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개념의 변천사: 물리학과 철학의 교차로에서 (The Evolution of the Concept of Time: At the Crossroads of Physics and Philosophy)

양승연

카이스트 물리학과 학사과정

최근 이론물리학의 최신 논의를 담은 학술서가 번역되어 대중적으로 읽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단순한 교양물리학이 아닌 실제 이론물리학 연구 도중 마주치는 철학적 쟁점들을 전면에 드러내는 책들이 독자층을 넓혀가는 가운데,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와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은 특히 주목할 만한 예다. 두 책은 모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후 물리학에서 시간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었는지를 바탕으로, 시간의 실재성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제시한다. 로벨리는 시간의 비실재성을 옹호하는 반면, 스몰린은 오히려 잃어버린 시간의 실재성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대적으로 익숙한 위의 논의로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시간에 대한 논쟁이 로벨리와 스몰린 전부터 이미 존재했음을 언급하고자 한다. 현대의 이론물리학자들도 자신들의 물리학 이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시간 개념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자신들이 직면한 이론적 난국을 극복하려 하며, 이들 역시 시간에 대한 풍부한 철학적 담론들의 영향권 안에 놓여있음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대물리학에서의 시간과 형이상학에서의 시간의 긴밀한 관계를 가시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간이 실재하는가?”라는 고전적 질문을 “시간이라는 개념이 언제 실제적으로 쓰였고, 어떻게 실재로 간주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수정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을 사변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과학사/과학철학적 탐구로 전환하는 것이 오늘날의 시간에 대한 과학적 사유에 더 유용할 수 있다는 논변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Recently, academic books on cutting-edge theoretical physics are increasingly being translated for the general public to introduce the philosophical issues encountered in physics research. Carlo Rovelli’s The Order of Time and Lee Smolin’s Time Reborn are particularly noteworthy examples. Both books present opposing views on the reality of time, based on how the concept of time has been transformed in physics since Einstein’s theory of relativity. Rovelli defends the unreality of time, while Smolin argues for the restoration of the reality of time.

I note that this debate on time already existed before Rovelli and Smolin. I show that when contemporary theoretical physicists face the theoretical challenge in developing their physical theories, they also seek to overcome it by redefining the concept of time, influenced by the philosophical discourse. Through this process, I aim to visualize the intimate relationship between time in modern physics and metaphysics.

I conclude by revising the classic question, “Is time real?” to “When was the concept of time actually used, and how was it considered real?” I argue that reframing this question, from a speculative one to a concrete historical and philosophical inquiry, can be more useful for contemporary discourse about time.


최근 이론물리학의 최신 논의를 담은 학술서가 번역되어 대중적으로 읽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단순한 교양물리학을 넘어,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기되는 철학적 쟁점들을 직접 대중에게 전달하는 책들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그 중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와 리 스몰린(Lee Smolin)의 『시간의 물리학』은 주목할 만한 예다. 로벨리의 저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현대 물리학, 특히 상대성이론과 루프 양자중력 이론(LQG, Loop Quantum Gravity)1에 기반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이 근본적 실재가 아니라 엔트로피(entropy)2와 관찰자의 시점에서 구성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스몰린 역시 루프 양자중력 이론과 관련한 연구 경험을 기반으로 삼아, ‘우주론적 자연선택(cosmological natural selection)’3 등의 아이디어를 비판적으로 더해 물리 법칙 자체가 시간 속에서 진화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두 주장은 현재 이론물리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논쟁들을 대표한다. 그리고 이 중 많은 논쟁들이 결국 시간 개념을 둘러싼 관점 차이로 수렴된다. 여기서 문제는 ‘시간’이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학 등 다양한 학문에서 각자의 논의를 전개해 온, 유서 깊은 주제라는 것이다. 각각의 학문 영역에서 ‘시간’에 대한 충분히 심화된 담론이 독립적으로 형성된 나머지, 영역들 사이를 넘나들며 논의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시간의 실재성에 대한 여러 학제의 연구들을 연결하며 물리학에서의 시간 개념의 변천사를 재검토하고, 결론적으로 지금의 스몰린-로벨리 논쟁이 21세기에 처음 등장한 싸움이 아님을 보일 것이다.


1)  뉴턴 역학과 절대시간

로벨리와 스몰린의 책들은 모두 물리학에서 시간 개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역사를 주장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리학에서 시간 개념은 뉴턴 역학의 출현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라는 두 개의 사건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한다. 

뉴턴 역학은 인간이 감각하는 시간과는 별개로 흘러가는 ‘절대시간’의 개념을 제시한다. 공간4 전체에 일률적으로 흐르는 시계를 상상해 보자. 그 시계 속 시간은 뉴턴 역학으로 설명하는 모든 물리적 현상들의 당연한 전제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어떤 관찰자도 절대시간을 경험적으로 감각하지 못하고, 이는 그저 도입된 수학적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절대시간의 특성은 그 실재성을 둘러싸고 철학자들이 이런저런 논쟁을 벌이게끔 만들었다.

현대의 여러 과학사학자들은 뉴턴 역학이 매우 성공적인 물리학 이론인 것과 별개로, 뉴턴이 자신의 이론에 단순히 실용적 도구로서가 아니라, 신학적∙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뉴턴이 공간을 ‘신의 감각 기관’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뉴턴이 절대시간을 단순히 계산의 편의를 위해 만든 수학적 대상이 아니라, 외부와 무관하게 흐르는 실재적이고 초월적인 실체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대론 이전 물리학이 전제한 세계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뉴턴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체계를 상상했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1687년 뉴턴은 자신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주석에서 절대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절대적인, 참된, 그리고 수학적인 시간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본성에 의해, 외부와 무관하게, 균일하게 흐르는 것으로 지속(duratio)이라고도 불린다.”

뉴턴은 실재하는 운동을 설명해 내고자 했고, 이에 따라 사물과 독립해 있고 또 완전히 구분되는 틀이라는 시간과 공간 개념에 이르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뉴턴이 세계 전체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하나의 시계를 상상할 때 그 하나의 시계는 세계의 바깥에 놓여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시간은 세계 속 존재자들—관찰자, 행위자, 공간, 힘 등—의 영향을 받지 않고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뉴턴 역학이 그리는 세계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한다면, 우리는 이 모델이 세계 속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는 설명해 내지만, 그들이 시간과 맺을 수 있는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 속 존재자들이 시간과 상호작용한다는 개념이 처음부터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뉴턴 역학에서는 시간 자체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배경으로 상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뉴턴 역학과 뉴턴 역학에서 출발한 이론들이 갇혀 있는 틀이며, 뉴턴 역학의 한계는 이미 그 이론 자체에 내재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상대론이 등장한 뒤에야 비로소 그 한계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2)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시간 개념의 전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상대론을 뉴턴 역학의 한계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독해할 수 있다. 세계의 바깥이 없으니, 세계의 바깥에 놓인 시계 역시 없으며, 절대시간은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시간인 상대시간, 즉 측정 가능한 시간뿐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상대)시간의 개념은 절대시간의 불가능성을 전제함으로써 자연히 도출된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시간과 상대론은 훨씬 더 많은 기존 이론들의 한계를 의식하며 이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구성된 것에 더 가깝다.

아인슈타인과 동시대에 함께 상대론의 발전에 기여한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도 상대론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끝까지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가 있었다.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 이들의 의견은 틀린 것이지만, 당시의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이들의 의견 모두가 나름의 이론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론을 만들 당시, 어떤 학자들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는 별로 없다. 하지만 당대 학자들 중 상대론, 특히 특수 상대성 이론의 일부 측면에 대해 아인슈타인과 매우 유사한 이론을 예상하고, 또 정교화하는 작업을 수행했던 몇몇 학자들에 대해서 ‘특수 상대성 이론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학자들로는 로런츠 변환(Lorentz transformation)을 도입하여 시간 지연과 길이 수축 개념을 제시한 로런츠(Hendrick Lorentz), 아인슈타인에 앞서 ‘상대성원리’라는 표현을 쓰고 그 정의를 제시한 푸앵카레(Henri Poincaré)가 있다.5

로런츠와 푸앵카레가 수행한 작업은 아인슈타인이 상대론을 개발할 때 핵심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로런츠, 푸앵카레,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의 해석에 있어서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로런츠는 여전히 에테르6의 실재성을 믿었다. 로런츠 변환 역시 빛의 속도가 관측자에 상관없이 일정해서가 아니라, 에테르 속에서의 상대적 운동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푸앵카레는 에테르라는 틀, 뉴턴 역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틀을 보존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에테르가 실재한다고 믿었던 로런츠와는 달리, 편의의 차원에서 기존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 이론의 발전에 유리하다고 여겼다.7 반면 아인슈타인은 에테르와 뉴턴 역학이라는 틀을 전혀 보존하지 않고, 새로운 기저 원리—상대성원리와 광속도 불변의 원리—에서부터 이론을 구성했다. 이처럼 뉴턴 역학의 한계를 동일하게 목격했더라도 이론을 수정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가 존재했고, 상대론의 초창기 해석사는 이러한 다양한 선택지를 탐험하는 이들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궤적을 그린다. 지금의 상대론이 완성되기까지 기존의 역학에서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고칠지에 대한 몇몇 중요한 선택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상대론의 해석사를 통해 우리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상대론을 자연으로부터 매끄럽게 도출된 이론이 아닌 끝없는 다툼 끝에 선택받은 이론들이 종합된 결과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아인슈타인의 출발점으로 돌아와서, 그는 맥스웰의 전자기학과 갈릴레이 원리가 양립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실용적인 목표에서부터 출발했다. 상대성원리와 광속도 불변의 원리라는 두 가지의 가정을 들여오면 위의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두 가정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정의하는 작업을 선행했다. 여기서 상대성원리란 물리 법칙이 모든 관성계에서 동일한 형태로 성립해야 한다는 명제이고, 광속 불변의 원리는 빛의 속도가 관성계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항상 동일하다는 명제이다. 아인슈타인의 두 가지 가정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순간, 더 이상 모든 관성계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절대시간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 대신 각 관성계마다 정의되는 상대적인 시간 개념만이 남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상대적인 시간’은 우리가 실제로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시간으로, 뉴턴이 상정했던 절대적인 시간 개념과 대비된다. 아인슈타인이 이 두 가지 가정을 도입할 때 가정들 속에 내포한 의미와, 당시 아인슈타인이 둘러싸여 있던 사회적 환경을 함께 검토하면, 상대론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내린 선택들을 더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시간 측정과 동시성 판단

다시, 시간이 곧 ‘측정가능한 시간’이라면 그 ‘측정’의 절차들도 시간 개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측정은 관찰자가 사건을 지각하고, 자신의 시계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두 관찰자에게 일어난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두 시계를 비교해야 한다. 이때의 동시성 판단을 절차적으로 형식화하기 위해, 두 관찰자가 서로 빛 신호를 주고받는 절차를 추가한다. 서로 다른 관찰자가 측정한 시간은 서로 다르지만, 전달 시간의 차이를 고려해서 보정함으로써 동시성(simultaneity)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보정의 과정을 동기화(synchronisation)라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이러한 동기화의 절차가 동시성의 필수적 조건으로 도입된 것이다.

동기화 절차의 등장은 당시 사회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론을 고안할 당시, 열차가 상용화되고 정확한 지도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국가별∙지역별로 표준 시간을 정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각각의 위치에 따라 흐르는 시간을 명확히 정하기 위해서는 한 시계에서 다른 시계로 전신 신호를 보내 좌표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전기 관측자들은 서로 멀리 떨어진 장소 간의 동시성을 확립하기 위해 전신 신호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여 오차를 보정하곤 했다. 이러한 시간 좌표화 방식은 몇몇 철학자들에게 시간에 대한 철학적 해석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당시 시계를 좌표화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던 푸앵카레는 반복적인 물리학 과정에서의 전기 신호 교환이 시간과 동시성을 철학적으로 재정의하는 데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저서인 『시간의 척도』에서 전자기 신호를 주고받음으로써 두 시계를 동기화하면 두 시계에 동시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시계를 전자기 신호로 좌표화한다는 기술적이면서 철학적인 아이디어를 물리학으로도 옮긴 것이다.

이는 푸앵카레의 국소 시간(local time) 개념으로 연결된다. 푸앵카레는 로런츠가 도입한 국소 시간8을 빛 신호를 이용해 시간을 좌표화할 때, 움직이는 기준 좌표계에서 시계들이 나타내는 물리적 시간으로 재해석했다. 즉, 한 시계가 다른 곳에 있는 시계와 시간을 맞추려면 빛 신호가 오가는 시간을 고려해야 하고, 여기에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고 가정하는 순간, 국소 시간은 실제로 관측자가 쓸 수밖에 없는 시간 좌표가 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이 동기화 절차를 물리적 기초로 삼아, 절대 시간 대신 좌표화된 시계가 정의하는 시간만을 유일한 물리적 시간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앞서 언급한 ‘상대적인 시간’의 의미를 관성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시간으로 공식화한 것으로,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할 때 뉴턴의 절대시간을 거부하며 내놓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종합하면, 뉴턴은 세계 바깥에 놓인 하나의 시계를 상상하며 세계 전체의 시간이 일률적으로 흐른다고 생각했다. 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공간에 좌표화된 시계들의 시스템을 상상하도록 하며, 시간이 실현될 수 있는 신호 교환을 통해 정의되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유지했다.


4) 베르그손-아인슈타인 논쟁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철학계에서 전통적인 시공간 개념을 재검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과학철학과 형이상학 전반에 걸쳐 활발한 논쟁을 촉발했다.9 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시간 정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 철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장은 차례차례 반박되었고, 상대론에 대한 몰이해의 사례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르그손-아인슈타인 논쟁은 상대론에 대한 공개적인 철학적 논쟁의 드문 사례다. 1922년 봄, 아인슈타인은 폴 랑주뱅(Paul Langevin)의 초청으로 콜레주드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 방문하여 3월 31일부터 4월 7일까지 4차례의 강연을 진행했다. 이 강연은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사교계 인사들을 비롯한 대중은 아인슈타인의 방문에 환호했지만, 과학학술원, 프랑스물리학회를 비롯한 프랑스 주류 학계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학문적인 회의와 반유대주의 등의 정치적인 이유로 아인슈타인의 방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상] Albert Einstein lecturing in Paris at the Collège de France. [하] Einstein au Collège de France. 이미지 출처: Collège de France, Instagram @alberteinstein.

4월 6일에는 아인슈타인이 정립한 시간 개념에 대해 베르그손(Henri Bergson)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베르그손은 이 논쟁 이후 『지속과 동시성』(Durée et Simultanéité)을 출간했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핵심 개념인 지속(durée)10을 이용하여 아인슈타인의 시간 개념을 체계적으로 비판한다. 

베르그손의 주된 쟁점 중 하나는 ‘동시성’이다. 베르그손은 ‘동시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의식 내부의 내적 지각이 제공하는 시간 경험에 기반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아인슈타인의 ‘동시성’은 수학적으로 좌표계 위에 사건들을 배치하고, 공간적 도식으로 시간을 환원함으로써 정의된다. 하지만 베르그손이 보기에 이러한 표상들은 내적 지속, 즉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을 전제하지 않는 한 ‘빈 기호’에 불과하다. 

시간이 상대화되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사이의 동시성 여부를 절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같은 계의 경우, 앞서 언급한 두 관찰자에 대한 동시성 판단에서, 두 관찰자가 측정한 두 개의 시계는 동기화 절차를 통해 보정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관찰자와 시계 사이, 즉 관찰자가 사건을 지각하고 자신의 시계를 확인하는 것 사이의 동시성은 당연히 전제된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만약 같은 계에 위치하는 두 시계를 동기화해야 한다면, 관찰자의 지각 내에서 일어나는 두 개의 행위는 어째서 자연히 동기화되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인가? 반대로, 만약 우리 지각 내에서 일어나는 별개의 행위에 대해 분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지각을 바탕으로 하는 동기화 과정 역시 ‘하나의 시간’으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베르그손의 질문이다.

베르그손과 아인슈타인의 논쟁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베르그손의 해석은 저평가를 받았고, 아인슈타인은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시간을 비판 없이 수용한다면, 베르그손의 주장은 뉴턴의 절대시간과 같은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뉴턴의 절대시간은 ‘관찰과 무관하게 균일하게 흐르는 외재적 시간’을 전제했지만, 베르그손이 강조한 것은 우리의 의식에서부터 출발해 구체적인 시공간 속으로 잠기는 ‘지속(durée)’으로서의 시간이다. 베르그손은 오히려 뉴턴이 주장한 것과 같은 추상적인 시간 개념이 현실을 왜곡한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베르그손의 입장은 뉴턴적 시간으로의 회귀라기보다는, 상대론적 시간과는 다른 철학적 층위에서 ‘시간 경험의 실재성’을 옹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5) 베르그손과 푸앵카레의 작업들

1922년 4월 6일, 베르그손-아인슈타인 논쟁이 벌어진 날,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대성이론이 물리 이론으로 인정되었다고 끝은 아닙니다. 이론에 도입되는 개념들의 철학적 의미를 규정하는 작업이 남아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이 발언을 통해, 상대성이론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경험과 철학적 이해 속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지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특수상대성이론의 두 가지 가정 중 하나인 상대성원리의 정립에 기여한 철학자 푸앵카레 역시 상대론의 성과와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탐구하거나 논의를 확장하기보다, 말년까지 상대성원리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푸앵카레가 상대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연구는 자신이 제시한 개념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철학자로서의 신중한 태도로 볼 수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의 두 가지 가정의 진리와 실용성에 확신을 가진 아인슈타인과 달리, 푸앵카레는 자신이 제시한 상대성원리에 대해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epicycle)과 같은 임시방편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하며 지속적으로 의심했다.

푸앵카레에게 시간은 단순히 내적 감각이나 직관으로 정립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작동 가능한 절차들로 튼튼하게 구성되어야 하는 규약이었다. 그렇기에 아인슈타인이 시간을 절차적이고 작동적으로 구성할 때, 푸앵카레와 아인슈타인은 비슷한 행보를 걷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푸앵카레의 학문적 야심은 그렇게 정의된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는 것이 아닌, “시간은 규약이다”라는 말 자체에 있었다. 푸앵카레에게 ‘규약’이란 고정된 동시에 변하는 것이고, 자의적 결정인 동시에 유동적이고, 사회적 합의인 동시에 실재를 구성할 수 있는 실천적인 구조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푸앵카레는 규약이야말로 안정적인 과학적 인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시간은 규약이다”는 말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이론적으로 정의함과 동시에 절차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시간이 실재를 구성하는 현장 전부를 포괄하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 대한 베르그손의 비판적인 태도와 푸앵카레의 회의적인 태도는 단순히 상대론의 형성 과정에서의 잡음이 아니라, 새로운 물리학적 패러다임을 둘러싼 철학적 긴장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이후 과학철학과 과학사적 연구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베르그손과 푸앵카레의 접근은 여러 번 재조명되었다.


6) 베르그손-아인슈타인 논쟁에서 스몰린-로벨리 논쟁으로

4차원 시공간은 비시간적이지만 시간이라는 변수가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관점이 받아들여진 이후, 상대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하는 수학적 방법들—이를테면 휠러-다윗 방정식—에는 시간 변수 자체가 사라진다. 이러한 물리학 이론들에서 우주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 시간 변수의 소멸에서 출발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물리학자들이 등장했고, 이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세계에 대한 겉보기 현상일 뿐이라는 로벨리의 해석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스몰린의 비판적 관점은 시간을 제거한 수학적 형식화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한다는 판단에서 출발한다. 이 논지는 직전에 다뤘던 아인슈타인에 대한 베르그손의 비판과 연결된다. 베르그손이 추상적인 시간 개념이 의식 속 현실을 왜곡한다고 비판했던 것처럼, 스몰린 역시 시간 없는 수학적 형식주의가 세계의 실제적인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둘 다 ‘시간의 실재적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는 공통의 요구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스몰린은 여기에 상대론과 양자역학 등 성공적인 물리학 이론들은 모두 우주의 부분 계에서만 잘 작동하는 근사적인 이론으로, 실제로 고립되어 있지 않은 세계를 고립되었다고 가정—세계 속 존재자들과 시간 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뉴턴 역학의 가정 등—한 후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결합한다. 그리고 자신의 책 『우주의 일생(The Life of the Cosmos)』에서 제시한 이론인 ‘우주론적 자연 선택(cosmological natural selection)’ 등의 개념을 이용하여 잃어버린 시간의 실재성을 복원하는 형태로 물리학 이론이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더해, 단순히 사변적인 논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몰린은 실제로 시간의 실재성을 긍정하는 형태로 양자역학과 상대론을 수학적으로 재공식화하는 작업을 계획한다. 

로벨리와 스몰린의 대립은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다투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철학의 오랜 문제인 과학적 실재론의 논의들을 소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적 실재론은 성숙하고 성공적인 과학 이론은 (근사적으로) 참이라는 주장으로, 과학적 지식이 실재를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 과학적 실재론에 반박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도구주의자들로, 과학 이론은 현상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일 뿐, 이론이 ‘참’이라거나 과학적 존재자들이 ‘실재’라거나 하는 진술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싸움은 과학 이론 속 모든 존재자들과 이론 담화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꼭 시간 개념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과학 이론이 참인지, 과학 개념이 실재인지에 대한 논의를 참고하는 것으로는 이들의 대립을 분석하기 어렵다. 이들의 대립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직관적이고 수학화된 이해와 더 나은 물리학 이론을 위해 현시점에 ‘실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싸움의 경우 어느 한쪽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결론 낼 수도 없다. 물리학이 세계를 설명할 때 시간 개념을 어떤 지위에 둘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선택을 내림으로써 싸움의 승패는 결정된다. 로벨리가 관측된 시간이 본질적인 현실이 아닌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구성된 현상이라고 말할 때, 시간의 지위는 ‘세계의 당연한 전제’에서 ‘우리가 설명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로 하락한다. 반면 스몰린이 시간이 본질적인 현실이라고 단언할 때, 시간의 지위는 다시 ‘현실의 당연한 전제’의 위치로 상승한다.

한 시대에는 절대 제거할 수 없는 틀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불필요한 허구가 되어 사라진 과학 개념들은 수도 없이 많다. ‘시간’ 역시 이렇게 버려진 과학 개념이 되어야 할지를 두고 1922년 아인슈타인과 베르그손이 논쟁을 벌였고, 21세기가 된 지금 로벨리와 스몰린이 그 논쟁을 이어받았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시간 개념의 역사적 전개는 단순히 물리학 이론의 발전을 넘어서, 인간의 경험과 철학적 사유가 물리학적 설명과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를 드러낸다. 뉴턴의 절대시간이 설정한 외재적 기준틀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간과 블록 우주로의 전환, 그리고 루프 양자중력과 양자우주론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정의와 지위를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진행되어왔다. 그리고 현대물리학의 시간 논쟁은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 속에서 시간을 경험하고 이해하려는 오랜 시도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스몰린과 로벨리가 제시하고 있는 논점 역시 시간의 실재성을 둘러싼 물리학적 선택과 철학적 해석이 서로 만나는 교차로에 위치한다. 이들의 논쟁은 두 물리학 이론 사이의 충돌인 동시에 시간에 대한 두 개의 철학 사이의 충돌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과학과 철학은 서로의 관점이 쉽게 호환되지 않는 긴장 속에서도, 논의가 교차하는 지점을 계속 만들어왔다. 이러한 논의의 교차점은 단순히 학문적 충돌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물리학적 기획의 가능성을 열어주거나, 기존 이론의 설명력을 확장하는 자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읽을거리

  •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쌤앤파커스 (2019)

카를로 로벨리는 루프 양자중력 연구의 핵심 인물이다. 로벨리는 이 책을 통해 물리학과 철학의 경계를 오가며 ‘시간’이 절대적인 흐름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양상임을 다양한 비유와 물리학 이론을 통해 제시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이 소멸된 과정에 대한 본문의 설명을 보다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 리 스몰린,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김영사 (2022)

리 스몰린은 현대 이론물리학에서 시간의 실재성을 복원하려는 입장을 제시한다. 그는 우주의 근본 법칙조차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진화한다’는 신선한 관점을 주장하며, 이와 연결된 논의를 펼친다. 이 책은 시간을 대하는 현대 이론물리학의 정통적 관점을 제시한 전반부와, 자신의 이론과 기획을 제시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의 철학적/물리학적 의미를 재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흥미로운 책이다.

  • 피터 갤리슨,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동아시아 (2017)

과학철학의 크고 추상적인 논쟁들로부터 벗어나서 개별 사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과학사학의 즐거움을 알려준 책. 시간과 동시성에 대한 철학적 관점, 우리 주변을 둘러싼 시계 네트워크와 시간에 대한 사회적 약속들, 우리 각자가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까지. 그 사이를 아인슈타인과 푸앵카레가 어떻게 왔다갔다하며 시간에 대한 이론을 조직했는지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 글에서 지면의 한계로 인해 푸앵카레의 생각들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는데,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참고하길.


미주

  1. ‘루프 양자중력 이론’이란 일반 상대론의 장, 즉 시공간 자체를 양자화하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일반 상대론에서 시공간을 기술하는 구조가 연속적일 수 없다는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시공간이 불연속적이라는 가설 아래에서, 이 불연속적인 구조를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단위들을 정의한다. ↩︎
  2. 엔트로피란 한 물리계가 가질 수 있는 ‘무질서도’ 또는 ‘가능한 배열의 가짓수’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닫힌 계의 엔트로피는 결코 줄어들지 않으며, 이 때문에 시간은 항상 한쪽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
  3. ‘우주론적 자연선택’은 리 스몰린이 제안한 가설로, 블랙홀 내부에서 새로운 우주가 형성되며 물리 상수가 약간씩 변한다고 본다. 그 결과 블랙홀을 많이 만들어내는 물리 상수를 가진 우주가 선택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마치 생물학에서 생존에 유리한 개체가 자연선택에 의해 더 많이 퍼지듯, 다중우주(multiverse) 속에서 블랙홀 형성이 잘 되는 우주가 더 많이 재생산된다고 설명한다. 이 가설은 우주 상수와 물리 법칙의 값이 왜 지금과 같은지를 설명하려는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
  4. 여기서 ‘공간’은 직선과 평면이 평행성과 삼각형의 내각 합 같은 성질을 만족하는 유클리드적 공간을 뜻한다. 뉴턴 역학의 기본 전제는 이런 평탄하고 절대적인 배경 공간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이후 아인슈타인이 도입한 비유클리드적 시공간 개념과 구별된다. ↩︎
  5.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에 영향을 준 이전 문헌들에 대한 인용을 소홀히 한 경우가 많다.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논문에서 로런츠의 이름은 여러 번 언급하지만, 푸앵카레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논문에서는 로런츠와 푸앵카레 모두 언급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푸앵카레의 글을 읽고 영향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상대론의 역사를 연구하는 또 다른 흥미로운 갈래 중 하나다. ↩︎
  6. 에테르는 ‘빛의 매질’로 상정된 물질로, 파동이라면 반드시 매질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던 19세기 물리학자들에 의해 제안되었다. 그러나 마이컬슨-몰리 실험에서 ‘에테르 바람’이 측정되지 않으며 에테르 존재 가설이 강하게 흔들렸고, 이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 “빛의 속도는 모든 관성계에서 동일하다”는 원리로 에테르 개념을 불필요하게 만들면서, 에테르라는 개념 자체가 물리학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
  7. 이러한 푸앵카레의 관점을 규약주의(conventionalism)이라고 한다. 푸앵카레는 이론과 개념을 상정하는 일을 규약을 만드는 일로 보았다. 시간과 공간, 우리의 위치 등이 푸앵카레에게는 전부 규약에 해당했다. 이러한 푸앵카레의 관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을 인용하고 싶다. “절대적인 것의 자연신학에 대해서는 영국인들이나 걱정하게 내버려두자. 문제는 편리함이지 신의 허락이 아니다.” ↩︎
  8. 로런츠는 에테르에 의해 정지한 참된 시간에 따라 우주의 모든 과정이 진행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참된 시간과 국소 시간을 구별하면서, 관측자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국소 시간(겉보기 시간)에 가깝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참된 시간에 대한 착시”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
  9.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W.V.O 콰인(W.V.O. Quine),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과 같은 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물리학 이론을 중심으로 논리학적 연구를 진행했던 라이헨바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을 자신의 과학철학의 핵심적 사례로 삼았으며, 20세기 미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콰인은 아인슈타인이 시계와 빛 신호를 써서 동시성을 정의한 것을 동시성에 대한 가장 탄탄한 논리로 선택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시간 개념이야말로 “훗날 과학을 … 수정해야만 할 때가 온다 하더라도 끝까지 보존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Galison, 2003) 개념이라고 판단했다. ↩︎
  10. 여기서 지속(durée)이란 단순히 초, 분, 시와 같은 단위로 잘린 시간의 흐름이 아닌, 의식 속에서 겹치고 흘러가는 질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의식 안에서 내적 지각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직관적으로 체험한다고 말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시계, 해의 움직임 등 외부 세계의 변화도 지각하고, 그 중 일부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시간 경험은 의식의 내부와 외부에 있는 흐름들을 모두 지각하여 형성된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1. 피터 갤리슨. (2017).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동아시아.
  2. 스타티스 프실로스. (2024). 『과학적 실재론』. 사월의책.
  3. Poincaré. (1898). La mesure du temps.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4. Einstein, A. (1905). “Zur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 Annalen der Physik.
  5. 르네 데카르트. (2002). 『철학의 원리』. 아카넷.
  6. Darrigol. (2004). “The Mystery of the Einstein-Poincaré Connec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7. H.A. Lorentz. (1937). “Electromagnetic phenomena in a system moving with any velocity less than that of light”. In: Collected Papers. Springer, Dordrecht.
  8. 이지선. (2019). 「철학자의 시간과 물리학자의 시간-베르그손과 푸앵카레의 상대성이론 해석-」. 한국철학회 『철학』 제140집.
  9. 이지선. (2021). 「1922년 파리, 베르그손-아인슈타인 논쟁—“두 문화”에서 두 (과학)철학으로–」. 『프랑스사 연구』 제45호.
  10. 정태을. (2022). 「특수상대성이론의 시간에 대한 베르그손의 비판」.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11. 강형구. (2025). 「21세기 이론물리학에서 ‘시간의 실재성’이 왜 문제인가? 」. 2025년 한국과학철학회 학술대회 발표문.
  12. 이미지 출처: Collège de France, Instagram @albertei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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