의 게임>을 표절했다는 문제제기에 집중해보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아스달연대기>가 <왕좌의 게임>을 표절했기는 커녕 후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인물 및 장소와 관련된 외관상의 유사성을 제외하면, 둘은 전혀 다른 세계관과 메시지를 갖고 있다. <왕좌의 게임>은 일원적인 세계이다. 웨스트로스 대륙의 여러 가문이 수도 ‘킹스랜딩’의 철왕좌를 두고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인다. 게임의 단 한 가지 룰은 약육강식이다.권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멈춤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대상이다. <왕좌의 게임>의 등장인물들은 군사력을 동원하거나 용과 흑마술이라는 초자연적인 힘을 동원하여 적을 분쇄하고 권세와 자원을 장악하고자 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철저히 권력의 무한한 팽창을 도모하는 가운데 약육강식이라는 룰 자체에 근본적 회의를 던지지 않는다.

<왕좌의 게임> 세계관에는다양한 ‘타자들(others)’의 세계가 존재한다. 웨스트로스 대륙 내부에서는 철왕좌를 두고 다툴 자격이 있는 문명화된 ‘일곱왕국’의 가문들 이외에 ‘야만인들(와일들링)’이라는 타자들이 살고 있다. 웨스트로스 대륙 바깥에는 에소스라는 대륙이 있는데, 그곳에 사는 여러 민족들 가운데 ‘도트라키’라는 유목민들의 비중이 높다. 춥고 척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와일들링은 홋카이도, 사할린, 시베리아 등지에서 살아가는 아이누족에 대해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iv] 건조하고 더운 초원 및 사막 지역의 도트라키 민족을 보고 우리는 내륙아시아의 유목민족들(흉노, 거란, 여진, 몽골, 만주 등)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v] 그러나 드라마는 이들 이민족들을 철저히 웨스트로스 일곱왕국 주요 가문 출신 주연급 캐릭터들의 야망에 수동적으로 이용되는 존재로 소비한다. 이들의 지식과 세계관은 전혀 조명되지 않으며, 약육강식과는 다른 대안적 기준(norms)을 가진 주체적 인물들로 이들을 다루지 않는다. 다시 말해, <왕좌의 게임>은 철저하게 스스로 ‘문명화’되었다고 여기는 가문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설정한 게임의 룰에 따라 전개된다. 타자들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 1> 와일들링(좌)과 도트라키(우)[vi]

그렇다면 <아스달연대기>는 어떨까? <왕좌의 게임>의 킹스랜딩에 상응하는 공간이 原도시국가(proto-city state) 아스달이다. 아스달은 엘리트와 지배자의 공간이며 수직적으로 계서화된 공간이다. 도시의 최고 지배계층 타곤(장동건 분), 태알하(김옥빈 분)부터 중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소수민족 출신 하급무사, 몸종, 노예까지 아스달의 거의 모든 인물들은 단일한 권력의 사다리에서 끊임없이 상승을 지향한다. 뿐만 아니라, 16세기 이래 유럽제국주의가 자신들과 이질적인 세계를 힘으로 정복하고 살육했던 역사와 비슷하게, 아스달 사람들에게는 선주민들(‘뇌안탈’)을 학살하여 멸종시킨 역사가 있다. 아스달의 전쟁 영웅 타곤 또한 월등한 청동기술을 앞세워 주변의 타자들인 ‘와한족’과 ‘아고족’ 등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매매하는 데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정리하자면, <왕좌의 게임>의 웨스트로스 일곱왕국과 <아스달연대기>의 아스달은 권력의 무한 추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약육강식, 지식과 힘을 가진 자가 그것을 갖지 못한 타자를 거리낌 없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림2

<그림 2> 도시국가 아스달의 중심부 [vii]

그러나 <아스달연대기>는 <왕좌의 게임>과는 다른 방식으로 타자들을 그린다. 다시 말해, <아스달연대기>는 도시국가 아스달이라는 세계와 아스달 바깥 타자들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다루며, 시종일관 양자 사이의 포스트식민주의적 대칭성을 추구한다. 아스달 바깥의 주요 민족들 가운데 우선 두 주인공 은섬(송중기 분)과 탄야(김지원 분)를 배출한 와한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와한족은 먼 옛날 아스달의 수직적 질서에 환멸을 느낀 한 신녀(神女)가 문명 너머 ‘야만의 땅’으로 탈출하여 형성한 공동체의 후손들이다. 신녀는 와한의 시조인 ‘흰늑대 할머니’가 되어 후손들에게 절대로 작물을 심지 말고(농업의 금지), 동물을 가두지 말고(가축화의 금지), 서로 간에 높고 낮음을 구분 짓지 말아야 하며, 이를 어긴 자에게는 저주가 내려질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치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와한 사람들은 자연의 생명과 사물들을, 그리고 무엇보다 땅을 사적으로 소유한다는 개념을 갖지 않았고, 사유재산의 많고 적음이 공동체 내부의 위계질서의 탄생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차단했음을 드라마는 편견 없이 설명한다. 이 부분은 오늘날 인류학, 고고학, 동물연구(animal studies) 분야의 연구자들이 평등한 채집사회에서 위계화된 농경사회로의 전환점으로 정주 농업과 동물의 가축화를 지목한다는 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viii]

그림3

<그림 3> 와한족[ix]

와한족은 위와 같은 흰늑대 할머니의 정신에 입각하여, 마치 ‘아나키스트 대공’ 표트르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이 자신의 책 『상호부조(Mutual Aid)』에서 말하는 고대와 중세의 자급자족적이고 수평적인 ‘코뮨(commune)’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x] 그러던 어느 날 와한은 타곤이 이끄는 아스달 원정군에 의해 학살당하게 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와한족의 전사 은섬은 자신이 마을을 비운 사이둘도 없는 친구 탄야와 마을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 이들을 구하기 위한 장도에 오르게 된다.

그림4

<그림 4> 와한의 세계관과 아스달의 세계관의 충돌[xi]

이 과정에서 은섬은 잇따른 실패와 좌절을 통해 ‘소유’, ‘권력’, ‘위계’, ‘지배’라는 개념을 학습해 나가며, 힘이 있어야 아스달에 맞서싸울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은섬은 아스달의 세계관에 압도당하고 함몰되기 보다는, 자신의 방식대로 힘을 축적하며 와한의 이상, 즉 덜 폭력적이고 덜 억압적인 세상, 다양한 사람들·민족들 간의 수평적 연대가 관철되는 세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탄야 또한 타의로 끌려간 낯선 땅 아스달에서 기지를 발휘하며 생존하는 데에 성공했고, 권력 게임의 중심부에서 기존의 질서를 내파(內破)하고 대안적인 세계를 도래하게 할 방법을 고민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일원론의 세계관을 가진 <왕좌의 게임>과는 달리, <아스달연대기>는 두 세계관, 즉 아스달의 세계관과 와한의 세계관의 충돌을 다룬다. 또한 어떻게 미약했던 대안적 세계관이 주류 기성 세계관과 대결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는지, 차이들이 접촉(contact), 조우(encounter), 그리고 충돌하는 가운데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구체적이고 우연적인(contingent) 조건 하에 어떤 정치적·실존적 선택을 내리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xii]. 이러한 의미에서 <아스달연대기>는, 서로 사랑하는 주인공들인 존 스노우와 대너리스 타르가리옌조차 서로를 배신하고 죽고 죽이는 이야기로 끝나는, 끝내 일곱왕국의 세계관과 다른 대안이나 그로부터의 초월이 결여된 이야기일 뿐인, 그리고 도트라키 등 수많은 민족들을 수동적인 들러리로 소비될 뿐인 <왕좌의 게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작이자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폭포의 심판

은섬이 어떻게 자신의 대의를 관철하고 세력을 키워갔는가에 대해 미신, 마법, 그리고 과학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여기서는 아고족이라는 민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림5

<그림 5> 아고족 [xiii]

아고족은 도시국가 아스달 바깥에 존재하는 이민족 가운데 가장 강성하고 그 인구수가 많은 민족이다. 아스달의 타곤은 아고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들을 완전히 무력만으로 복속시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고족 내부의 양대 씨족인 태씨와 묘씨를 분열시켜, 서로의 씨족 사람들을 ‘사냥’하여 아스달에 노예로 팔아넘기면 값을 후하게 쳐줌은 물론 귀한 물자를 포상으로 주기로 한다. 고전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지만, 구심점이 없었던 아고족은 동족이 동족을 팔아넘기고 다시 복수하는 악순환에 갇혀 사분오열되었다. 아고족 사람들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을 받게 되는 현실 속에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아고족의 시조신인 ‘이나이신기’의 지도 하에 민족의 통일된 힘으로 아스달을 위협할 만큼 강성했었던 아득한 과거를 그리워할 뿐이다. 이나이신기의 재림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와한의 은섬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여정 가운데 우연히 아고족의 마을에 도달한다.  그러나 동족에 대한 노예 사냥과 그 대가로 주어지는 아스달의 물자에 기생하던 아고족은 은섬 일행 또한 노예로 팔고자 하고, 은섬은 위기 속에서 기지를 발휘한다. 와한의 가르침에 따라, 한 씨족이 먼저 노예로 잡혀간 다른 씨족 사람들을 구해주고, 은혜를 입은 다른 씨족 사람들은 다시 노예로 끌려간 상대 씨족 사람들을 구출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는 방향성을 제시함으로써, 아고족이 동족에 대한 노예 사냥을 그만둘 수 있도록 설득하고자 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 임기응변으로 내놓았던 이 생각은 일부 아고족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은섬이 부족의 시조신 이나이신기의 재림이라는 믿음이 아고족 사람들 사이에서 확산된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외지인 은섬이 아고족 시조신의 재림이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고족 각 씨족의 장로들은 사분오열된 민족의 현실 앞에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했던 사람들의 열망에 반응하여 은섬이 실제로 이나이신기의 재림인지 아닌지 판별하기 위해 그를 ‘폭포의 심판’에 처하게 하기로 결정한다.

폭포의 심판은 이나이신기와 관련된 아고족의 미신이다. 이나이신기가 아직 아고족을 통일하기 이전, 적들의 계략에 빠져 뗏목에 묶여 아고족의 신성한 폭포수에 던져졌지만 폭포의 신이 그를 생환시켰다. 그리고 그 신성에 토대를 두고 이나이신기는 아고족의 살아있는 신이 되어 부족을 통일했다. 현재의 아고족 사람들은 누군가 그 거대한 신의 폭포를 살아서 통과한다면 그가 틀림없이 이나이신기의 재림일 것이라 믿고 있다. 은섬은 이 폭포의 심판을 통과했고, 이나이신기의 재림으로 인정받아 아고족 전체의 열망을 등에 엎은 지도자로 성장한다. 그는 아고족과 더불어 <아스달연대기> 아스달의 타곤과 결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 둘의 대결은 단순히 두 개인의 승부가 아닌 두 세계관의 충돌이다. 즉, 타인에게 먼저 선을 베풀고 은혜는 반드시 갚으며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수평적으로 연대하는 세계와 남을 먼저 치지 않으면 내가 당하고 은혜를 갚기 보다는 배신과 권모술수를 통해 힘을 추구하여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세계 간의 충돌 말이다.

다시 폭포의 심판으로 돌아가자. 주인공이 죽었다가 부활하고 용과 언데드가 등장하는 <왕좌의 게임>이었다면, 아마도 은섬이 소위 ‘주인공 버프’를 받아 신묘한 힘을 발휘하여 보통 사람이면 살아나오지 못했을 폭포에서 생환한 것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스달연대기>에서 은섬은 그저 한 명의 미약한 개인으로서 맹렬한 폭포수 앞에 무력했고 순전히 자력으로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없었다. 은섬이 여행 도중 베푼 선함에 은혜를 입은 물의 부족 ‘모모족’이 깊은 폭포수 아래에서 정신을 잃은 은섬을 살려냈던 것이다.

그림6

<그림 6> 폭포에 빠진 은섬을 구해내는 모모족 [xiv]

은섬은 아고족의 마을로 돌아가고 자신이 스스로 폭포의 심판을 통과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지만, 놀랍게도 아고족 지도자들은 폭포의 심판이라는 신성, 마법, 미신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도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애초에 그들은 자력으로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조건을 둔 바 없었다. 그들은 다만 민족의 절박한 상황 가운데에서 폭포로부터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은섬에게 일종의 카리스마를 부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고족 지도자들은 이 미신의 ‘아우라’를 기꺼이 이용해 민족의 열망에 부응하여 은섬과 함께 새로운 길을 가고자 했던 것이다. 즉, <아스달연대기>는아고족이라는 ‘원시적’인 사람들이 미신과 신성을 공동체 조직과 정치에 ‘이성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그들의 주체적인 시점에서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문명화되고 과학화된 아스달 사람들은 아마도 열등하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단히 무시했을 이 아고족 사람들, 이들의 관점, 이들이 세계와 관계하는 지식과 관행을 포스트식민주의적 대칭성에 입각하여 보여준 것이다.

그림7

<그림 7>  아고족의 열망을 등에 업게 된 은섬

미신, 마법, 그리고 과학

파푸아뉴기니에서 진행한 현장연구 과정에서 포스트식민주의 의학사 연구자 워릭 앤더슨(Warwick Anderson)은 과학이 마법과 등치될 수 있다는 생각(“science as sorcery”)을 갖게 되었다. 1950년대 파푸아뉴기니 포레이족(Fore)의 집단 사망 사례로부터 의학계에 처음 보고된 쿠루병(kuru)이라는 전염병이 있었다. 이후 이 병은 수십 년 간의 현장연구 끝에 미국 생리의학자 칼턴 가쥬섹(Carleton Gajdusek)에 의해 광우병 등으로 대표되는 프리온계 질병(prion disease)의 원형이라고 밝혀졌다. 앤더슨의 2008년 저서 『횡사한 영혼의 수집가(The Collectors of Lost Souls)』는 쿠루병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하는 가쥬섹 등 백인의사들과 현지 포레이족 사람들 사이의 다면적인 상호관계의 역사를 추적한다. 근대 생의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가쥬섹은 파푸아뉴기니 산골 마을에 작은 오두막을 차린다. 그 한 공간에서 식사, 실험, 집필, 환자 치료, 해부가 진행되었다. 가쥬섹은 포레이족의 非자본주의적 교환경제에 적응하면서 포레이 유족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주고 사망한 그들의 가족의 시신을 확보하여 조직검사와 해부를 진행했다. 그런데 포레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 백인과학자의 존재 자체 및 그의 모든 활동이 대단히 수상하게 보였다. 포레이 사람들은 가쥬섹이 오두막에서 자신들의 죽은 가족의 신체 일부를 이용하여 온갖 알 수 없는 도구들과 기계들의 도움을 받아 마법과 저주를 걸어 자신들을 통제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포레이족에게 마법이란 누군가가 나 혹은 우리는 알지 못하는 지식과 실천을 통해 나 혹은 우리를 통제하려는 시도라고 이해되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들에게 근대과학은 마법과 다르지 않았다.[xvi]

이제 슬슬 이 종잡을 수 없는 글의 끝을 맺으려 한다. 핵심 메시지는 포스트식민주의적 대칭성, 좁은 의미의 ‘과학적’·‘근대적’·‘서구적’ 지식체계들과 그와는 상이한 지식체계들을 방법론적으로 동등하게 탐구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입각하여 <아스달연대기>를 보았을 때, 특히 아고족의 폭포의 심판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미신, 마법, 과학은 모두 세계의 일부인 인간이 그 삶의 과정에서 도출해낸 합리적 사유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쿠루병의 사례가 암시하듯, 미신, 마법, 과학은 모두 특정 지식을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수단일 수 있다는 점을 공유한다. 요컨대, 포스트식민주의적 대칭성은 우리가 대체로 보수적으로 정의하곤 하는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를 넓은 의미의 합리성과 지식과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중심으로 재고하게 한다.

이 삐딱하게 보기의 목적이 과학의 부정이나 미신과 마법의 옹호인 것은 아니다. 필자는 또한 근대적·서구적인 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非근대적·非서구적인 것은 무조건 지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과학의 이름을 서구적·근대적 형태의 지식에 국한시키는 어떠한 ‘당연함’과 그것을 타자를 통제하는 데에 사용해온 과학사의 이면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고 싶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과학을 부정하거나 불신한다는 것은 친자본적 반지성주의에 이용당할 위험이 있다.[xvii] 그러나 ‘보편적’이며 ‘진정한’ 과학의 경계를 신경질적으로 수호하는 쉬운 길이 언제나 능사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과학을 갖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심지어 비인간들의!)의 생각과 삶을 찬찬히 들여다볼 기꺼움이 없는 상태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실험실 밖으로, 모든 것이 편리한 도시의 경계 바깥으로 나아가, 논두렁의 밑바닥에서, 먼 바다 너머의 작은 섬에서, 깊은 산과 넓은 초원과 사막에서 살아가는 존재들과 수평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과학이란 불가능한 것일까?  ‘주체(self)’의 세계를 고집하고 그 주위와의 소통을 차단시키는 강고한 벽을 세우기보다는 그것을 연화(軟化, softening)시키고, 편안한 공간(comfort zone) 너머의 ‘타자’의 세계를 직시하고 받아들일 용기를 가진 채 과학을, 과학사를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필자는 <아스달연대기>를 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읽을거리

 

기고한 글에서 다루는 ‘포스트식민주의적 대칭성’을 잘 보여주는 역사학 혹은 인류학 연구서 몇 권을 선택적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동아시아: Erik Mueggler (2011), The Paper Road: Archive and Experience in the Botanical Exploration of West China and Tibet, UC Press.

동남아시아: Anna Tsing (2005), Friction: An Ethnography of Global Connec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남아시아: Kapil Raj (2007), Relocating Modern Science: Circulation and the Construction of Knowledge in South Asia and Europe, 1650-1900, Palgrave.

태평양: 메릴린 스트래선 저, 차은정 역 (2019), <부분적인 연결들: 문명 너머의 사고를 찾아서>; Greg Dening (2004), Beach Crossings: Voyaging across Times, Cultures, and Self, UPenn Press.

아메리카 원주민 연구: Gregory Cajete (2000), Native Science: Natural Laws of Interdependence, Clear Light Publishers.

라틴아메리카: Jorge Cañizares-Esguerra (2006), Nature, Empire, and Nation: Explorations of the History of Science in the Iberian World, Stanford University Press.

아프리카: Luise White (2000), Speaking with Vampires: Rumor and History in Colonial Africa, UC Press;. Clapperton Mavhunga (2017), What Do Science, Technology, and Innovation Mean from Africa?, MIT Press.

 


[i] Bronislaw Malinowski (1949), Magic, Science and Religion and Other Essays, Beacon Press,  p.1, pp.8-9, p.58.

[ii] 이에 해당하는 일부 참고문헌은 ‘읽을거리’를 참고.

[iii] 가장 많은 제작비를 쓴 한국드라마는 550억 원이 투자된 <태왕사신기>(2007)이고, <아스달연대기>는 54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되었다.

[iv] 사할린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현무암, 파이차제 스베틀라나 저, 서재길 역 (2019), <사할린의 잔류자들: 국가가 잊은 존재들의 삶의 기록>, 책과함께.

[v] 내륙아시아사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니콜라 디코스모 저, 이재정 역 (2005), <오랑캐의 탄생>, 황금가지. [Nicola Di Cosmo (2002),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The R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데이비드 O. 모건 저, 권용철 역 (2012), <몽골족의 역사>, 모노그래프. [David O. Morgan (2007), The Mongols, Blackwell, 2nd ed.]; 이훈 (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vii] <아스달연대기> 제16화 22:45

[viii] 정주농업, 가축화, 계급 및 위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제임스 C. 스콧 저, 이상욱역(2015),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 삼천리. [James C. Scott (2009),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An Anarchist History of Upland Southeast Asia, Yale University Press]; 마고 드멜로 저, 천명선·조중헌 역 (2018),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공존. [Margo DeMello (2012), Animals and Society: An Introduction to Human-Animal Studies, Columbia University Press].

[ix] <아스달연대기> 공식 홈페이지, http://program.tving.com/tvn/arthdalchronicles/8/Board/View?b_seq=21

[x] P. A. 크로포트킨 저, 이현 역 (2005), <만물은 서로 돕는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르네상스. [Peter Kropotkin (1902), 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xii]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은 동아시아 과학사의 핵심주제에 다름 아님을 독자분들께서는 금방 눈치채셨을 것이다. Benjamin Elman (2005), On their Own Terms: Science in China, 1550-1900, Harvard University Press; Sean Hsiang-lin Lei (2014), Neither Donkey Nor Horse: Medicine in the Struggle Over China’s Modernit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2008), <한의학, 식민지를 앓다>, 아카넷; Federico Marcon (2015), The Knowledge of Nature and the Nature of Knowledge in Early Modern Japa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Yulia Frumer (2016), Making Time: Astronomical Time Measurement in Tokugawa Japa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xiii] <아스달연대기> 공식 홈페이지, http://program.tving.com/tvn/arthdalchronicles/36/Contents/Html?h_seq=16

[xiv]  <아스달연대기> 제 17화 1:22

[xv] <아스달연대기> 제 18화 1:18:02

[xvi] Warwick Anderson (2008), The Collectors of Lost Souls, Duke University Press.

[xvii] Erik Baker and Naomi Oreskes (2017), “It’s No Game: Post-Truth and the Obligations of Science Studies,” Social Epistemology Review and Reply Collective 6, no. 8, pp.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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