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삶의 현장: 치킨 배달원의 일기

배달원 A


뉴스를 보면 국가에서 많은 것을 약속하고 추진하는 것 같다. 사회의 다양한 현안이 대두되면 그에 따른 정부 정책도 주목받는다. 국가에서 국가 예산으로 진행되는 많은 일들, 다 청와대에서 주관하는 것일까? 정부 부처(ㅇㅇㅇ부, ㅇㅇㅇ청, ㅇㅇㅇ처)가 할까? 정부와 공공기관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전혀 몰랐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일하기 전까지는.[1]

 

국가는 사회의 발전과 구성원의 안녕에 책임이 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법으로 꽤나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헌법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헌법 제127조 제1항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위를 비롯하여 국가에서 해야 할 많은 역할을 헌법에서 정하고 있다. 그 역할은 중앙정부의 각 부처에서 나누어 하고 있다. 외교는 외교부에서, 재정은 기획재정부에서 맡는 식이다. 그러나 정부 부처에서 추진하는 모든 일을 직접 하기보다는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을 통해 진행하는 것이 인력, 전문성, 효율성 등의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여 각 부처에서는 소속기관과 산하기관을 두어 국가에서 진행하는 정책의 실무를 운영하고 있다. 소속기관과 산하기관의 차이를 ‘느낌적 느낌’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직영점과 대리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를 예로 들자면 우정사업본부, 중앙과학관 등 5개 소속기관을 두고 있으며, 산하기관으로는 한국연구재단을 비롯한 공공기관, 정부출연연구소, 과학기술원 등 63개의 기관이 있다.

 

임의의 회사 (주) 뒤켠치킨이 있다고 치자. 청와대와 직속 기관은 뒤켠치킨의 CEO다. 중앙부처는 뒤켠치킨 본사 내의 조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CEO 가라사대 “빨간 맛 신메뉴를 만들어보자”라고 하면 뒤켠치킨 본사에서는 CEO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열심히 신메뉴의 컨셉과 전략을 구상해서 레시피를 개발한다. CEO의 철학이 담긴 <빨간 맛 치킨>이 탄생한 것이다.

그럼 대리점에서 할 일은? 레시피대로 치킨을 만들어서 고객에게 배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치킨은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과제이며 고객은 연구자 또는 연구기관, 레시피는 연구과제를 평가하고 관리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대리점에서 레시피에 충실하게 닭을 요리해야, CEO와 본사가 고객에게 전달하고자 한 맛 그대로의 치킨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레시피’는 어느 정도까지 법이나 규정을 통해 관리되고 있을까? 규정에서는 구체적 방법이나 과정보다는 역할과 책임의 범위가 주로 서술되어있다. 요컨대 이런 식이다.

 

(기름의 사용)

1 생닭을 튀기는 데 사용하는 기름은 포도씨유, 카놀라유, 콩기름 중 하나여야 하며, 각 기름 종류에 따른 튀김 온도는 본사에서 지정한 레시피에 따른다.

2 제1항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종류의 기름을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본사 담당자의 승인을 득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이건 된다’와 ‘이건 안된다’ 정도의 테두리를 그려놓은 것이 규정이고, 그 안에서 최선의 길을 찾아 레시피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본사에서는 콩기름이 좋겠다고 레시피 개발을 했지만, 대리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기름으로 튀겨보니 이 메뉴에는 포도씨유가 더 적합하다’는 의견을 내면 규정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또, 예상치 못한 이유로 원래 쓰려 했던 기름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일시적으로든 계속적으로든 승인을 받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 하는 일이 다 그렇듯 경우에 따른 변수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대리점은 때로는 고객 의견수렴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칭찬이든 불만이든 본사 콜센터에 전화를 거는 것보다, 자주 보는 동네 가게에 피드백을 전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얘기는 본사에 말하면 좋겠어요.”라며 운을 띄우는 고객이 있는 한편, 본사에서는 “신제품에 대한 반응을 꼼꼼하게 체크해서 알려달라”는 요청이 온다. 대리점 입장에서는 뒤켠치킨의 경영철학과 고객에 모두 귀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치킨집 전화벨은 끊일 날이 없다. 고객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다 보면 뒤켠치킨 대리점으로서의 브랜드 가치가 흔들리고, 본사의 경영철학에 군소리 없이 따라가다 보면 손님들이 불만 섞인 피드백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대리점은 대리점 나름대로 치킨집으로서의 고민도 해야 한다.

 

나는 공공기관 업무의 모든 것은 아주 명확하고 세세한 매뉴얼로 정해져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실무자가 채워야 하는 여백과 챌린지가 있고, 그에 따라 업무의 완성도가 달라진다.

공공부문에서 일을 하면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도 있다. 이전까지 나는 공공서비스의 사용자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봤다. 장학금을 신청하는 방식이 바뀌어도, 의료보험 혜택을 받던 것이 줄어들어도, 그런 것들은 다 미지의 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을 배우고 시작할 때에는 마치 시계 침을 보고 시간을 읽을 줄만 알다가 뚜껑을 열어서 태엽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는 듯한 신선한 재미와 깨달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국가와 지역사회의 영향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시민으로서, 이 깨달음은 재미로 그치지 않고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대에서 공학을 배우면서, 연구를 하는 것만이 ‘과학을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연구재단에서 일을 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과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내가 여태까지 알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알아가고, 해 나가고 있다.


 

[1] 본 기고는 개인의 생각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로, 작성자가 속한 단체의 의견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2] 직영점: 본사에서 직접 관리하고 경영하는 가게/ 대리점: 일정한 회사 따위의 위탁을 받아 거래를 대리하거나 매개하는 일을 하는 가게 (출처: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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