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되어가는 일: KAIST 성소수자 동아리 EQUEL 고인물의 이야기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석사과정

오늘

kaistoh@gmail.com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저는 KAIST 성소수자 동아리의 오래된 회원입니다. 이퀄, 이클립스, 지혜관 지하에서 난교파티를 부리는 사람들… 지난 12년 동안 우리 동아리가 불렸던 수많은, 틀린 이름들 중 몇가지입니다. 들어본 적이 있으실 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모를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적겠습니다. 앞서 나열한 것들과는 전혀 무관한, 1998년부터 지금까지 쭉 같은 이름으로 활동해 온, 우리는 KAIST 성소수자 동아리 EQUEL(이클)입니다.

사실 학부 동아리연합회나 대학원 동아리연합회에 가동아리 신청을 한 적도 없어서 학내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EQUEL은 1998년을 시작으로 꾸준히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시도를 아주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앨라이(Ally) 회원의 가입을 받지 않는 우리 동아리는 학내 동아리연합회 소속의 가동아리 등록이나 정동아리 심사 과정에서 요구되는 일정 수 이상의 활동 회원의 개인 정보를 제출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한편으로는 탄로날 비밀이 결코 아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맘껏 드러내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잠재적 손해가 커다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내에서, 또는 학생 사회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목소리를 내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제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기도 하고, 2014년도부터 몇 차례 대표를 맡으며 동아리의 활동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잔뼈가 굵어져 이렇게 공개적인 공간에 글도 쓰고 있지만, 여러가지 교차하는 정체성 중 소수자 정체성을 내세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할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지만서도 결과적으로 다행인 것은, 수없이 무너지고 부숴지는 경험 후에 저는 꽤나 단단해졌다는 점입니다. 여전히 상처받고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고 주저앉지만, 적어도 우리 학교에 다니는 성소수자 학우가 (비록 가입을 하지는 않았더라도) 우리 동아리의 존재로 잠시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금세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동아리의 이름을 내걸고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제가 동아리를 온전히 대표하거나 동아리를 저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또한 동아리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 하나의 회원일 뿐이고,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은 미숙한 사람입니다. 얼굴을 드러내고 몸으로 부딪히는 활동에 주로 참여해왔다 보니 겨우 이제 막 젠더 이론과 퀴어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막연히 공감하고 연대하기만 하던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공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동아리에 가입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거나 인권운동에 참여하지는 않는 것처럼, 성소수자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 역시 우리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를 못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쓰고, 단체 홍보를 하고, 학업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우리 학교에서 추가적인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부탁합니다. 이 글의 내용은 누군가에게는 몸이 닳아 없어지도록 살아온, 앞으로 얼마나 더 견뎌야 할 지조차 막막한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비교적 간편한 이유로 모른 채 살아갈, 살아가도 될 이야기들일 겁니다. 익숙한 이야기라면 ‘쓰느라 고생깨나 했겠다’ 생각하며 읽어주시기를, 그리고 잘 모르는 이야기라면 ‘사느라 고생깨나 했/하겠다’ 생각하며 읽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늘, 오늘의 이야기

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부모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청소년기에 교회는 저에게 친구들을 만나는 곳이었고,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사회 경험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음에 감사드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그 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베풀어 준 만큼, 혹은 베풀지 않았더라도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베풀 줄 아는 삶의 태도를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었고, 내 머리카락의 개수까지도 아시는 그 분에게 의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행인 점은, 성소수자 혐오가 만연한 개신교 가치관 속에서 교육받고 자라면서도 저는 단 한 순간도 디나이얼denial1을 겪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 때는 이쁜 여자 아이를 좋아하기도 했고, 중학생이 되어서야 ‘게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같은 반의 남자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게이’와 ‘트랜스젠더’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채, 또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로, 남자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렇게 ‘내가 게이인가보다’하며 정체화 했습니다. 다만,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니까, 내가 여자였으면 내 삶은 훨씬 더 행복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제 안의 ‘여성성’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드러내려고도 했습니다. 이후 ‘게이’로 살아오던 중 대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까지도 여자인 친구와 ‘썸’을 타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친구에게도 제가 성소수자임을 알린 후였고, 실제로 그 친구에게 호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다만 당시 이미 호감을 가지고 있던, 다른 남자인 친구의 ‘썸’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너무 아픈 나머지 제 ‘썸’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한편, 저는 2006년 한국을 떠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2011년까지 해외에서 학업을 마쳤습니다. 어쩌면 한국보다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나은 곳에서 지낸 덕분에 디나이얼을 겪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의 젠더 표현은 종종 놀림거리가 되었고, 소위 ‘잘나가는’ 무리들에게 “fag*ot”이라고 불리거나, 몇몇 남자 아이들이 (고맙게도!) 제 입 근처나 엉덩이에 본인들의 골반을 갖다 대고 흔드는 시늉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문제를 제기할 요소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당시의 저는 당당하고 건강했으며, 제 곁에는 우호적인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이때의 경험과 기억이 어쩌면 지금까지도 저를 버티고 살아가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제가 극복하지 못한 숙제가 있습니다. 저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가족들 앞에서 지속적인 아웃팅을 당했습니다. 손위형제가 저도 존재를 잊고 있던 게이 야동을 엄마 앞에서 재생한 날 저는 “독사의 자식”이었고,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었으며, 고등학교 동창의 어머님이 저의 엄마에게 우려를 표한 날, 저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학에 온 후 2012년 여름 방학에는 제가 직접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려고도 했었지만,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지만 받아줄 수 없으니 네가 고치라”는 말로 선제적 차단을 당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에도 셀 수 없는 충돌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의 추억이 담긴 폴라로이드 사진 앨범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대전에 사는 친구들이 서울에 모여 생일 파티를 준비해 준 날에 외출을 금지당했으며, 부모의 마음과 믿음과 신앙과 경력을 짓밟고 부모 얼굴에 “똥칠”하는 가해자가 되었습니다. 정신건강의학의 도움을 받으며 대학원에 돌아와 성소수자 이슈를 공부하는 최근까지도 “왜인지 아직도 ‘이렇게’ 살면서 터덕거리는”, “나의 생명도 나의 것이 아니며 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어둠 속에 있는”, “아직도 정신 못 차려서 결판을 내야할 이 새끼”, 그리고 돌아와야 하는 “아들”이었습니다. 놀랍도록 아픈 이 말들은 모두 저를 죽음까지도 사랑한다는 엄마에게서 들은 말들입니다.

제 살 깎아 먹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견디기 힘들만큼 지쳤고 우울하고 분노가 차오르지만, 그럼에도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반드시 마주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부모님은 훌륭하고 멋지고 사랑이 많은 어른들입니다. 비록 제 마음은 폴라로이드 사진 앨범처럼 갈기갈기 찢어졌더라도, 부모님이 ‘너무했다’거나 ‘나빴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직 저와 제 부모님은 함께 극복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이니, 그저 잘 버텼을 뿐이라고, 고생했다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저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살게 해준 제 부모님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책임한 혐오와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훨씬 더 많습니다. 힘이 되어 주시되, 부디 저보다도 더 힘들어하고 있을 다른 소수자와 약자들을 위해서 힘을 보태 주세요.

시간이 흘러 저는 한참동안 스스로에게 붙여왔던 ‘편의상 게이’라는 이름표를 최근 벗기로 결심했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얻기도 했습니다. 필요한 도움과 치료를 받고 천천히 제 진짜 모습을 찾아가보려 합니다. 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마는, 지금까지 ‘늘’ 잘 견뎌온 것처럼, 매일매일 ‘오늘’을 잘 살아 내기 위해 노력해보려 합니다.

KAIST에서 있었던 일

저에 대한 소개는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제가 지난 10여 년 간 몸 담아온 우리 동아리와 학교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1998년에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이클은 애초에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친목 모임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면 하나 정도를 더 벗고 동료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비밀 결사대와도 같은 모임이었던 것이죠. 제가 처음 이클에 가입했던 2011년의 여름에도 크게 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동아리 내에서도 다양한 정체성과 지향성에 대한 가시화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실정이었고, 남자처럼 보이면 게이겠거니, 여자처럼 보이면 레즈비언이겠거니 하는 얄팍하고 무례하고 무책임한 생각으로 몇 번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광장은 물론 학생 사회 내에서조차 감히 우리가 성소수자 가시화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또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어리다는 핑계로, 아니면 내가 아는 이야기는 스스로의 이야기면 충분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시화에 대한 관심이나 법제화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14년에 처음 동아리 운영자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에도, 위대한 목적이나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다양한 방식으로 게이의 삶을 경험하고 관련 커뮤니티를 경험하면서, 처음 게이 세상에 발을 딛는 후배들이 부적절하거나 건강하지 않을 수 있는 길로 빠지지 않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에게는 없었던 거룩한 인도자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쉽게도 제 도전은 약간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학내 단체의 장을 맡는 일이 어떤 어려움을 동반하는 지 가늠하지 못한 채 동아리의 운영자 역할을 전해 받은 이후 2년 동안 저는 겨우 동아리의 이름을 유지하는 정도의 성과만을 거두었습니다.

2016년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출국을 한 달 앞둔 시점에 동아리에는 새로운 가입자가 세 명 정도 생겼습니다. 정확한 키워드로 검색을 하고 불편한 연락 방법을 통해야만 가입 신청을 할 수 있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기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새로이 가입해 준 회원들에게 저는 ‘여름에 돌아올 테니 그 때부터 같이 다양한 활동을 계획해보자’고 당부하고 교환학생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고, 제가 여름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클은 10배 이상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동아리가 되어있었습니다.

2017년부터는 사회 전반에서 여성과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성공회대학교, KAIST 등에서 커밍아웃한 학생들이 학생 사회를 이끌기도 했고, 인권의 가치와 차별의 심각성이 대두되기도 했습니다. 캠퍼스 내에서는 학생ㆍ소수자인권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고, 인권주간이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교수님들을 중심으로 포용성위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동아리도 인권주간에서 부스를 운영하고, 영화상영회를 진행하고, KAMF 부스를 여는 등 활동의 폭을 다양한 방면에서 넓혀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충분히 빠르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연대의 진영 내부에서 가치관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고, 약자를 핍박하는 폭력적인 백래시가 오히려 더 기세를 얻기도 했습니다. COVID19 팬데믹이 터지면서는 전국적으로 성소수자 인권 단체의 활동이 축소되었고, 많은 학교 동아리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성소수자 인권 담론은 예전만큼 활발히 진행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위험을 무릅쓰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밑 빠진 독에 물 붓 듯 목소리를 내야 겨우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은 여전합니다.

그림1. 학내 인권기구 홍보물에 발생한 훼손과 혐오 발언

그에 비해 “혐오 세력”은 이전보다 더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활동합니다. 2022년 11월 30일에는 동성애ㆍ동성혼 반대 국민연합의 대표이자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운동을 업적삼아 활동하는 교수가 학내에 방문해서 강연을 했습니다. 우리는 즉시 유감을 표했고, 행사 주최 측은 2023년 새해가 밝은 후에 답글을 작성했습니다. 기대했던 내용의 답변은 아니어서 실망도 했지만, 광장에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음에 기쁘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과 슬픔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그림 2. 11월 30일 강연에 대한 입장문 사진과 한 달 뒤 처참하게 훼손된 사진

혐오 세력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지역 사회에서도 드러납니다. 대전광역시 인권센터는 2017년 발족 이후 지역 사회 전반의 인권 의식을 증진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대전인권신문을 발간하고, 지역의 학교와 전국의 공공기관과 협력하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대전시는 2023년 센터의 수탁 기관으로 한국정직운동본부(대표 박경배 목사)를 선정하고, 센터장으로는 바른군인권연구소의 대표 김영길 목사를 선정했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성소수자 차별을 조장하고 혐오 활동을 벌여온 반인권적인 사람들이 대표성을 띠는 시 인권센터의 책임자로 선정된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EQUEL은 버텨왔고, 2022년도에는 3년 만에 오프라인 홍보도 재개하고 인권주간 부스에도 오프라인으로 참여했습니다. 대전인권신문의 2022년도 12월호에는 저희 이야기가 실렸고, 고마운 관심을 받았습니다. 또한, 대전광역시 인권센터 수탁 기관 선정 논란에 관련해서는 2023년 1월 방영된 대전 KBS1 시사N대세남에 인터뷰이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힘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를 배제하려고 갖은 애를 쓰는 상황에서 어쩌면 변화를 만드는 일은 더 어려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교수는 “죽기 전에 일 좀 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죽어서도 일 할 각오로, 성소수자 인권이 법의 보호망 아래 포함될 수 있도록 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사람에서 사람 되기

UN의 세계 인권 선언2 제7조는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어떠한 차별도 없이 법의 동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위반되는 어떠한 차별과 그러한 차별의 선동으로부터 동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3 제10조와 제11조 1항 역시 각각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위 내용을 살짝 다듬으면, “인권”이란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이나 차별의 선동으로부터 동등한 보호를 받으며, 행복을 추구할 불가침하고 평등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또는 주어져야 하는, 권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란 이러한 평등권이 침해당하고, 동등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이런 침해와 보호의 부재가 때로는 선동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빼앗기고 결국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방해가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구권에서 발전하고 정의된 개념을 빌려온 터라 인권이라는 말에는 기독교적인 뿌리(천부인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성경은 대부분 남성 중심적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89년 만들어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에서도 “인간”은 남성으로 대표됐습니다. 1865년 미국 수정 헌법 13조가 발효되기 전까지 흑인 노예는 “인간”으로 존중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1948년 선거에서부터 성별에 관계없이 선거권을 가졌지만, 미국에서는 1920년이 되어서야 여성이, 그리고 1966년이 되어서야 흑인이 선거권을 얻었습니다. 서구권의 발전 역사가 무조건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 사람 답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 인권을 정의하는 가치관과 그 발전 역사에는 참고하거나 배울 점이 많은 것이 명확해 보입니다. 이렇듯, 현재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여러 권리가 사실은 지난한 논의와 투쟁 속에서 쟁취한 것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인권의 개념은 달리 말해 “한 사회에서 누가 인간으로 인정받는가?”의 질문에 대해 그 사회가 법과 제도와 정책의 모습으로 정해 놓은 답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주체Subject와 타자Other의 개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흔히 특권을 가진, 사회에서 기본이자 중심축으로 여겨지는 존재를 주체라고 정의하고, 주체를 성립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존재를 타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남성이 주체로 규정되고 여성이 타자로 규정되는 (삶의 모든 순간과) 상황을 꼽을 수 있겠네요. 제 짧은 글에는 이 중요한 철학적 개념들을 충분히 담을 수 없으니 부디 페미니즘의 역사와 젠더 이론, 그리고 퀴어 이론 등에 대한 좀 더 전문적인 글을 통해 지식을 보충하시길 추천합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여기에 추가로 비체abject의 개념을 소개합니다.

섹스와 젠더의 특정 규범에 맞는 몸들은 ‘bodies that matter’로서 인정되고 ‘물질성’의 위상을 획득하지만, 규범에 순응하지 않거나 들어맞지 않는 몸들은 ‘bodies that do not matter’가 되는 셈이다. 이 후자가 바로 ‘비체 abject’이다… 주체에게 비체는 아예 인식이 되지 않는 자리이다. 그 자리에 사람이 산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상상도 안 되거니와 설령 그런 자리에 사람이 산다는 말을 들어도 “내 주변엔 그런 사람 없는데?”라고 답하게 되는 자리, 그런 자리에 사는 존재 따윈 절대 동일시할 수도 없고 참아낼 수도 없다고 여겨지는 영역이다. 따라서 비체는 타자와 다르다. 버틀러는 비체를 설명할 때 ‘폐제 foreclose’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배제’와 같지 않다. 그냥 쫓아내는 게 아니라 그런 존재가 있었던 흔적, 그런 존재가 있을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지도 않고 인식조차 못하는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존재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인식 장 바깥에 놓이게 만드는 것이다. 타자는 억압받는 존재로 가시화되지만 비체는 현실로 인정조차 받지 못한다. 

– 전혜은. <퀴어 이론 산책하기> (p. 164-166)

보통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들에게는 성별과 인종, 장애유무와 계급 등 눈에 보이는 특성으로도 자신과의 차이가 쉽게 드러나는 존재들이 타자로 인식되리라 추측합니다. 백인 남성에게 백인 여성이, 백인에게 흑인이,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이 타자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인식론적 질서 속에서, 성소수자는 오랫동안 인식 장 바깥에 위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수자라는 존재가 인식 장 안에 진입할 때,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함을 까닭으로 어색한 공기만이 주변을 맴돌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은 다만 누구의 잘못은 아닐 겁니다. 누구라도 생소한 존재와 약간의 낯가림은 가질 수 있을테니까요. 대신 우리는 시끄럽고 요란하고 소란스럽게, 불편하고 끈질기고 독하게 존재하기로 다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는 인식 장 바깥으로 자꾸 밀려나고 마니까요. 자꾸 보이고, 자꾸 들리다 보면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으로, “인간이 아닌”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우리를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썰만 풀기에는 아쉬움이 남아서 제가 최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들과 생각한 것들을 공유해봤습니다. 이 역시도 이미 익숙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익한 이야기, 중요한 지식의 조각일 테니 한 번 정도 더 본다고 나쁠 일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저는 법 해석 전문가도, 인권 전문가도, 배움의 역사가 무지막지하게 쌓인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인 비약이나 오류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최대한 주의했고, 독자 여러분도 너무 공격적이거나 수비적인 태도는 피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나가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합(전장연)의 이동권 보장 시위가 연일 보도됩니다. 출퇴근 시간에 불편을 발생시키고, 지하철의 무정차 통과를 야기하고,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에 막대한 금전적 피해를 안겼다고 합니다. 한편, 서울교통공사는 서울에 살지도 않는 사람에게까지 “불법시위”로 인한 운행 지연과 무정차 통과에 대해 안전안내문자를 보냅니다. 자극적인 방법과 언어로 피해자를 자처합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피해자일까요? 왜 그들이 시위를 하며, 범죄자로 낙인 찍히는 손해를 감수하는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까요?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이 있습니다4. 우리는 모두 언젠가, 또는 언제라도, 장애인, 노인, 외국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뒤늦게 성소수자로 정체화 하실 수도 있겠죠?) “그들”이 겪는 불편과 불평등을 내가 겪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교통 약자의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그들의 절규는 과연 이기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도무지 바뀌지 않는, 일각에서는 심지어 퇴보적인 주장을 펼치며 혐오와 차별을 저지르는 세상에서 정신줄 붙잡고 사는 일이 퍽 어려웠습니다. 전공을 바꿔서 대학원에 다시 진학하기로 결정하는 과정부터, 고백하자면 지금까지도 저는 많은 방황과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적인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죽으려면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 그렇다면 그 전까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해보자, 정책을 공부해보자는 마음으로 STP에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입학해서 공부도 하고 글도 쓰게 됐습니다. 이 글은 ‘과학 뒤켠’에 부편집장이자 기고자로 함께 하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주제에서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채워지지 않은, 채워져야 하는 빈 칸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는 중입니다.

겨우 한 학기 공부한 학생이지만 제가 이해하는 과학기술정책은, 한편으로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정책을 연구하는 학문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책에 있어서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웬걸,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정책도 데이터도 없는 상황입니다.

2022년 3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실태를 파악하고 정책에 반영하도록 관련 조사 항목 등을 만들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5. 구체적인 권고 사항을 제시했음에도 국무총리,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여성가족부, 통계청 등 모든 정부부처는 ‘불수용’했습니다6. 2023년 1월 26일에는 대한민국에 대한 UN 인권이사회 정례인권검토7 (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 Universal Periodic Review)가 진행됐습니다. 독일, 벨기에, 핀란드, 덴마크, 코스타리카, 칠레, 캐나다, 호주 등 다수의 회원국은 한국 정부에게 성소수자를 포함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습니다8. 차별금지법은 2007년 국내에서 처음 발의된 이후 16년째 제정되지 않고 있으며, 21대 국회에 들어서는 정의당 장혜영 의원, 민주당 권인숙, 박주민, 이상민 의원 등이 총 4건의 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하지만 법제사법위원회는 해당 법안에 대한 심사를 현 국회의 임기가 끝나는 2024년까지 미뤄둔 상태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교수와 목사들을 포함해 “올바른 인권”을 주장하는 세력은 차별금지법이 동성애를 퍼뜨리고 국가를 망하게 할 악법이며, 특정 종교인을 핍박할 수 있게 만드는 도구라고 선전합니다. 자신들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해서 사과하기는커녕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체의 자리에서 타자의 자리로 스스로를 옮겨보지만, 다시 타자의 자리에서 비체의 자리로 내몰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선명하게 빛나고 찬란하게 반짝일 겁니다. 우리를 못 보고 지나칠 수 없게, 못 본 척조차 할 수 없도록.

다차원적이고 복잡한 이해관계와 풀리지 않는 숙제가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온갖 키워드와 정보가 난무하는 초연결시대의 세상에서 눈 앞에 떠오르는 내용을 비판적으로 소화하는 것 역시 훈련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신뢰도가 높은 정보를 구별할 수 있고, 다양한 관점에서 소개된 입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여느 인권 운동에서나 그랬듯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변화를 일궈오지 않았습니다. 타자로 인식되기까지 만으로도 많은 힘과 노력이 들어서도 맞겠지만, 결국 주체의 자리에 위치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공명할 때 진정한 의미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피곤하고 지치는, 하염없이 기다리고도 실망스러운 소식만을 듣게 되는 허무한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해주듯이, 우리 존재는 반드시 세상에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기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주시기를, 그리고 연대해주시기를 부탁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을 거리

퀴어 이론 산책하기 / 전혜은

“퀴어 이론은 무엇일까?”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입니다. 입문서처럼 읽을 수 있도록 잘 정리된 한편, 퀴어 이론과 맞닿아 있는 젠더 이론, 장애 이론 등에 대해서도 참고할만한 자료를 제안합니다. 혹시 이 글의 독자들 중 ‘그래서 퀴어가 뭔데?’라는 생각이 드신 분이 있었다면, 추천합니다!

퀴어 성서 주석 I, II / 데린 게스트, 로버트 고스, 모나 웨스트, 토마스 보해치 엮음, 퀴어 성서 주석 번역출판위원회 옮김

종교 진영에서는 문자 중심적인 성서 해석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자행합니다. 이 책에서 유수의 신학자와 성서학자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바탕으로 퀴어 이슈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제시하고, 기존의 질문과 고대 본문을 재해석합니다.


[1] 자기 부정. 많은 (성)소수자는 학습된 가치관, 사회적 시선 등의 이유로 정체화 과정에서 스스로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경험을 합니다. 이는 죄책감, 자살 사고를 포함한 정신적인 고통이나 자해, 자살 시도 등의 신체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2] https://www.ohchr.org/en/human-rights/universal-declaration/translations/korean-hankuko

[3] https://www.law.go.kr/LSW/lsEfInfoP.do?lsiSeq=61603#

[4]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694588

[5]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35614.html

[6]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77025.html

[7] https://media.un.org/en/asset/k10/k10ekje7ai

[8]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77194.html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WordPress.com 제공.

위로 ↑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