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기관사(機關史)에 숨 불어넣기: How to read institutional history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박예슬

sru.hps@snu.ac.kr

1970-80년대 한국 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한 나는 논문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바로 원자력, 과학관료, 국산화와 같이 딱딱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주제에 왜 계속 관심이 가는지에 대한 것이다. 다른 동료들처럼 실천적이고 개인의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고 잘 하는 분야는 이와는 정반대의 ‘딱딱한’ 주제들이었다. 그와 걸맞게 가장 오래 보고 재미있게 봤던 사료는 기관사와 정부보고서였다. 

기관사란 특정한 기관에서 자신의 성과와 위상을 정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글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과학기술 50년사』,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원자력연구원 60년사』와 같이 기관들은 주로 10년마다 “『○○○○ N년사』”라는 이름으로 기관사를 출판한다. 기관의 성과를 시간순으로 빼곡히 정리해 놓은 기관사 읽기는 상당히 지난한 일처럼 느껴진다. 몇 십 년 동안 기관에서 쌓아온 업적을 장황하게 자랑해 놓은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야 하는데, 기관사의 분량은 적게는 300 페이지에서 많게는 1,000 페이지에 육박한다. 일례로 1981년 ㈜한국전력이 펴낸 『한국전력20년사』는 상, 하 권으로 발간됐는데 그 분량은 각각 1,000페이지를 넘어간다. 게다가 기관사는 주로 십 년에 한 번씩 새로 발간되기 때문에 기관사를 분석하는 연구자는 똑같은 내용을 10년사에서 한 번, 20년사에서 또 한 번, N년사에서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읽어야한다. 이런 과정을 생각하면 기관사 읽기는 누구나 다 아는 역사를 반복적으로 읽는 재미없고 지루한 과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하면서 가장 유용하고 재미있던 사료는 바로 기관사였다. 기관사에서 나오는 굵직한 사건들을 기준삼아 공식 서사에서 보여주지 않는 사건들을 다른 사료를 통해 파헤치고 분석하는 작업은 한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시각을 비교하고 나의 주장을 만들어 나가는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이 글에서는 내가 학위논문 작성과정에서 경험했던 기관사 읽기 방법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기관사도 나름대로 유용하고 재미있는 사료라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방식으로 기관사를 분석할 것이다. 우선 한 기관에서 10년마다 출간했던 기관사를 비교분석하고, 다음으로 같은 사건을 다룬 두 기관의 기관사를 다룰 것이다. 전자를 다루기 위해 지금까지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출간했던 기관사를 분석대상으로 삼고, 후자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한국전력 자회사인 한국핵연료주식회사의 기관사를 활용할 것이다. 

시작하기에 앞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이 역사연구를 할 때 기관사만을 봐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연구자가 기관에서 드러내지 않는 내용을 다른 사료를 통해 찾아내고 분석하는 작업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기관사란 무엇인가

앞에서 간단하게 소개했던 것처럼 기관사는 지금까지 기관에서 행해온 성과를 정리한 글로 기관의 업적을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고 기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사용된다. 내부적으로는 기관의 전통이나 경영 문화를 내부 구성원들에게 전달 및 교육하는 역할을 하며, 외부적으로는 기관의 이해관계자를 비롯한 여러 독자층에게 기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주로 정부공식기관에서 편찬하는 글은 ‘기관사’로, 기업에서 편찬하는 글은 ‘사사(社史)’로 불린다.2 

기관사의 가장 큰 장점은 상당히 많은 정보가 한 권의 책 안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기관사를 읽고 나면, 기관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 내용이나 기관의 구조 변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그림 1> 1959년 연구용 원자로 기공식에서의 이승만 대통령과 김법린 원자력원장

기관사의 가장 앞 부분에는 기관이 수행했던 사업의 사진들이 실려있는데, 이는 기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자료다. <그림 1>은 『한국 원자력 20년사』,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에 공통으로 삽입된 사진으로 1959년 한국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마크-2(TRIGA Mark-Ⅱ) 도입을 기념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원자력원장 김법린이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는 장면이다.3 1959년 원자력원 산하에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된 이래로 이들은 원자력 기술의 상업적 이용보다는 원자력 기술의 연구개발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트리가마크-2 기공식 사진은 이런 원자력연구원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트리가마크-2 원자로가 전력 발전용으로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발전용량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당시 원자력연구원 엔지니어들은 기술 도입으로 국내 연구역량을 높이고 이 원자로를 발판 삼아 원전의 자력 설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됐던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에서도 연구용 원자로 도입을 원자력연구원의 첫 사업으로 제시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 사업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잘 보여준다. 

기관사는 중요한 사진 자료를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기관이나 사업에 대한 정확한 연혁을 제공한다. 기관사 마지막 장에 부록으로 실린 연표와 기관 조직도가 그 역할을 하는데, 연구자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기관의 변화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원자력 20년사』의 연표를 통해 기관의 성과를 일자별로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1959년부터 1979년까지 기관의 조직 구성 변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원자력청 10년사』에는 원자력청 기구표를 비롯하여 직원 현황, 예산, 시설현황, 연구원 별 주요 연구 주제, 연구원들의 출신 등 당시 원자력청과 관련된 정보를 아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기관사가 보여주는 것: 한국원자력연구원의 60년 돌아보기

한 기관에서 10년 마다 발간한 기관사들을 비교해보면, 기관의 정체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원자력연구원의 첫 기관사는 상위기관인 원자력청에서 1969년에 발간했던 『원자력청 10년사』이다. 이 책은 당시 원자력연구원에서 상업용 발전을 위한 연구개발보다 원자력 기초연구와 응용연구 개발에 집중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내용을 살펴보면, 원자력발전 사업뿐 아니라 방사선의학, 방사선농학 등 원자력 기술개발 분야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상업용 발전소를 건설하는 원자력 발전 분야의 경우 책에서는 이 분야의 계획과 미래 전망을 추상적으로 제시하는 반면, 방사선의학과 방사선농학, 국제협력 분야에서는 현재 연구 실적을 아주 자세하게 나열했다. 이런 설명은 당시 원자력연구원이 연구개발과 인력양성에만 집중할 뿐 원자력발전 사업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맡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상업용 원전 건설 논의가 잘 이뤄지지 않았으며 1968년 ㈜한국전력이 원전 건설의 주계약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국내 원전 건설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전까지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원자력’이라는 최첨단 기술을 간판 삼아 정부의 지원을 받고 응용연구개발에 집중했던 것이다.4 1963년과 1965년 각각 방사선의학연구소와 방사선농학연구실이 설립되면서 원자력연구원은 1960년대 동안 박정희 군사정부가 지향했던 응용연구 개발에만 집중했다. 이들이 원전 건설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하고 ㈜한국전력과 경쟁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그림 2> 『한국 원자력 20년사』 첫 페이지(좌)와 두 번째 페이지(우)

이와 달리 1979년 4월에 발간된 『한국 원자력 20년사』에서는 정부와 원자력연구원 간의 관계를 『원자력청 10년사』보다 더 강조하고 있으며,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연구개발 및 국산화를 추구한 기관으로 자신을 정체화했다. 우선 책의 가장 첫 번째 장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원자력연구원에게 전달한 “새시대의 동력”이라는 내용의 휘호가 있고, 그 다음 장에는 박정희의 사진이 삽입되어 있다. 1960-70년대 원자력연구원의 활동을 설명할 때도 1967년 과학기술처의 설립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다뤄진다. 예를 들어, 1967년 과학기술처의 발족으로 원자력원은 원자력청으로 격하되어 그 역할을 이어 나갔다고 서술했다. 1970년대 서술에서는 1973년 민영화된 형태의 한국원자력연구소 설립으로 “연구개발비의 거의 대부분을 정부가 출자”하게 되면서 다른 연구기관보다 “장기적이고 국책적인 연구개발 사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5 요컨대, 1979년 기관사에서 서술된 원자력연구원은 정부의 장기전원개발계획에 맞춰 상업용 원전 개발에 필요한 기술개발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10년 전에 발간됐던 『원자력청 10년사』와는 다르게 기초 및 응용연구 실적보다 원전 건설 사업과 사업에서 원자력연구원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이후에 출판된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 『한국원자력 50년사』,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에서는 지금까지 원자력연구원에서 달성한 기술자립의 성과와 전망을 기대하는 논조를 확인할 수 있다. 세 기관사에서는 공통적으로 1980년대를 기술자립기로 표현하고 이 시기에 이뤄졌던 원자력 기술 ‘국산화’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홍보했다. 이 시기를 거침으로써 오늘날 한국의 원자력 기술을 수출할 만큼 그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세 기관사 모두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기조나 정부의 지원을 다루고 있지만, 『한국원자력 20년사』처럼 대통령의 휘호를 전면에 삽입하거나 정부의 역할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기관사는 같은 사건을 다루더라도 기관사를 작성할 당시 기관의 정체성에 따라 그 논조가 조금씩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가 『한국 원자력 20년사』가 발간된 지 10년이 아닌 11년이 되던 1990년에 출판됐다는 것이다. 기관사가 1년 늦게 발간됐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을 수 있지만 기관사가 아닌 사료를 참고해보면, 이는 원자력연구원이 1980년 한국에너지연구소로, 그리고 1990년 다시 한국원자력연구소로 개명한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 한국원자력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이 1980년 12월 19일을 기하여 통합되어 원자력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소장에는 차종희 박사가 선임되었다. (…) 원자력이란 단어의 사용도 금지된 통폐합의 배경에는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정사(正史)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이면사가 존재한다.”6

1980년 전두환 정부에서 추진했던 정부출연연구소 통폐합 과정에서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꿔야만 했는데, 이는 기관을 폐쇄하라는 미국의 압박을 피하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당대 과학관료 박승덕은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를 계속 의심하여 1980년 원자력연구소 이름을 바꿔야만 했다고 언급했고, 과학관료 강박광 또한 연구소의 이름을 바꾸고 대덕으로 이전하는 시도는 “미국의 압력을 피해가는 한 방법으로 외형상으로는 서울의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전략”이었다고 회고했다.7 1990년, 미국으로부터 한국이 원자력 기술을 평화적으로만 이용한다는 이미지가 굳혀지고 나서야 기관 이름을 다시 ‘한국원자력연구소’로 바꿀 수 있었고, 아마 이들은 ‘원자력’이라는 단어를 ‘되찾은’ 뒤에 기관사를 완성한 것으로 추측된다.8 

기관사가 보여주지 않는 것 9

이처럼 같은 기관에서 다른 시기에 발간한 기관사들은 기관의 정체성과 지향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기관사는 기관의 모든 역사를 대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필요에 따라 특정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축약하거나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쓰여진다. 1980년대 초반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의 추진과정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2012년에 발간됐던 『한전원자력연료30년사』에는 1980년대 추진됐던 경수로형10 핵연료 국산화 사업은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한국핵연료의 합심 덕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원래 이 사업은 외국 회사로부터 출자를 받을 계획이었지만, ㈜한국핵연료 사장 한필순을 비롯한 과학기술자들의 기술 자립에 대한 의지 덕분에 결과적으로 외국 회사와의 합작 없이 자체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기관사의 서술에 따르면 이후 이 사업은 별 문제없이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는 ‘기술 국산화’라는 국가적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던 과학기술자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우리 회사는 이들 기관에 대해 약 1년간이나 계속된 끈질긴 설득작업을 펴 나갔다. 그런 노력으로 결국 ‘핵연료 국산화 사업계획 변경(안)’은 1984년 7월 30일 부총리의 재가를 얻었다.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국내 기술자립을 국가적 과제로 인식하였고, 국내 기술개발 결과를 반영하여 기술도입 시 활용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점과 외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경영으로 국가의 정책목표 달성이 용이하다는 점 등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11

이런 설명을 보면 마치 ㈜한국핵연료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합심하여 사업을 추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사료들과 대조해보면 두 기관 간의 갈등, 특히 외국 기업과의 합작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전원자력연료30년사』에 실린 한 회고록에 따르면, ㈜한국전력과 ㈜한국핵연료 측은 외국기업과의 합작을 거부하는 한필순의 태도에 불만을 가졌다. 한필순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내 기술자립을 바탕으로 핵연료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한국핵연료 측 과학기술자들은 “선진 외국의 성능이 보증된 기술이 들여와야 하며 경제성이 없으면 불가하다”고 반박하며 외국회사 합작을 고수했다. 예컨대, ㈜한국핵연료 초대 소장이었던 김선창과 ㈜한국전력 원자력 담당 과장이었던 양창국은 한필순의 의견을 강하게 반대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한국 과학기술자들이 매우 복잡한 핵연료 설계를 외부의 도움 없이 개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원자력연구원도 경수로 국산화 사업에 참여하는 ㈜한국전력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에서 경수로 국산화 사업의 내용을 설명한 단락에서는 “그 당시 한국전력은 핵연료 국산화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왔는데, 이유는 국산화 시 핵연료의 품질이 보장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등으로 “구태여 국산화할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고 설명했다.12 오히려 1983년 전두환의 명령으로 한필순이 ㈜한국핵연료 사장으로 취임하고 나서야 합작회사를 지양하는 ‘진정한’ 국산화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는 경수로형 국산화 개발 사업이 초기부터 공장 착공까지 의견 갈등이나 기술인력 부족 등 여러 난관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요컨대, 한 기관사에서는 이 사업이 문제없이 흘러갔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사료들을 참고하여 이야기를 붙여보자면, 이 사업은 기술 국산화를 향한 과학기술자들의 합심보다는 사업의 지향점을 둘러싼 이들의 갈등을 더 보여주는 사례였던 것이다. 

1980년대 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논의되지 않은 또다른 이야기는 반핵운동에 대한 것이다. 1980년대부터 원전 건설 반대, 방폐장 입지 선정 반대, 온배수로 방출 반대 등 원자력 발전으로 인한 피해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있어왔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는 환경운동조직과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반핵운동이 본격화됐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13 하지만 원자력 관련 기관사에서는 1980년대를 ‘기술자립기’, 그리고 1990년대를 ‘기술자립성숙기’로 표현하며 이와 관련된 언급을 최소화했다. 가장 최근에 출간된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에서는 “대다수 언론과 국민여론은 원자력발전기술 국산화 사업을 이해했지만, 일부 반핵단체는 반대”했으며 방폐장 관련 사업들은 반대여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았다”고 언급하면서 1980-90년대 반핵운동 활동을 부차적인 역사로 서술했다. 

나가며

이 글을 통해 기관사와 같이 ‘정돈된’ 글 읽기가 생각보다 지루한 과정이 아닐 수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기관사는 보여주고 싶은 사건들만 잘 정리해서 자랑해 놓은 글이지만, 글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다른 사료들을 활용하여 내용을 비교하고 재구성해 읽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작업이다. 나 역시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하면서 가장 유용하고 재미있게 읽었던 사료는 바로 기관사였다.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보는 일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10년사와 20년사, 30년사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거나, 기관사에 아주 짧게 쓰인 정보를 시작으로 공식 서사에는 쓰이지 않은 숨어있는 정보들을 발굴해 나가는 작업은 재미없는 기관의 서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사를 내 손으로 써내는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서두에서 밝혔던 것처럼 기관사는 공식 서사에서 드러나지 않는 비공식 서사를 찾아낼 수 있는 좋은 발판 역할을 한다. 기관사의 내용을 발판 삼아 공식 서사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다른 사료를 활용하여 추적한다면 기관사에서 다루는 정보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기관의 아카이브를 방문해볼 수도 있고, 인터뷰나 회고록 등 다른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 어찌보면 ‘지루한’ 기관사는 연구자가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고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시작점일 수 있다. 

읽을 거리

유상운, 조동원 (2021), 「무전기에서 라디오로-전자 기술 문화와 반도체 산업 발단의 착종사」, 『한국과학사학회지』, 제 43권 제3호, pp. 557-600.

1960-70년대 한국 공식적 전자산업의 역사적 토대가 1940-50년대 비공식적인 기술문화 활동에 있었음을 밝힌 연구로 한국 전자산업의 ‘착종사(錯綜史)’에 주목한 연구입니다. 공식서사가 보여주지 않는, 하지만 한국 전자산업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비제도적 행위자들을 어떻게 추적하고 분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공식서사를 시작으로 새로운 서사를 발굴해내는 방법과 그런 서술의 의의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1.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원자력연구원, 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에너지연구소 등 이름을 많이 바꿨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기관 이름은 주로 현재 이름인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 표기했고, 특별한 설명이 필요할 때만 당대 이름으로 표기했다.
  2. 구찬미, 정연경(2022), 「국내 공공기관의 기관사 편찬에 관한 개선 방안 연구」,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 22권 1호, pp. 27-41.
  3. 한국원자력연구소 (1979), 『한국 원자력 20년사』, 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원자력연구소(1990),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 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원자력연구원(2019),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
  4. 김성준(2012), “한국 원자력 기술 체제의 형성과 변화, 1953~1980”,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90쪽. 
  5. 한국원자력연구소 (1979), 『한국 원자력 20년사』, 한국원자력연구소, 74쪽.
  6.  한국기술경영연구원(2007), 『70~90년대 주요 과학기술정책이 과학기술발전과 산업발전에 기여한 성과조사 분석』, 8쪽.
  7. 한국기술경영연구원(2007), 『70~90년대 주요 과학기술정책이 과학기술발전과 산업발전에 기여한 성과조사 분석』, 15쪽.
  8. 한국기술경영연구원(2007), 『70~90년대 주요 과학기술정책이 과학기술발전과 산업발전에 기여한 성과조사 분석』.
  9. 이 절의 내용은 저의 석사학위논문의 4절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10. 원자로의 유형은 원료와 냉각재에 따라 구분되는데, 국내에는 중수로와 경수로를 보유하고 있다. 중수로는 천연우라늄을 주 원료로 사용하고 냉각 과정에서 중수(重水, D2O)를 사용하는 반면, 경수로는 농축우라늄을 주 원료로 사용하고 냉각수로 경수(經水, H2O)를 사용한다. 현재 한국에는 월성 원전을 제외한 모든 원자로가 경수로로 지어졌다.
  11.  한전원자력연료(2012), 『한전원자력연료 30년사:부문사』, 한전원자력연료, 22쪽.
  12. 한국원자력연구소(1990),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 한국원자력연구소, 220쪽.
  13.  반핵아시아포럼 한국준비위원회(1993), 『한국 반핵운동의 역사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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